소설리스트

군터-53화 (53/1,064)

<-- 노예 사냥 -->

군터는 십여 기의 수하들과 함께 고원의 언덕에 있었다. 나머지 부하들은 모두 정찰을 보낸 상태였다. 근 한 달여에 가까운 시간 동안 100명이 넘어가는 큰 무리는 이제 다 처리가 된 것인지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기에 군대도 그에 맞춰 소규모로 흩어져 넓은 범위를 수색해 나가고 있었다.

“…뭐 좀 보이냐?”

“아니. 전혀.”

부하 병사들이 서로의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그들은 조금 전부터 고원 아래에 광활하게 펼쳐진 초원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중이었다.

“대장님은 독수리의 눈을 가지셨나?”

“글쎄. 독수리의 눈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랑은 상당히 다른 눈을 가지셨다는 건 분명하지.”

그들 역시 아쿼러즈다. 초원의 혈통을 타고 난 만큼 말을 타는 재주 뿐 아니라 멀리 있는 것을 보는 좋은 눈도 가지고 태어났다. 그런 그들조차 여기서 가만히 있으면 이따금씩 하늘 위를 지나가는 새들 말고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군터가 좋은 눈 뿐 아니라 좋은 귀도 가졌다는 것을. 그들 딴에는 조심한답시고 귓속말을 주고받은 것이겠지만, 군터의 귀에는 그들의 숨소리마저 명확히 들렸다.

‘성가시군.’

이 정도면 사람이 아니라 짐승 수준이다. 부하들은 농담처럼 한 이야기겠지만, 군터는 정말 자신의 시력이 독수리 정도는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청력 역시 말소리 뿐 아니라 숨소리마저 포착할 정도니 어지간한 짐승 뺨 칠 수준이다. 이것은 단순히 뛰어나다 정도를 넘어 비정상의 영역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좋은 눈과 귀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았지만 그래도 본래는 상식선 안이었다. 그 선을 넘어가기 시작한 것은 역시 신물을 받고 나서였다. 근력도, 순발력도, 시력, 청력 등 모든 신체능력 전반이 꾸준히 좋아지고 있었다. 찝찝하기는 해도 나쁠 것은 없는 일이라 여겼으나, 이런 청력 같은 것은 솔직히 성가셨다. 듣고 싶지 않은 것까지 듣게 되고 신경을 쓰게 되니까 말이다.

부하들이 소곤거리는 말소리가 적지 않게 거슬렸지만 뭐라 하지는 않았다. 보이는 것도 없이 가만히 있으려면 어지간히 좀이 쑤실 텐데, 저렇게 속삭여대는 것까지 못하게 하면 힘들 테니까.

“음.”

그렇게 부하들이 내는 소음을 애써 무시하며 먼 곳을 주시하던 때였다. 무언가를 포착한 군터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움직인다! 신호를 보내라! 거리가 상당하니 효시를 쏴도 무방하다.”

“옛!”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화살 한 대가 높이 치솟았다. 동시에 이곳저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붉은 천을 단 화살이 올라왔다.

*

수는 대략 마흔 남짓이었다. 꼬질꼬질한 몰골을 한 채 갈대숲을 이동하던 그들은 그들의 앞에 나타난 군터 기병대에 맞서 결연히 칼을 뽑았다.

“qwrubuqiw!(막아라!)”

특이한 자들이었다.

말 한 필 없이 움직이는 것이야 사정이 어렵다면 그럴 수도 있었다. 부족을 탈출 할 때 너무도 다급히 움직이느라 말을 챙기지 못했을 수도 있고, 여기까지 오는 도중에 식량을 구하지 못해 말을 잡아먹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척 보기에도 크게 차이가 나는 전력 앞에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칼을 뽑는다는 건 상당히 특이했다. 특히나 죽자 살자 길을 열기 위해 덤벼드는 것도 아니고, 진형까지 짜서 버티기에 들어간다면 말이다.

‘시간을 끌려고 하는군. 어째서?’

사내와 계집이 반반 정도씩 섞인 구성이었다. 초췌한 몰골을 하고서도 하나 같이 눈빛이 강렬했으며, 두려움은 보이지 않았다.

“wqerbiu tnoinweitn.(항복하면 살 것이다)”

“fesdiohawop.(시체를 밟고 가라)”

혹시나 해서 말이라도 꺼내 봤건만 돌아오는 답은 예상보다도 더 딱딱했다.

“어떻게 할까요?”

“어설프게 하다가는 다친다. 모두 죽여라.”

풍기는 기세만 보아도 쉽게 여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게다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죽을 각오까지 한 모양이었다. 그런 적을 상대하면서 생포를 노렸다가는 이쪽이 피를 본다. 아쉽지만 차라리 다 죽이고 수급이라도 챙기는 것이 낫다.

“다 죽이라고 하신다!”

“쓸어버려!”

군터의 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은 일제히 뒤로 빠지며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말안장에 걸어두었던 활을 들었다.

“qirbwqirwbo!(활을 쏜다!)”

적들이 다급히 튀어나가려 했으나 그들이 얼마 움직이기도 전에 화살 수십 대가 날아들었다.

“크악!”

“꺅!”

밀집해 있던 적들이었다. 몇 발자국 떼기도 전에 퍼부어진 화살을 피할 방도는 없었다. 그냥 막 쏘는 화살도 아니고 정확히 조준해서 쏘는 화살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군터 기병대의 전원이 기사에 능하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더 없는 불운이었다.

“크으……!”

“qriobqwor!(돌파하라!)”

하지만 놀랍게도, 수십 대의 화살이 쏟아졌지만 그들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그들은 일제히 몸을 일으켜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병사들이 재차 거리를 벌리며 다시 화살을 쏘았지만, 화살이 몸에 틀어박히면서도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포위망이 벌어집니다.”

살라스의 말처럼, 적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퍼지는 통에 포위도 덩달아 넓어졌다. 애초 포위한 병력과 포위당한 적들의 수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던 만큼, 적들이 작정하고 달리기 시작하자 포위간격이 있으나 마나 한 수준으로까지 벌어졌다.

“직접 쳐야 할 듯싶습니다.”

“편히 죽기를 거부하는군.”

군터가 창검을 고쳐 쥐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자 살라스가 즉시 명령을 내렸다.

“근접사살을 허락한다!”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거리를 벌리며 활을 쏘던 병사들이 활을 다시 안장에 걸고 대신 칼과 창을 들었다.

*

쾅!막아섰던 적이 들소의 뿔에 치인 들개마냥 높이 떠 날아갔다. 그의 창검과 부딪친 칼은 산산이 부서져 허공에 비산했다. 날아간 자는 특별히 베이거나 찔리지 않았음에도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aiwooboiwb.(개죽음일 뿐이다)”

시체처럼 쓰러져 피거품을 무는 적에게서 시선을 뗀 군터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또 한 명의 사내가 칼 한 자루를 든 채 그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사내가 무표정을 한 채 담담히 말했다.

“wirop qwiroboqiwrqwie.(배반자는 이해할 수 없겠지)”

군터가 피식 웃었다.

“wir? hiasiandob?(배반? 무슨 배반?)”

“qwiowin wqeirhen qweirni qwieqoo qwrib rernpqrwnp.(살기 위해 고향을 등져도 동족을 살해하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넌 배반자다.)”

“하하하하핫!”

군터가 파안대소했다. 억지로 짜낸 웃음이 아니라 정말 진심에서 우러나온 웃음이었다. 이 상황이 유쾌해서가 아니라, 말 같지도 않은 헛소리를 진지하게 하는 눈앞의 사내가 우스웠기 때문이다.

“ihoigedaf weiorq kilao belo aeroiner.(동정심을 구하는 핑계치고는 너무 구차하군)”

창검의 극이 똑바로 사내를 가리켰다. 웃으며 휘었던 눈은 어느새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

히히힝!

배를 채인 말이 콧김을 뿜으며 달려갔다. 창검이 도끼처럼 위에서 아래로 내리 찍었다. 사내가 급히 옆으로 몸을 날리며 창검은 바닥을 찍었다. 흙먼지가 훅 일어나고, 말이 울부짖으며 방향을 틀었다. 사내가 몸을 채 다 일으키기도 전에 말발굽이 사내의 머리를 노리고 떨어졌다.

“차앗!”

카앙!말의 목을 노리고 치솟던 검이 불똥을 튀며 튕겨져 나갔다. 군터가 번개처럼 창검을 뻗어 걷어낸 것이다. 급히 찌른 것이었으나 힘을 견디지 못하고 튕겨나간 것은 사내 쪽이었다.

힘의 차이는 확실했다. 사내는 군터의 공격을 피해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기 바빴다. 몇 합 겨루지 않아 사내의 몸은 풀 쪼가리와 흙으로 범벅이 되었다.

“헉…헉…….”

사내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렸다. 그러면서도 눈빛은 여전히 강렬하고 칼 끝은 정확히 군터를 향해 있었다. 군터는 내심 사내의 정신력에 감탄했다.

‘상당한 자군.’

정신력을 제하고 순수하게 실력만 보아도 이제껏 그가 상대해 본 자들 중 손에 꼽을 만했다. 그의 부하들 중 가장 실력이 뛰어난 살라스도 눈앞의 사내에는 못 미칠 것 같았다. 말을 탄 그를 상대로 칼 한 자루만 가지고 이 정도까지 버틴 실력은 적아를 떠나 인정할 만한 것이었다.

“denqiworasop.(아까운 실력이다)”

“하아…하아…celabrishiodenpa.(승자처럼 말하는구나)”

군터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거칠게 고삐를 당겼다.

히히힝!

말이 크게 울부짖으며 앞으로 돌진했다. 사내가 이를 악물고 칼을 뻗었다. 그 순간 전력으로 질주하던 말이 높이 뛰어 올랐다. 사내의 칼은 말발굽을 아슬아슬하게 스쳤고, 동시에 빛살이 그의 손목을 갈랐다.

촤악!

칼을 쥔 손이 팔에서 떨어져 나갔다.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손목을 움켜잡았다. 떨어져 내린 말발굽이 사내의 무릎을 찍었다. 육중한 말의 무게가 무릎을 짓누르자 사내의 무릎에서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우드득!

“크아아악!”

고통에 몸부림을 치지만 억센 말발굽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창날이 발버둥치는 그의 목 앞에 멈춰 섰다.

“haralo wieorbuqrio…reirbena.(네가 지키려던 놈도 곧 보내주마)”

일그러졌던 눈이 큼지막하게 뜨였다. 사내가 뭐라 입을 열려던 찰나, 예리한 창날이 그의 목을 파고들었다.

“커, 커허허……!”

“말을 하려면 늦기 전에 했어야지.”

핏물이 솟구치는 목을 틀어쥐면서도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필사적으로 소리를 낸다. 하지만 군터는 이미 그에 대한 흥미가 식은 뒤였다. 그가 무슨 중요한 말을 하려고 했든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모를 거라 생각했나. 멍청한 놈이.’

처음 그들의 수는 정확히 마흔 둘이었다. 그런데 공격이 시작되자 어느 순간 그 수가 서른 여덟로 줄어들었다. 무슨 수를 쓴 것인지는 몰라도 네 명이 새벽의 이슬처럼 갑자기 증발해버린 것이다.

‘무슨 수를 쓴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언젠가 몸을 감추는 술수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등에 날개가 돋아난 것이 아닌 이상에야 이 주변 어딘가에 있다는 뜻.

‘어디냐.’

군터가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귀는 들을 수는 없다. 당장 주변에 고함이며 비명, 창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가득하다.

그러니 눈이다. 아무리 몸뚱이가 투명해졌어도 땅에 발을 딛고 걷거나 뛴다면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다.

빠르게 사방을 훑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에 풀들이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군터의 입가에 비소가 떠올랐다.

“이랴!”

*

“허억! 허억!”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희한한 것은, 소리는 들리는데 풀 말고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jusdrteb farael, ngfisopdfigpu(넌 이제 한계다. 신녀님. 제게 업히십시오)”

“sioeihoi.(미안합니다)”

“sdfafbuoiabe asiri.(그런 말씀 마시고 어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 풀숲이 한 차례 들썩였다.

그때 화살 한 대가 날아들었다.

“꺄악!”

화살은 흔들리는 풀숲 중앙에 정확히 날아들었고, 뾰족한 비명 소리와 함께 허공이 흔들렸다.

“신기하군.”

아무 것도 없던 허공이 파문이 인 호수처럼 흔들리더니 네 명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중 한 여인은 옆구리에 화살을 달고 있었다.

“찾았구나. 쥐새끼들.”

여인 셋은 경무장을 하고 있었고, 그 뒤에 숨은 또 다른 여인은 무장 없이 두툼한 털옷을 입고 있었다. 모양새로 보아 세 여인은 그 뒤의 여인을 지키려는 것 같았고, 그 여인이 바로 지금 사투를 벌이고 있는 이들 모두가 지키고자 하는 대상인 듯했다.

“얼마나 대단한 년이기에.”

“아악!”

불안한 듯 떨고 있는 여인을 물끄러미 보던 차에, 화살을 맞은 여인이 옆구리에서 화살을 뽑아냈다. 꽤 깊게 박혀 아팠을 텐데도 기합인지 비명인지를 짤막하게 뱉었을 뿐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계집과 드잡이질 하는 취미는 없다만.’

정확히는 침대 위를 제외하면, 이다.

하여간 순순히 칼을 내려놓을 생각은 없는 것 같으니, 어쩔 수 없이 상대를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qiwbrewui?(어머니들 먼저?)”

“끼야아앗!”

창날을 까딱하며 도발하니 세 여인이 한꺼번에 덤벼들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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