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예 사냥 -->
“헉! 헉!”
한 사내가 수풀을 헤치며 달려 나가고 있었다.
두 손이 뒤로 묶인 탓에 제대로 균형도 잡지 못해, 그는 달리던 도중에 몇 번이고 땅을 굴렀다. 무릎이 까지고 얼굴이 흙과 돌조각에 쓸려 피가 배어 나왔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마치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렸다.
“크헉!”
그가 또 한 번 넘어졌다. 다리가 몸을 제대로 지탱 못하고 휘청거린 것이다. 그는 머리로 땅을 짚고 어떻게든 일어나려 몸부림 쳤다.
‘더 가야 한다. 더 가야…….’
그가 반쯤 몸을 일으켰을 때, 머리 위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quwbqui…wierb noi?(그렇게 달려서…여기까지 왔나?)”
“허억!”
사내가 머리 위에 진 그늘을 확인하고 고개를 들었다. 말 위에 앉은 장한이 그를 내려 보고 있었다. 그와 눈을 마주친 순간, 사내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저앉았다. 그의 눈에서 흐른 눈물이 얼굴의 피와 섞여 내렸다.
“qwebiub qwin qweubqiw!(대초원의 저주를 받을 것이다!)”
“tereho. baskana.(관심 없다. 그런 것)”
서걱!
창날이 목을 깔끔하게 베고 지나갔다. 작은 소리를 내며 핏줄기가 솟았다. 잘린 머리는 툭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졌다. 군터는 그것을 창검으로 꿰어 비스듬히 아래로 들었다. 잘린 목에서 떨어진 핏물을 빼기 위함이었다.
그가 터덜터덜 말을 몰아 진영으로 복귀하니 그를 본 부하들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애들 시키시지 뭐 이런 걸 직접 하십니까.”
“나도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미룰 수는 없지 않겠나.”
군터는 그 말을 하며 창을 크게 휘둘렀다. 창두에 달려 있던 머리통이 쑥 빠져 날아가 포로들 한가운데에 떨어졌다.
“으악!”
비몽사몽 하고 있던 포로들은 갑자기 날아든 것이 뭔지 감을 잡지 못하다가 그것이 사람의 머리라는 것을 확인하자 기겁했다.
“qiro fdonba? dies abndo tara!(뭘 놀라지? 반갑게 맞아주지 그러나!)”
두려움이 번진다. 동시에 분노 역시 번진다. 저들은 고향의 배신자가 자신들을 이리도 모질게 대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으리라.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도망칠까 말까 고민하는 놈들은 줄어들 것이다. 애초에 두려워서 남쪽으로 내려온 자들이다. 더 큰 두려움을 보여준다면 굴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물론 이미 어떻게든 도망치려고 마음을 먹은 놈들은 무슨 짓을 해도 도망치겠지만…그런 놈들은 쫓아가 목을 베면 그만이다.
“너무 몰아붙이시는 거 아닙니까? 벌써 다섯 명 째인데.”
“어차피 모레면 더 볼일 없는 것들이다. 그 동안에라도 귀찮은 일을 덜 수 있다면 이 정도 쯤이야.”
알량한 동정심 같은 것은 애당초 갖고 있지도 않았다. 다섯을 죽여 열을 건질 수 있다면 저들에게도 좋지 않겠는가? 어쨌건 그들이 바라는 대로 목숨은 건질 수 있으니 말이다.
“그…….‘
프레드릭은 뭐라 한 마디 하려다가 도로 목구멍으로 삼켰다. 말한다고 해서 들을 것 같지도 않고, 도리어 날선 반응만 돌아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날카로워지셨군.’
그의 상관은 평소에도 살가운 성격은 물론 아니었지만 지금은 보통 때보다 훨씬 사나워져 있었다. 아마 이번에 내키지 않는 일을 하게 되면서 쌓인 게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러고 보면 우리 대장 나보다 나이도 어리잖아?’
아주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이었다. 누가 알았겠는가! 그것을 처음 알았을 때 프레드릭은 황당함보다 동정과 연민을 먼저 느꼈다. 저 얼굴로 이제 20대 중반이라니? 얼굴로만 치면 누가 봐도 최소 30대 중반 이상이었다.
‘뭐, 어쨌거나 이제 스물 중반.’
20대 중반이면 부대 전체를 놓고 봐도 어린 축에 속한다. 그런 그가 모두를 이끄는 대장 자리에 있는 것이다. 어쩌면 내색은 안 했어도, 이 일을 하며 제일 힘들었을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어린 상관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이.”
군터가 물러가고, 프레드릭은 포로들을 지키던 병사에게 다가갔다. 그는 프레드릭과 같은 십인장이었는데, 콧수염을 지저분하게 기른 것이 척 봐도 40대는 되어 보였다.
“어엉?”
“제대로 감시 안 하나? 덕분에 우리 대장님만 괜히 뺑이 치시잖아.”
“허 참!”
사내가 표정을 와락 구겼다.
“이 새끼가 근데 어디서…….”
“또 도망치는 새끼가 나오면 그 새끼를 죽이고, 방조한 죄를 물어서 그 새끼 가족도 찾아 죽이고, 친구 새끼들까지 찾아 죽일 거다. 그럼 한 수십은 죽겠네? 막시밀리언 대장님이 질책하시면 네 새끼가 일을 뭐같이 해서 열 받아 그랬다고 말씀드릴게. 알아들었냐? 앙?!”
“이 미친 새끼가 그걸 말이라고!”
프레드릭은 이제 웃는 낯을 버렸다. 그는 금방이라도 칼을 뽑아들 것 같이 험악한 얼굴로 사내에게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 기세가 사뭇 흉포하여 성질을 내려던 사내가 찔끔하여 뒷걸음질 쳤다.
“씨바, 서로 맡은 일을 잘 하자는 건데 혓바닥이 뭐 그리 길어 새끼야. 어떻게, 좀 짧게 잘라줄까? 응?”
프레드릭이 손을 들어 사내의 볼을 툭툭 쳤다. 모욕을 당하면서도 사내는 얼굴만 붉어졌을 뿐, 손을 쳐내거나 하지는 못했다.
“잘 좀 합시다. 잘 좀. 응? 서로 할 일만 똑바로 하면 모두가 행복하잖아? 안 그래요?”
“으음……!”
그가 마지막까지 손장난을 치다가 돌아서자 곧 그의 부하 한 명이 졸졸 걸어왔다. 꽤나 걱정스런 얼굴을 한 채로.
“왜 그러신 겁니까? 너무 나가셨습니다.”
“어차피 저 치들이랑 우리랑 더 나가고 말고 할 게 있냐? 어차피 우리는 이래도 욕먹고 저래도 욕먹어.”
“그건 그렇지만…….”
“야, 자식아. 우리 좀 대범해지자. 응? 막말로 지들이 열 받으면 뭐 어쩔 건데? 끽해야 지네 대장한테 쪼르르 달려가 가지고 저놈들이 이랬어요, 하고 질질 짜기나 하겠지.”
군터 기병대는 그래도 그들에게 제법 호의적인 이들에게는 아쿼러즈 기병대라고 불렸고, 별로 감정이 안 좋은 이들에게는 야만인 기병대라고 불렸다. 어느 것이든 정식 명칭은 아니고, 후자는 멸칭 그 자체였다. 물론 대놓고 그들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하는 이들이야 없지만, 직접 면전에서 말을 안 한다고 그런 것을 모르겠는가? 만약 대장인 군터가 막시밀리언의 총애를 받지 않았더라면 분명 대놓고 갖가지 핍박을 받아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바깥에서 쏟아지는 부정적인 시선들 덕분에 군터 기병대는 그들끼리 굳건히 결속할 수 있었다. 그들은 같은 천인대에 묶여 있다곤 하나 다른 부대들을 동료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 동료란 군터의 이름 아래 있는 이들이 전부였다.
“어차피 우리는 저놈들하고 하하호호 하기는 글렀어. 그럴 거면 차라리 좀 시원시원하게 나가는 게 좋아. 대장님도 전에 말씀하셨잖아? 다른 부대 놈들이 뭐같이 굴면 당하고만 있지 말고 들이받으라고.”
물론 이것은 프레드릭의 다분히 자의적인 해석이었으나, 당하고만 있지 말라 한 것은 사실이었다.
“야. 그건 그거고, 애들 좀 미리 대기 시켜서 튄 놈들 생기면 후딱 좀 움직이게 해라. 대장님은 일개미처럼 움직이는데 졸개들은 퍼질러져 있는 게, 이게 제대로 굴러가는 부대냐? 앙?!”
그러면서 부하의 정강이를 냅다 걷어차는 프레드릭. 부하가 다리를 부여잡고 낑낑 대며 항변했다.
“아니, 대장님이 먼저 가버리시는 걸 어떻게 합니까!”
“눈치라는 게 있잖아. 눈치라는 게! 자식이 근데 어디서 토를 달아?”
괜히 심통이 난 프레드릭이 이번에는 반대쪽 정강이를 걷어차 버렸다. 이번에는 부하도 참지 못해 끄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 * *
두 번의 ‘사냥’을 마치고 나서 막시밀리언 부대는 오테론으로 귀환했다. 오백에 불과한 명력으로 300명 남짓한 포로들을 끌고 다니려니 더 이상 전투 수행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솔직히 하루 정도는 쉴 줄 알았습니다.”
포로들을 인계한 후, 최소한의 보급을 마친 그들은 다시금 성을 나섰다. 병사들의 어깨는 축 늘어졌고 성을 나선 직후에는 너덧 걸음마다 한 숨을 쉬었다.
막시밀리언도 그런 병사들의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직접 나서서 병사들을 위무했다.
“지금 자잘하게 하루 이틀 정도 쉬어 무엇 하겠느냐! 진정으로 이번 일을 다 마치고 난 뒤에는 더 이상 쉬고 싶지 않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쉬게 해주마! 물론 쉬는 동안 넉넉히 즐길 수 있도록 섭섭지 않게 포상금도 챙겨줄 것을 약속하겠다!”
“와아아아!”
길지 않은 몇 마디 말의 효과는 아주 뛰어났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새끼 마냥 늘어져 힘없이 늘어져 있던 병사들이 다시 기운을 찾았다. 막시밀리언은 약속한 것은 단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었으므로, 병사들은 그가 약속한 포상을 코앞에 다가온 것처럼 여겼다.
“망할 야만인 새끼들을 싹 다 쓸어 담자고!”
“빨리빨리 해치우고 얼른 술독에 빠지고 싶구만.”
포상 약속으로 달아오른 기세에 힘입어 막시밀리언 부대는 처음 성을 나설 때보다 더 의욕적으로 움직였다. 그들은 성을 떠나고 사흘째 되던 날에 50명의 도망자 무리를 포획했으며, 엿새째 되는 날에는 무려 300명가량의 무리를 또 다시 포획했다.
“qebuioqwr!(무릎 꿇어라!)”
50명의 도망자 무리는 몰고 갈 필요도 없었다. 그냥 군터 기병대의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가서 포위한 것으로 끝이었다.
“어째 점점 더 쉬워지는 느낌입니다?”
프레드릭이 물었다. 그에 대한 답은 군터가 아니라 살라스에게서 나왔다.
“시일이 지났으니까요.”
“엉? 그게 무슨 소리냐?”
“초원에서부터 도망쳐 온 이들 아닙니까. 국경을 넘고 계속 남하하는데 지칠 만도 하지요. 몸이 지치면 마음도 느슨해지고, 그러다보면 자연히 허술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남쪽으로 내려오면 내려올수록 근방의 지리도 잘 모를 테니 아무래도 헤매게 되는 탓도 있겠구요.”
“크으! 역시 우리 막내가 머리 하나는 참 좋아. 어려서 그런가? 아랫도리만큼 머리도 싱싱해서 그런가?”
“자꾸 그런 말 좀 하지 마십시오! 대체 시정잡배도 아니고 무슨!”
“잡배 맞는데? 남의 집 넘어가서 사람 두들겨 패다가 감방 간 얘기 해줬잖아?”
“아니 그게 아니라…지금은 기병대의 십인장이시잖습니까! 그럼 그에 맞는 모습을……!”
살라스가 붉어진 얼굴로 침을 튀겨가며 이야기를 하던 차에, 조용히 있던 군터가 입을 떼었다.
“시끄럽다.”
여느 때보다 차가운 목소리에 살라스는 입을 뚝 다물었다. 프레드릭도 눈치를 보면서 슬슬 말을 천천히 걷게 하여 뒤로 빠졌다.
살라스가 자신의 옆까지 온 프레드릭에게 넌지시 물었다. 조금 전까지 얼굴 붉히며 싸우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었다.
“…왜 저러시는 겁니까? 기분이 영 안 좋아 보이시는데.”
“거, 얼마 전에 오테론에 들렀을 때 마님을 못 만나고 오셨거든.”
“아니 왜요? 그래도 잠깐 만날 시간 정도는 있었을 텐데.”
“막시밀리언님이 계속 데리고 다니셨잖아.”
“아…….”
그것으로 상황파악은 끝났다.
프레드릭과 살라스를 비롯한 모두는 이동하는 내내 군터의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