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혼 -->
서로에 대한 마음을 주고받은 것으로 족했다. 군터도 벨리사도 번잡스러운 것은 원치 않았다. 군터가 그녀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주었을 때, 그리고 벨리사가 눈물을 흘렸을 때부터 그들은 이미 부부였다.
별 일 아닌 것처럼 지나간 결혼의 순간 뒤에도 그들은 전과 다름없이 지냈다. 같이 식사를 하고, 같이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의 아침을 함께 맞이했다.
결혼 이후에 달라진 한 가지라고 한다면, 벨리사의 웃음이 전보다 더 늘었다는 것일까? 또, 그 웃음이 전보다 더 밝아진 것 같았다. 아무런 걱정이 없어 보인다고 할까. 군터는 그녀가 더 편해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녀는 이제야 마음속에 깊이 숨겨두었던 일말의 불안감을 마저 지우고 비로소 마음의 안정을 찾은 것일지도 모른다.
휴가로 주어진 사흘 동안 군터와 벨리사는 항시 함께했다. 군터는 벨리사를 위해 그녀와 함께 집 밖을 나서주었고, 벨리사는 그를 위해 노래를 해주었다. 그녀가 나직한 목소리로 읊조리듯 노래를 할 때면, 군터는 눈을 감고 그녀의 목소리에 깊이 몰입했다.
그렇게 사흘이 흐르고 마침내 오늘. 짧게만 느껴지는 휴가가 끝나는 날. 군터는 경무장을 하고 집을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여보. 잠시만요.”
결혼 후의 또 다른 변화 한 가지. 그것은 호칭의 변화였다. 이제 벨리사는 군터를 부를 때 꼭 ‘여보’라는 말을 썼다. 호칭이야 아무려면 어떻겠냐마는 벨리사는 여보라는 말이 꽤나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응?”
“이거…….”
벨리사가 방에서 무언가를 들고 나왔다. 윤기 나는 회색 털 뭉치 같은 것이었는데, 그녀가 양 손으로 그것을 펼치고서야 군터는 그게 목도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디서 난 거야?”
“직접 만들었어요.”
“당신이?”
벨리사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군터는 그녀에게서 목도리를 받아들었다.
목도리는 적당한 크기였다. 여우나 늑대의 털이 쓰인 것 같았는데 제법 부드러우면서도 따스했다. 안쪽 면을 들여다보면 조금은 조잡한 느낌이 났지만 벨리사가 직접 만든 것이라고 하니 그런 흠마저도 좋아 보였다.
“언제 이런 걸 다 만든 거야?”
“틈틈이…어차피 집에 있으면 특별히 할 일도 없으니까요. 정말…다 만들기 전까지 안 들키려고 얼마나 조심 했는지 몰라요.”
“…지금 내가 바로 나가봐야 한다는 게 너무 안타깝군.”
“킥! 빨리 가요. 늦겠다.”
“잘 쓸게. 고마워.”
군터는 벨리사의 이마에 진하게 입을 맞추고 집을 나섰다.
집 밖으로 나서자마자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지만 목 아래로는 조금도 스며들지 못했다. 마치 아직까지 집 안에 있는 것처럼 따스했다.
* * *
조금 전 파비우스 리에론이 보낸 전령이 오테론에 도착했다. 전령은 파비우스 리에론의 서신을 전했고, 그 서신은 지금 무알 카빌라이드의 손에 들려 있었다.
“이틀 후에 당도한다는군. 다만…문제가 있다.”
“문제라면?”
“파비우스 리에론은 오테론 성에서 움직이지 않겠다고 한다.”
“예?”
황당한 소리다. 싸우러 온 군대가 도시 안에 박혀있겠다니? 그럴 거면 대체 뭐 하러 온단 말인가? 바람도 불지 않는 살마드에서 편히 있을 일이지.
“정확히는, 오테론에 주둔하면서 도시의 방위를 담당하겠다는 말이네. 그러면서 요새로도 병력은 보내겠다고 하더군. 다만 야외의 토벌에는 나서지 않겠다는 뜻이야. 나름대로 그럴듯한 핑계는 있네. 오테론의 지리와 기후에 익숙하지 않은 자신의 군대가 토벌에 나서는 것은 비효율적이라는 것이지.”
각자에게 맞는 역할 분담을 하자는 말인데, 말은 좋다. 솔직히 얄밉기는 하지만 납득하고자 한다면 어떻게 납득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다만 이런 식으로 직접 대면하기도 전에, 전령을 통해 보낸 서찰로 통보하듯 하는 것은 문제가 있었다. 아무리 그가 사령관과 같은 3급 장군이라 해도 군문에 몸담은 세월로 따지면 이리 나올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어쨌든 무알 카빌라이드는 사령관이 아니던가.
“그 자의 오만방자함이 실로 괘씸하군요. 우리더러 토벌에 나서라 한다면 기쁜 마음으로 나서겠지만, 이런 식으로 부림을 당하는 것은 내키지 않습니다. 사령관! 당장 그 자에게 서신을 보내시지요. 건방진 소리를 하려거든 직접 얼굴을 맞댄 채 하라고 말입니다!”
한 마디 한 마디 씹어 뱉듯 하는 투스바이언의 얼굴이 붉었다. 굉장히 화가 나 있지만 자리가 자리인 만큼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막시밀리언. 자네 생각은 어떤가?”
무알 카빌라이드의 시선이 막시밀리언에게 향했다. 그는 지금까지 입을 꾹 다문 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 자의 태도가 너무 건방지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리에론 가문이 바크렌의 군부를 쥐락펴락 한다지만, 이건 너무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으음?”
뜻밖의 반응이었다. 무알 카빌라이드는 막시밀리언이 어떤 식으로든 리에론 가문에 연줄을 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심 막시밀리언이 파비우스 리에론을 옹호하지 않을까 짐작했던 것이다.
“투스바이언님의 말씀처럼, 이것은 경우가 아닙니다. 같은 3급 장군이라 해도 사령관께서는 한 도시의 방위를 책임지는 사령관이시고, 그 자는 직책 없는 일개 장군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군문에서는 수십 년 선배를 대하는 후배일진대, 이리 버릇없게 나와서는 아니 되지요.”
“허! 간만에 마음에 드는 소리를 다 하는군.”
투스바이언이 반색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막시밀리언은 그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가 경솔한 행태를 보인 것은 사실이나, 어쨌든 그의 원군은 필요합니다. 또한 그는 성주의 대리라고 할 수 있는 만큼, 어느 정도는 비위를 맞춰줄 필요가 있습니다.”
“기분이 좋지는 않지만, 일리 있는 말일세.”
“게다가 당면한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밀려오는 야만족들을 쓸어내기 위해서는 개의 앞발이라도 붙들어야 하는 판국입니다. 사감으로 일을 망칠 수는 없지요.”
“그렇지만! 단독으로 움직여 야만인 놈들을 상대한다면 우리만 피해를 보지 않겠는가!”
“어차피 지금 밀려오는 놈들은 전부 피난민들이 아닙니까? 마음먹고 준비한 채 들이닥쳐 식량이며 사람을 약탈해가던 놈들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 놈들을 상대로 오테론의 정병이 피해를 입겠습니까? 사냥은 사냥개가 해야 합니다. 제대로 짖지도 못하는 강아지들이야 집이나 지키라고 하는 게 옳지 않습니까?”
“으음……! 허나, 불합리한 것은 불합리한 것이야! 아니 말이야 바른 말이지, 고생은 우리가 다 하고 지 놈들은 과실만 챙겨 먹겠다는 심보가 아닌가 말이야!”
“파비우스 리에론이 그 정도까지 후안무치한 자라고 믿고 싶지는 않지만, 설령 그렇다한들 공을 다투는 것은 추후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아직 세우지도 않은 공을 두고 다투기보다는 저 앞까지 닥쳐온 무도한 야만인 놈들부터 처리해야지 않겠습니까. 당장 급한 것은 그것이니까요. 아니 그렇습니까?”
그 말에는 투스바이언도 반박할 길이 없었다. 그는 영 못마땅하다는 듯 콧김만 뿜어댔다.
“사령관. 상대가 작은 것을 탐할 때는 그냥 내어주는 것도 방법입니다. 작은 것은 가져가라 내어주시고 큰 것을 취하시지요.”
무알 카빌라이드는 눈을 감았다.
호인이라 불리는 그였지만 사내였고 군인이었다. 그것도 그냥 군인이 아니라 한 도시의 사령관까지 맡을 정도로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자였다. 드러내지 않을 뿐, 그 역시 자존심은 있었다. 그리고 파비우스 리에론의 서신은 그의 자존심에 금을 가게 만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이 시건방진 리에론의 장자와 한바탕 설전을 벌일 각오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시밀리언의 작은 것을 내어주고 큰 것을 취하라는 말이, 그가 어렵사리 세운 각오를 꺾었다. 그것은 어찌 보면 실체 없는 달래기에 불과했지만 훌륭한 도피처가 되어 주었다.
아무리 사령관의 자리에 있는 그라 해도 어찌 리에론이란 이름이 부담스럽지 않았겠는가. 다만 사령관으로서의 위신과 노회한 군인의, 사내의 자존심이 달린 문제였기에 반발심으로 오기를 부렸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 명분도 그럴듯한 도주로가 생겼다. 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 무례에 대해서는 넘어가도록 하지. 그가 도시를 지키겠다면 그리 하도록 내버려두겠다. 하지만 그런 만큼 야전의 공은 모두 우리의 것이 되겠지.”
그는 알까? 마지막에 뱉은 한 마디가 스스로를 변호하는 겁쟁이의 변명 같았다는 것을.
하지만 아무려면 어떠랴. 막시밀리언은 목적을 달성했다는 성취감과 일말의 안도감을 느끼며 죄송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 * *
파비우스 리에론이 이끄는 3천 살마드 군이 드디어 오테론에 당도했다.
화려한 환영 같은 것은 없었다. 병사들도, 시민들도 동원되지 않았으며(그렇지만 자발적으로 나온 시민들이 상당했다) 그저 성문을 활짝 열고 천인장 두 사람이 마중을 나간 것이 전부였다.
“흐흐. 늙은이가 유치한 짓을 하는군.”
파비우스 리에론은 늙은 사령관의 속내를 훤히 꿰뚫어 보았다.
“똥개도 자기 집 앞마당에서는 먹고 들어가는 법 아니겠습니까.”
“어허. 똥개라니? 제국을 위해 반평생 동안 찬바람을 맞으며 고생하신 분 아니겠느냐. 집 지키는 개 정도는 충분히 되고도 남지.”
“어이구!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용서하시지요.”
그는 부관과 시시껄렁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오테론의 성문을 넘었다.
“어서 오십시오. 파비우스 장군. 오테론의 천인대장 투스바이언입니다.”
미리 기다리고 있던 투스바이언과 막시밀리언이 그를 맞았다. 파비우스 리에론은 말 위에서 그들을 물끄러미 내려 보았다.
투스바이언의 얼굴이 좋지 않게 변하려던 찰나. 그가 입을 떼었다.
“반갑소. 사령관께서는 안에 계시오?”
“예.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왕 만날 거 일찍 만나면 좋을 것을. 많이 바쁘신 모양이오.”
“…….”
“아아! 그냥 해본 소리니 너무 마음 상해하지는 말구려. 아, 그쪽은?”
“오테론의 천인대장 막시밀리언이라 합니다.”
“막시밀리언이라…….”
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막시밀리언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는 그에게 모른 척 절도 있게 고개 숙였다.
“갑시다. 사령관을 너무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는 안 되니.”
“예. 안내하겠습니다.”
투스바이언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길을 열었다. 파비우스 리에론은 간간이 도시를 둘러보기도 하면서, 천천히 말을 몰아 그 뒤를 따랐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