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망자들 -->
잠에서 깨어난 뒤 몸 한쪽 편에 실린 무게감을 느끼는 것이 언젠가부터 큰 행복이 되었다. 향기로운 살내음이 코끝을 간질일 때면, 자신도 모르게 희미하게 웃게 된다.
하루의 시작을 이런 행복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축복이다. 그러므로 군터에게 있어 벨리사라는 여인은 축복 그 자체였다.
“우으응.”
“깼어?”
“…응.”
부스스한 얼굴인데도 아름답다. 프레드릭은 언제고 눈에 쓰인 콩깍지가 벗겨지는 날이 올 거라며 헛소리를 퍼부었지만(물론 그 직후에 응분의 대가를 치렀다) 군터는 설령 자신의 눈에 정말 그런 콩깍지 같은 것이 씌었다고 한들 영영 벗겨지지 않을 것 같았다.
“있죠.”
“음?”
부스스한 얼굴에 어울리는 부스스한 목소리다. 그는 그 자그마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몸을 가까이 가져다 대며 잘 듣고 있노라 그녀에게 확인시켜주었다.
“요즘 들어 자주 그런 생각해요.”
“무슨 생각.”
“당신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
“…….”
순간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들어버려서 뭐라 답해야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근데…내가 엄마가 될 수 있을까요?”
안 그래도 작은 목소리가 바닥을 기듯 내려갔다. 군터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물론. 당신은 훌륭한 엄마가 될 수 있을 거야.”
“정말?”
“빈 말은 안 해.”
“헤헤.”
활짝 웃은 벨리사가 품으로 들어왔다. 군터는 몸을 들어 그녀를 깊숙이 안아주었다.
“만약에 아이를 낳으면요. 당신은 아들이 좋아요, 딸이 좋아요?”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에이. 당신은 아들이 좋지 않아요? 남자들은 아들을 원한다던데.”
“아니. 정말이야. 난 아들도 좋고 딸도 좋아.”
“흐응.”
콧바람이 가슴팍을 간질였다. 동시에 그녀의 손이 슬그머니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입가에 띤 짓궂은 미소는 덤이다.
“아들이든 딸이든, 빨리 만나보려면 당신이 노력해야겠는데요?”
“난 언제든 상관없어. 항상 당신이 걱정이지.”
앙큼한 말장난에 군터는 가벼운 입맞춤으로 응수했다. 벨리사의 아름다운 얼굴에 더 아름다운 미소가 번졌다.
* * *
토벌 임무로 고생한 공로를 높이 사 사흘간의 휴가가 주어졌다. 그렇게 떠들썩하게 개선식까지 해줘놓고 고작 사흘이냐 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오테론의 상황이 녹록치 않다는 반증이었다. 사흘만 해도 사령관이 꽤나 신경을 써준 셈인 것이다.
그 사흘간의 휴가에서, 군터는 첫날의 아침을 술로 달래고 있었다.
“어제 밤까지 술을 마셨는데 말이지.”
“술집에 와서 술 말고 다른 걸 기대했나? 안 먹을 거면 내놓고.”
“안 먹는다는 말은 안 했다.”
와그너가 두툼한 손을 내밀자 파리 쫓듯 쳐내고 잔을 잡았다.
“그래. 아침부터 어쩐 일인가? 술이 고파서 온 것 같지는 않은데.”
“뭐, 여러모로 상담할 일도 있고 해서.”
와그너가 표정을 구겼다.
“난 술 파는 사람이지 상담해주는 사람이 아닌데. 특히 징글징글한 사내새끼의 상담은 더더욱 하기 싫어.”
“어차피 쓸모 있는 조언 따위는 기대도 안 한다. 그냥 앉아서 듣기나 해.”
“참 나. 부하 놈들은 별 도움이 안 되는 모양이지?”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흠. 좋아. 어디 한 번 씨부려 봐. 네 말대로 들어는 줄 테니.”
두어 번 입을 달싹이던 군터는 술부터 들이켰다. 아직 제대로 된 이야기는 시작도 안 했는데 이상하게 목이 탔다. 그만큼 그의 마음은 평소 같지 않았다.
“오늘 아침에 벨리사가 얘기를 했어.”
“무슨 얘기?”
“아이를 갖고 싶대.”
“크크크크! 그래서? 넌 뭐라고 했는데.”
“몰라. 뭐라고 했는지 기억이 안 나. 그냥 나도 모르는 소리들을 한 것 같아. 그녀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거든.”
“오오. 제법인데? 좋아. 그래서 그 다음은?”
“자기가 엄마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더군. 그래서 난 당신은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 거라고 했지. 솔직히 그때는 정말 어떻게든 그녀의 기분을 맞춰주려고 노력했지,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어.”
“많이 당황했었나 보구만.”
“맞아. 아이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해 보지 않았거든. 물론 언젠가는 나도 아버지가 되겠거니 하고 있었고, 아이들의 어미는 당연히 벨리사가 되리라 생각했지만…….”
“하지만 아직은 이르다 이거겠지?”
“이르다기보다는 갑작스러운 거지.”
“벨리사가 왜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꺼냈다고 생각해?”
“글쎄.”
왜일까 하고 생각해보면, 떠오르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이 무에 중요하겠는가.
“그나저나, 그런 이야기를 왜 나한테 와서 하고 있는 거야? 누구 놀리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와그너. 전직 백인대장으로서 현 나이 47세. 미혼이었으며 아이도 없었다. 그야말로 인생을 홀로 살아온 사나이.
그런 그에게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하면.
“말했지 않나. 달리 이런 말을 할 만 한 놈이 없다고.”
누구에게 가서 이런 이야기를 하겠는가.
프레드릭? 헛소리만 주구장창 늘어놓을 것이 뻔한 그놈에게는 주먹이나 안 나가면 다행이다.
살라스? 괜찮긴 하지만 너무 어리다. 어른의 사정을 이야기하기에는 아직 덜 여물었다.
나머지 부하들도 하나하나 떠올려 보면 모두 미덥지 않은 놈들뿐이다. 전장에서는 그럭저럭 쓸 만할지 몰라도 이런 주제에 대해서는 젬병인 것이다.
“슬프군.”
“…시비 거는 거냐?”
47살 중늙은이가 자기더러 한 말인 줄 알고 발끈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꼴이다.
“아니. 이런 진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없는 내 처지가 슬프단 거다.”
“끄응. 아니 뭐, 그래서 아이를 낳기 싫다는 거냐?”
“아니. 그런 건 아니다.”
“그럼 낳으면 될 거 아니야? 뭐가 문제야?”
“문제라…그런 건 없다만.”
“다만?”
“아직 난 벨리사와 제대로 결혼도 못했고, 번듯한 집도 아직…….”
“결혼은 꼭 해야 하는 건 아냐. 정 뭐하다면 오늘 당장 뭐라도 하나 사서 해버리면 될 거 아냐? 집이야 서두를 것도 없는 문제고. 막말로 지금 당장 벨리사의 뱃속에서 내일 모레쯤 애가 딱 태어나는 것도 아니잖아?”
“…….”
“대범한 척은 혼자 다하더니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졸장부가 따로 없구만. 뭐 그리 걱정이 많나? 너보다 훨씬 못한 놈팡이 놈들도 애새끼들 서넛씩 낳아놓고 잘만 살아. 그에 비하면 넌 배에 기름칠을 두 겹, 세 겹은 한 셈인데 뭐 그리 따지고 앉았어?”
“…말은 잘하는군. 47살 노총각 주제에.”
“뭐라! 이 자식, 그게 기껏 상담해 준 사람에 대한 태도냐? 앙?!”
술값을 테이블에 올려두고 몸을 일으켰다. 솔직히 별 기대는 안 하고 왔는데 47살 노총각의 상담이 의외로 많은 도움이 되었다.
“어디 가나?”
“선물 사러. 어디서 들은 말인데, 청혼을 할 때는 근사한 선물을 준비해아 한다더군.”
“엉?!”
와그너가 황당하다는 쳐다봤다. 군터는 이미 주점의 입구를 지나고 있었다.
“생각난 김에 바로 해야지 않겠나. 질질 끌 이유도 없으니까.”
“아니 그거야 뭐 그렇다마는…너무 과하게 화끈한데?”
“더 이상 졸장부가 되기는 싫으니까.”
와그너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벨리사가 느닷없이 아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 그녀의 불안과 외로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만약 그런 것이라면 그녀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한 그에게도 책임이 없다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오직 그만을 보고서 오테론까지 왔다. 벨리사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 한 명 뿐인 것이다.
생각해 보면 다른 여인에 대한 과할 정도의 경계심 역시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었겠는가.
‘마침 수중에 돈도 들어 왔겠다.’
어제 포상금도 두둑이 받았다. 노예들과는 별도로 지급된 돈이었다. 이 정도 돈이면 그럴듯한 선물 하나 정도는 살 수 있으리라.
‘그런 걸 파는 곳이…아마 저 쪽이었던가.’
가끔씩 벨리사와 함께 지나다녔던 기억이 났다. 기억의 흔적을 쫓으며 군터는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 * *
“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 오늘 무슨 일 보고 온다면서요?”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 왜? 뭐하던 중이었어?”
“아뇨. 딱히…….”
군터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벨리사는 어쩐지 당황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에 의아함을 느낀 군터였지만 일단 호기심은 접어두고 본래 목적부터 이루기로 했다.
“눈 감아봐.”
“왜요?”
“할 게 있어.”
“뭐에요 또? 이상한 변태 같은 짓 하려고 그러죠?”
다 안다는 듯 요염한 미소를 짓는 벨리사. 그에 군터는 목적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침대로나 갈까 싶었지만 그래도 대의를 위해 욕정을 꾹 억눌렀다.
“뭐…그럴지도.”
“으응. 눈 감기 싫은데.”
“당신을 위해서야. 난 당신이 눈을 감든 말든 어차피 할 거거든.”
“와…너무하네요. 진짜. 예전의 당신은 정말 자상하고 상냥했었는데.”
“더 거칠어지기 전에 빨리 눈 감어.”
“네에. 알았어요. 자.”
벨리사가 퉁명스레 눈을 감았다. 그러자 군터는 잽싸게 품에서 선물을 꺼내 들었다. 손톱만한 보석이 가운데 달린 은 목걸이였다. 그는 그것을 조심스레 풀어 벨리사의 목에 채워주었다.
“어…….”
금속의 감촉이 목에 닿자 그녀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모양이었다.
“끝났어. 이제 눈 떠도 괜찮아.”
“…….”
그녀는 눈을 뜨자마자 자신의 목부터 보았다. 그리고 목에 걸려 있는 아름다운 목걸이를 확인하자 잠깐 멍해 있나 싶더니 곧 눈시울을 붉혔다. 그녀의 눈은 금세 눈물로 그렁그렁해졌다.
“이미 조금 늦었지만, 더 늦기 전에 해야겠다 싶어서. 선물은 그냥 내가 당신한테 어울릴 것 같은 걸로 샀어. 마음에 안 들면…바꿔올 수도 있겠지만.”
“…마음에 들어요.”
목소리에 물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볼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안 한 채, 가슴 위까지 내려온 목걸이를 어루만졌다.
“당신이 내 아내가 되어주길 바래. 당신을 마음에 뒀던 때부터 당신이 아니면 안 될 거란 걸 알았지. 음…그러니까, 지금 난 청혼을 하는 거고 물론 당신은 거절할 수 없어. 알고 있겠지만 말이야.”
“거절할 리가 없잖아요. 내가…거절 할 리가…….”
벨리사는 그야말로 펑펑 울었다. 그녀의 머리 위에만 짙은 비구름이 깔려 있는 것처럼, 그녀는 쉬지 않고 눈물을 쏟아냈다. 군터는 아무런 말도 않고 그냥 그녀를 안아주었다. 가슴팍이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도 놓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가만히, 그녀의 훌쩍거림이 잦아들 때까지 계속 안고 있었다.
“이제 당신은 내 아내야.”
떨림이 잦아들었을 무렵. 군터는 입을 뗐다.
“난 항상 당신 곁에 있을 거야. 그러니 이제 아무 것도 무서워하지 마.”
“…훌쩍! 무, 무서워한 적 없는데요?”
“그래. 내가 잘못 알았던 모양이군.”
“…….”
벨리사가 자꾸만 품에 얼굴을 묻으려 했다. 이미 묻고 있어 더 파고들 수도 없는데 말이다. 군터는 자꾸 꼼지락대는 그녀를 더 세게 안았다. 그제야 그녀는 꿈틀거림을 멈췄다. 군터는 왠지, 그녀가 그제야 안정을 찾은 것 같다 느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쿠폰 주신 분께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