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46화 (46/1,064)

<-- 도망자들 -->

“간혹 부족 간의 전쟁으로 도망자들이 국경을 넘은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한꺼번에 대규모로 쏟아진 적은 없었다. 유례가 없는 일이야. 대체 초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전쟁이 벌어지고 있소. 그것도 당신의 말처럼 유례가 없을 만큼 잔혹한 전쟁이.”

“흠. 어디 대부족끼리 붙기라도 한 건가?”

“아니오. 그랬다면 이런 혼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외다.”

“그렇다면?”

“그야말로 초원 전역이 전란에 휩싸였다 봐도 과언이 아니오. 크고 작은 부족들이 서로 맞붙어 싸우고 있소. 큰 부족이 작은 부족을 치고, 또 다른 큰 부족이 그 뒤를 치는 식이지.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요. 초원에는 갈 곳 잃은 난민들이 넘치고, 하루에도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소. 우리 부족…역시 그 끔찍한 전란에 휩쓸려버렸지.”

“원인 없는 결과는 없는 법이다.”

“있다 해도 나는 모르오.”

“…….”

막시밀리언은 장로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동시에 다시 손가락이 팔걸이를 툭툭 때렸다.

“좋아. 그건 넘어가지. 그럼 다음은…….”

막시밀리언은 여러 가지를 물었다. 현재 초원의 정세며, 그들은 어떤 부족이었으며, 부족장은 어떻게 죽었는지, 등등 중요해 보이는 것부터 정말 사소하고 쓸데없어 보이는 것까지 모두 물었다. 그것도 어떤 것은 두 번, 세 번씩 묻기도 했다. 물론 장로는 그 모든 것에 순순히 답했다.

군터는 그 모든 심문과정을 처음부터 지켜보았으나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는 것들이 상당히 많았다. 참 신기한 일이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분명 같은 것을 보고, 듣고 있는데 생각하는 것은 이리도 다르니 말이다.

“후우.”

생각보다 길어진 심문이 마침내 끝났다. 막시밀리언은 장로를 돌려보내고 후련한 표정으로 한숨 쉬었다.

군터는 그의 뒤에서 살짝 머뭇거리고 있었는데, 막시밀리언이 그것을 알아채고 물었다.

“무슨 일인가? 할 말이 있으면 하게.”

“송구합니다. 그것이…….”

군터는 의구심을 가졌던 것들에 대해서 물었다. 쓸데없어 뵈는 질문들을 굳이 그리 많이 한 것하며, 비슷하거나 결국 같아 보이는 질문을 몇 번씩이나 반복한 것 등.

“진실을 듣기 위해서지.”

“예?”

“사람은 말이 많아지면 실수를 하게 된다네. 만약 그 늙은이가 내게 뭔가를 숨겼거나, 혹은 일부러 달리 말한 것이 있을 수 있지 않겠나? 그러니 최대한 많은 것을 묻고, 또 중간 중간에 했던 질문을 몇 번씩 반복한 것이지. 만약 그 속에서 하나라도 어긋남이 있다면 난 그 늙은이가 무슨 말을 하든 믿지 않았을 거네.”

“하면?”

“뭐, 일단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더군. 물론 다른 포로들도 심문하고 얻은 정보와 교차검증을 해봐야 하겠지만.”

“으음.”

생각지 못한 이유였다. 하지만 조금만 머리를 써보았다면 쉽게 떠올릴 수 있었을 것 같은 부분이기도 했다.

‘왜 나는 저런 것을 생각지 못하고 그저 이상하다고만 여겼는가.’

약간의 자책감과 의구심을 느끼고 있던 찰나. 막시밀리언의 목소리가 상념을 깼다.

“좋군. 아주 좋아.”

“예?”

“자네 말이야. 점점 더 나아지고 있지 않은가. 묻는다는 것은 궁금하기 때문이고, 궁금해 하는 것은 알려 하기 때문이야. 계속 궁금해 하여 묻다보면 결국에는 아는 것이 많아지지 않겠나? 자네는 용맹하지만 지혜롭지는 못했지. 그런 자네가 스스로 부족한 부분을 찾아 보완하려 하니 어찌 좋지 않겠는가.”

그리고는 기쁜 얼굴로 일어나 군터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막시밀리언은 진정 기쁘다는 듯 환히 웃었다.

“유능한 수하를 둔다는 것은 윗사람으로서 더 없이 기쁜 일이지. 내 살마드에서 자네를 내 밑에 둔 것이 정말 큰 행운이었다는 것을 매번 느끼고 있다네.”

“…부끄럽습니다.”

“참! 이번에 잡은 포로들 중에 마음에 드는 게 있다면 한 서너 명쯤 원하는 대로 가져가게. 이번에 공을 크게 세웠으니까 말일세.”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아니지. 그게 아니야. 자고로 고된 싸움 뒤에는 마땅히 상을 내려 노고를 달래야 하는 법이야. 사양치 말게나. 자네를 위해서도 그렇고, 아랫사람들을 위해서도 이런 것은 사양하지 않는 것이 맞네. 자네가 받지 않는다고 해버리면 아랫것들도 다 눈치가 보일 것이 아닌가?”

이렇게까지 말을 하니 더 사양할 수가 없었다. 군터는 심문을 하던 곳에서 돌아오는 길에 포로들이 모여 있는 곳에 들렀다.

‘어떻게 해야 할까.’

잘 팔릴 것 같은 노예들 몇을 골라서 그대로 노예 상인에게 팔아도 되고, 직접 쓸 노예들을 구해도 된다. 하지만 여자 노예를 고르자니 벨리사가 신경 쓰였고 남자 노예를 고르자니 집에 남자를 들이는 것은 절대 안 될 일이라 병영에서 밖에 쓸 수 없었다.

‘아니지. 만약 할렌을 빼온다면 그 빈자리에 채울 노예가 필요하긴 하군.’

사실 할렌은 군 소속 노예가 아니라 군터의 개인 소유였으므로 언제든 빼와도 문제는 없었다. 다만 군터가 자신의 병사들이 조금 더 편히 생활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었을 뿐.

‘음.’

잠깐의 고민 끝에 그는 다소 왜소해 보이는 사내 하나와 할렌보다 조금 어려보이는 소년, 소녀를 택했다.

포로들을 지키고 있던 백인장은 이미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지 말을 하자마자 병사들을 시켜 군터가 고른 포로들을 따로 빼내주었다.

“여전히 용맹스럽더군. 감탄했네.”

“부끄럽소.”

포로들을 지키고 있던 이를 포함해 그를 본 동료 백인대장들이 다가와 한 마디씩 했다. 군터는 짤막하게나마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부하들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 * *

하루 동안 포로들을 심문하고, 지친 병사들에게 휴식을 주고난 후에 군대는 오테론으로 복귀했다.

닷새가 걸려 오테론에 돌아왔을 때, 오테론의 성문은 활짝 열려 있었으며 시민들은 대로변으로 몰려 나와 있었다.

“개선식이라니. 오테론에서는 처음 아닙니까?”

“…….”

군터는 말문을 닫고 묵묵히 말을 몰았다.

“와아아아!”

시민들은 열렬히 환호했다. 특히 군대의 뒤에 포박되어 따라오는 초원인들을 보자 목소리가 한 층 더 커졌다. 그들은 포로들을 향해 야유하고, 일부는 돌까지 던져댔다. 물론 돌을 던지던 이들은 금방 병사들에 의해 제지 되었다.

“군터!”

묵묵히 길을 가던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훽 하고 고개를 돌린 군터는 인파 틈에 끼여 있는 벨리사를 발견했다. 그는 즉시 대열을 이탈하여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

“여긴 어쩐 일이야?”

“당신을 보려고 왔죠!”

“이런…….”

환히 웃으며, 군터는 그녀를 번쩍 들어 앞에 앉혔다. 그러고 대열로 돌아가자 프레드릭이 장난스레 야유를 보냈다.

“와! 이제는 하다하다 개선하면서까지 그러십니까! 혼자인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냔 말입니다!”

“당장 입 닫지 않으면 영원히 닫을 수 없게 만들어주겠다.”

“넵.”

단 한 마디로 투덜이의 입을 틀어막고서, 군터는 그녀를 돌려 앉혔다. 마주보는 자세가 된 두 사람은 가타부타 말없이 입을 맞췄다.

“와아아!”

“화끈하잖아!”

“휘익!”

말 위에서 벌어지는 농밀한 입맞춤에 시민들이 뜨거운 환호성을 보냈다. 뭔 일인가 싶어 뒤를 돌아본 병사나 지휘관들도 휘파람을 불며 그 대열에 동참했다.

“거, 너무 뜨거운 거 아닙니까!”

“왜! 보기 좋구만! 와하핫!”

남들이 뭐라고 시끄럽게 떠들어대건 말건, 군터와 벨리사는 서로에게 집중했다. 그나마 이성을 완전히 놓지는 않아서 탐하는 것이 입술에서 끝난 것이 다행이었다. 긴 입맞춤을 끝내고, 그들은 이번엔 힘껏 서로를 끌어안았다. 쇠붙이로 된 갑옷이라 손이나 팔이 아플 법도 한데 벨리사는 이걸 놓치면 영원히 헤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거세게 붙들었다.

“걱정 했어요. 무슨 일 생기는 건 아닐까봐…….”

“별 일 없을 거라고 했잖아. 내 말을 믿지 못했군.”

“믿었죠. 믿었는데, 자꾸 도시 분위기도 시끄럽고 하니까 혹시나 해서…….”

“다음부터는 이러지 마.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

“알겠어요. 다음부터는 꼭 집 안에 있을게요.”

“아마 조금 길어질 것 같아. 먼저 집에 가서 기다리고 있어. 살라스!”

“예!”

“벨리사를 데려다주고 와라.”

“그럴 필요 없는데…….”

“내가 안심이 안 돼서 그래. 살라스. 부탁하마.”

“옛.”

명을 받은 살라스가 즉시 말 한 필을 가져왔다. 벨리사도 이제 말에 앉아 있는 정도는 할 수 있었기에, 벨리사가 말에 오르자 살라스가 천천히 길을 열었다.

“아주 지극정성이시구만요.”

“정말 평생 입 벌리고 살고 싶은가?”

“엇! 마님이 가셨으니까 그 말씀은 이제 무효 아니었습니까?”

“그럴 리가. 여전히 유효하다.”

“넵.”

투덜이가 다시 입을 닫았다.

* * *

사실 이번 개선식은 뭐랄까, 굉장히 새삼스러운 것이었다. 대단한 임무를 성공시킨 것도 아니고, 그저 토벌을 나가 완수하고 왔을 뿐이니까.

그럼에도 이처럼 요란하게 개선식을 연 것은, 그만큼 오테론의 분위기가 여러모로 뒤숭숭한 탓이었다. 이런 공기를 환기시키고 시민들의 불안을 해소시키기 위해서는 역시 유치하더라도 눈에 보이는 무언가가 필요한 법. 그렇기 때문에 막시밀리언의 개선은 한 것에 비해 성대하게 치러졌다.

“수고했네. 막시밀리언.”

인자한 인상의 중년인이 치하의 말을 건넸다. 막시밀리언은 그의 앞에 몸을 낮춘 채 고개 숙이고 있었다.

“아닙니다. 별 것 아닌 일로 이렇게 얼굴을 팔게 되니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흥! 간만에 옳은 말을 하는군. 그나저나 바리바리 끌고 온 포로들은 다 뭔가? 무도한 야만인들 따위, 모조리 참하여 수급만 들고 오면 족하거늘.”

우락부락한 인상의 민머리 사내가 걸걸한 목소리로 투덜댔다. 그러자 인자한 인상의 중년인이 미간을 좁혔다.

“어허! 투스바이언! 쓸 데 없는 말은 삼가도록 하게. 이 자리는 공을 세운 이를 치하하려 함이지, 나무라는 자리가 아닐세.”

“끄응! 송구합니다.”

민머리 사내, 투스바이언이 못마땅한 기색을 풍기면서도 살짝 고개 숙였다.

“자네가 이해하게나. 요즘 아무래도 여러모로 분위기가 좋지 않다 보니 투스바이언도 마음이 불편했던 것이네. 야만인 놈들이 밑도 끝도 없이 밀려오고 있거든.”

“그 정도입니까?”

“대충 헤아려도 물경 1만에 달하는 수가 남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네. 수십 개 부족에서 발생한 피난민들이야. 일단 그라니스가 나가 있지만 영 손이 부족한 형편이지. 살마드에도 지원군을 청했고 답신까지 받았네. 3천을 보내준다더군. 그 정도면 일단 급한 불은 끌 수 있지 않겠나?”

“이해가 안 가는군요. 아국이 손을 놓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 정도라면 차라리 복속당하더라도 초원에 머물러 있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만만한 게지!”

투스바이언이 다시 언성을 높였다.

“초원에서 잡히나 아국에서 잡히나 똑같은 노예지만, 그 취급은 하늘과 땅 차이 아니겠나! 설령 노예로 굴러도 아국에서 구르는 쪽이 더 등 따시고 배부르다는 것을 아는 게지! 자네가 끌고 온 야만인 놈들도 다 그런 생각일 걸세!”

“흐음.”

“모조리 목을 베어야 해! 장대에 놈들의 목을 줄줄이 꽂아서 국경에 일정 간격마다 세워놓는 거네! 그렇게 아국의 단호한 의지를 보인다면 감히 제깟 놈들이 남쪽으로 건너올 생각을 하겠는가?”

막시밀리언을 보면서 열변을 토하던 투스바이언이 이번에는 상석에 있는 중년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사령관! 이는 제 사사로운 감정을 빌어 뱉는 말이 아니옵니다! 아국이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물렁한 태도를 보인다면 놈들도 점점 겁을 상실할 것입니다. 한 번 쯤은 따끔한 맛을 봐야 정신을 차릴 놈들이란 말입니다!”

“그 이야기는 이쯤 하세. 말했듯, 이 자리는 막시밀리언의 공을 치하하기 위한 자리이니.”

인자한 인상의 중년인. 오테론의 사령관 무알 카빌라이드가 골치 아프다는 듯 이마를 쓸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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