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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45화 (45/1,064)

<-- 도망자들 -->

“몰아넣어라!”

말을 잃은 초원민족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나마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무기를 들고 저항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열을 맞춰 밀고 들어오는 군대 앞에서 산발적인 저항은 무의미했다. 창에 찔리고 칼에 베이며 군홧발에 짓밟혔다. 그렇게 수십 명이 죽어나가자 더 이상 덤벼드는 이도 없었다.

“으으…….”

“bilatraga! weparektunbade!(푸른 독수리여! 우리를 구해주소서!)”

몇몇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해 외쳤다. 울먹이는 자들도 있었고, 망연자실하여 멍하니 서 있는 이들도 많았다. 물론 끝까지 무기를 쥐고 이를 가는 자들 역시 꽤 있었다.

“wqvberiuv! gjfldkvmekahrehdkvmrh!(포기해라!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는 자는 죽이지 않겠다!)”

말을 탄 막시밀리언이 유창한 초원어로 소리쳤다. 그러자 초원인들은 더 큰 혼란에 빠졌다. 설마하니 제국 지휘관의 입에서 초원어를 듣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탓이다.

“quwrvbivwerewrub?!(당신의 말을 어찌 믿을 수 있겠나?!)”

“wbroiqoeub! ewburwqerb, wuberuiwb!(그건 너희 스스로 결정하라! 내 말을 믿던지, 믿지 않고 죽던지!)”

웅성거림이 더 커졌다. 초원인들은 저들끼리 언성을 높였다. 항복하자는 쪽과, 끝까지 싸우자는 두 쪽으로 갈렸다. 특히 덩치가 큰 한 사내가 언성을 높이고 있었는데, 그는 거칠게 치뜬 눈으로 주변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가 주전파(主戰派)라는 것은 증오와 전의가 철철넘치는 그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퍽!

그때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 한 대가 그의 머리통을 꿰뚫었다. 미동도 없이 딱딱하게 굳어 쓰러지는 그의 모습은 상당히 비현실적이었다.

“허어.”

막시밀리언이 깜짝 놀라 화살이 날아온 곳을 보았다. 그곳에는 일단의 기마가 있었으며, 그 선두에는 활을 든 군터가 있었다.

“qwebriuqweiu! aurvwei!(싸우길 원하는 자들은! 모두 내 앞에 나서라!)”

군터가 사납게 일갈했다. 그의 우렁찬 목소리가 초원인들 사이에 일던 소란을 일거에 묻어버렸다. 실로 굉음에 가까운 고함이었다. 옆에 있던 그의 부하들이 고통스런 표정을 지으며 귀를 틀어막을 정도였다.

“아이고. 대장님. 제발 미리 귀띔 정도는 해주시라니까요.”

프레드릭이 투덜댔다.

본의 아니게 부하들에게 미안한 일을 해버린 군터였지만, 어쨌거나 한껏 내지른 고함의 효과는 확실했다.

그때까지 망설이던 초원인들이 모두 무기를 내려놓은 것이다. 그에 막시밀리언이 병사들을 시켜 그들을 모두 포박하게 했다.

그렇게 야밤의 고요를 깼던 짧은 전투는 끝이 났다.

*

포로들은 즉시 장정들, 노인, 여인, 아이로 분류되었다.

“방심하지 마라. 야만인 계집들은 입 속에 칼을 숨기기도 한다더군.”

“옛!”

프레드릭은 병사들이 포로들을 옮기는 모습을 보고 있다가 옆의 부하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의 부하는 당연하지만 아쿼러즈였다.

“저거 정말이냐? 입에 칼을 숨긴다는 거?”

“그럴 리가요. 저런 말을 믿으십니까? 안에 칼을 넣어놓으면 입이 금방 피투성이가 되게요?”

물론 정말 궁금해서 물은 건 아니었다. 단지 심심했을 뿐이다. 포로 분류 작업이라도 하는 병사들과는 달리 군터 기병대에겐 휴식이 주어졌다. 전투의 흥분이 아직 남아 가슴은 뛰는 마당에 하릴없이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있으려니 좀이 쑤실 밖에.

“대장님을 따라갈 걸 그랬나?”

“왜 안 따라가셨습니까?”

“쉬는 게 편할 줄 알았지. 노예들 중에 반반한 것들이 있으면 미리 침이라도 발라두려고 했고.”

포로로 잡힌 초원인들은 거의 대부분 노예가 될 것이다. 그리고 막시밀리언은 병사들에게 후대하기로 유명하니 잘하면 십인장급들은 노예 한 두 명 정도 하사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포로 중에 예쁜 계집이라도 있다면 미리 봐두겠다는, 그런 얄팍한 계산이었다.

그래. 그랬던 것이다. 그런데.

“죄다 못난이잖아……. 야. 초원인들은 우리랑 미적 기준이 다르냐?”

프레드릭을 비롯해서 군터 기병대의 모든 병사들은 절대로 초원인을 야만인이라 부르지 않았다. 애당초 그들의 대장이 아쿼러즈인데다 절대 다수가 또한 아쿼러즈였으니 초원인더러 야만인이라 하는 것은 제 발에 침 뱉기였다. 그리고 프레드릭을 비롯한 몇몇 제국 출신들은 그런 다수의 병사들을 위해서라도 야만인이란 말은 쓰지 않았다.

“아무래도 좀 다르죠? 제국 사람들은 여리여리한 여자를 좋아하지만 초원인들은 튼튼한 여자를 좋아합니다. 그래야 말을 타고 오래 이동할 수 있고 애도 잘 낳을 수 있으니까요.”

“흐음. 그럼 쟤네도 초원 기준으로는 미인이란 소리냐? 저건 아무리 봐도 튼튼이 아니라 우락부락인데?”

“글쎄요. 뭐…제 눈에도 좀 많이 튼튼해 보이기는 합니다.”

“하아. 역시 대장님 따라가는 게 더 나았을라나.”

“그쪽도 심문하는 거 말고 뭐 없잖습니까.”

“그래도 그런 게 있어. 그 왜, 높으신 분들이 하는 이야기를 가까운 데서 듣고 있으면 말이지. 내가 높은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 그게 굉장히 기분이 좋다니까.”

“에…그건 좀 그런데요.”

“뭐가?”

“보통 그런 거 좋아하는 인간들치고 간사하지 않은 놈이 없…….”

따악!

시건방진 부하의 머리통에 불이 났다. 솔직함이라는 것은 미덕이지만 그것을 드러내려면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한다. 어리석은 부하는 뒤통수를 희생함으로써 오늘 그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지금 가서 슬쩍 끼어드는 건 무리겠지?”

프레드릭은 아쉬움을 느끼면서 얼얼한 주먹을 호호 불었다. 그리고 군터가 있는 방향을 보았다. 아마 지금쯤 심문이 한창 진행중일 테지.

*

노인은 자신의 신분을 장로라고 밝혔다. 그는 제국어를 할 줄 알았는데, 컬젠의 촌장이 말했던 제국어를 할 줄 아는 야만인이 바로 그인 모양이었다.

“놀랍군. 제국어를 할 줄 아는 초원인이라니.”

“나 역시 초원어를 할 줄 아는 제국인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소. 도망자…그러니까 아쿼러즈들 말고 순수한 제국인 말이오.”

막시밀리언은 장로를 포박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존중하고 대우한다는 의미였다. 또한 그와 대화할 때는 야만인이라는 단어도 쓰지 않았다. 대신 막시밀리언은 장로를 낮은 곳에 앉게 하고 자신은 의자에 앉음으로써 서로의 위치 차이를 확고히 했다. 그리고 군터를 옆에 세워둠으로써 혹시 모를 사태에도 대비했다.

“족장은 죽었나?”

“그렇소.”

“묻고 싶은 것이 많아. 천천히 이야기하도록 하지. 물론 중간에 우리의 대화가 막히는 부분은 없도록 했으면 좋겠군.”

이 말인즉슨 묻는 말에 숨김없이 다 대답하라는 뜻이다. 장로는 속뜻을 파악하고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한 가지 확인부터 하겠다. 지도를 갖고 있지?”

장로의 눈이 커졌다.

“그걸 어떻게…….”

“대화가 막히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어. 아! 한 가지 더 추가하지. 늘어지지도 않았으면 좋겠군.”

“…그렇소.”

“어디서 구했지? 암상(暗商)인가?”

“그, 그 역시 맞소.”

장로는 이제 다소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속속들이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듯.

“역시 그랬나. 그 버러지 같은 것들이……. 하여간 정말 돈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는군. 망할 자식들.”

암상.

법으로 금지된 온갖 행위를 밥 먹듯 하는 상인들이다. 허가 받지 않고 국경을 넘어 다니는 것은 예사이고, 심지어는 반역 행위에 준하는 짓거리들도 서슴지 않는다. 말 그대로 돈만 된다면 뭐든지 하는 이들인 것이다.

군터도 암상에 대해서는 얼핏 들어 그런 자들이 있다 정도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야기를 들으니 황당함을 금할 수 없었다. 이건 듣던 것 이상이지 않은가.

‘지도를 넘겨?’

지도는 군사기밀에 속한다. 군사기밀을 함부로 유출하는 것은 빼도 박도 못하는 반역 행위다. 걸린다면 자기 목숨 하나 날아가는 것은 물론이고 부부, 자식은 기본에 친척, 지인들까지 몽땅 잡혀 들어갈 수 있는 대죄인 것이다. 아무리 돈이 좋다지만 그런 미친 짓거리를 했다고?

“뭐, 좋아. 그놈들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듣도록 하지. 시간은 많으니까.”

“그 전에…나도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겠소?”

“편하게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그쪽의 처지를 망각한 것 같군.”

“아니. 결코 그런 것은 아니오. 다만 이 늙은 몸의 개인적인 궁금증이외다.”

막시밀리언이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두드렸다.

“좋아. 그대의 적극적인 협조를 기대하며 내 선심 한 번 쓰지. 물어보게나.”

“우리가 이곳을 지날 줄 어떻게 안 것이오?”

“간단하군. 어차피 초원의 추격을 피해 제국의 땅으로 들어섰다면 외진 산 같은 곳에 숨을 거라 생각했다. 문제는 거기까지 어떻게 가느냐인데…너희는 너무 정직하게 움직이더군. 목표지점을 딱 정해놓고 가장 빠른 길로 움직이더란 말이지.”

“그거야 당연한 일 아니오?”

“그래. 당연한 일이다. 단, 그게 당연하려면 거기까지 가는 길을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겠지.”

“음!”

장로의 얼굴이 굳었다. 그제야 막시밀리언의 말뜻을 알아차린 것이다.

“너희의 이동경로를 훑어보면서 너희가 길을 알고 있다고 확신했다. 지도를 가지고 있거나, 최소한 길을 아는 자가 너희 무리에 있을 거라 생각했지.”

“그래서 처음에 지도를 갖고 있느냐고 물은 것이구려.”

“그대가 궁금해 했던 것처럼, 나 역시 궁금했던 것뿐이다.”

“하지만 그렇다한들, 어찌 이리 빠르게…….”

“식량은 지고 갈 수 있지만, 물은 그렇지 않지. 양에 비해 무거워서 싣고 가는 데도 한계가 있고, 설령 싣고 간다한들 이런 건조한 날씨에서는 금방 말라버리지. 당연히 강, 혹은 샘을 경유해가지 않겠나. 특히 길을 알고 있다면 말이지.”

“…….”

장로는 허탈하게 웃고는 눈을 감았다.

“그럼 이제 다시 시작하지.”

“아는 것을 모두 답한다면, 우리를 어찌 하시겠소?”

장로는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듯 초연해 보였다. 반면 막시밀리언의 얼굴에는 자그맣게 균열이 일었다.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고분고분하게 아는 것을 털어놓는 것 하나와, 피할 수 있는 고통을 굳이 겪고서 털어놓는 것 하나. 난 어느 쪽을 택해도 좋다. 어차피 밤은 기니까.”

군터는 이리 사납게 구는 막시밀리언은 처음 보았다. 때문에 조금 낯선 모습이었으나, 이상하지는 않았다.

막시밀리언은 상인의 아들이고, 사람을 대할 때도 상인의 방식으로 대했다. 상인이 예의를 차리는 것은 거래 상대에게 뿐이다. 거래 상대가 아닌 먹잇감에게는 짐승보다 더 잔혹해지고, 그 어떤 사기꾼보다 더 교활해질 수 있는 것이 바로 상인이었다.

협상과 협박. 그것을 자유자재로, 시기적절하게 쓸 수 있다면 그 자는 괜찮은 상인이라 할 만하다. 그런 의미에서, 막시밀리언은 군인이었지만 괜찮은 상인이라 할 수 있었다.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하겠소. 부디 승자의 자비를 베풀어주시구려.”

“글쎄. 그건 그대가 얼마나 성실히 협조해주느냐에 달려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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