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44화 (44/1,064)

<-- 도망자들 -->

“군터.”

“예.”

“난 말일세, 이 야만인 놈들이 이전의 약탈자 놈들과는 전혀 다른 놈들이란 생각이 드네. 뭐랄까 이놈들은 약탈자라기보다는…….”

막시밀리언이 다시 턱을 쓸었다. 마땅한 명칭을 떠올리고 있는 듯했다.

“그래. 약탈자라기보다는 도망자에 가까운 것 같군. 거 왜 피란민 같은 거 말이지. 자네 생각은 어떤가?”

“저 역시 그리 생각합니다.”

“좋아. 우리의 생각이 일치하는군. 그럼 다시 생각해보지. 촌장은 놈들이 남쪽으로 갔다고 했어. 다른 마을 사람들도 다 그리 말하더군. 아마 초원으로부터 멀어지려는 생각이었을 것이고, 오테론의 추격을 떨칠 생각도 있었겠지.”

이쯤 되었을 때, 막시밀리언은 군터에게 말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끊임없이 혼자 중얼거렸다.

“아이와 여인이 있었다는 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야만인 놈들은 여자나 애나 다 말을 잘 타니까. 중요한 것은 놈들에게 말이 그리 많지 않았다는 거다. 3분지 2가 말을 타고 있지 않았다 했으니 이동 속도는 느릴 수밖에 없고 고작 우리보다 사흘이 앞섰을 뿐. 그렇다면 놈들이 갈 수 있는 곳은…….”

군터는 혼자 묻고 혼자 답하는 그를 가만히 서서 지켜보았다. 이런 모습도 이제는 익숙했다. 그는 머리 좋은 사람들은 종종 이해 못할 행동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막시밀리언도 그런 머리 좋은 사람 중 하나였으니, 혼잣말 정도야 양호한 편이다.

“지도를 가져와라!”

“옛!”

명을 받은 부관이 지도를 가져왔다. 막시밀리언은 그것을 땅에 펼치게 했다.

“…….”

막시밀리언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지도를 보았다. 한동안 지도에서 눈을 떼지 않던 그가 손으로 한 곳을 짚었다.

“여기다.”

*

행렬은 길었다.

족히 4, 500은 되는 인원은 뱀처럼 길게 늘어져서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말을 탄 이들이 바깥쪽을 지켰고 안쪽에는 짐을 짊어진 이들과 어린아이, 여인들이 있었다.

선두에 있던 한 사내가 말을 타고 달려와 중앙에서 걷고 있던 한 노인에게 말했다.

“장로님. 이동이 점점 더뎌지고 있습니다. 많이들 지쳤습니다.”

노인은 뒤를 돌아봤다. 그 역시 땀으로 범벅이 된 상태였지만 그를 따라오는 여인과 아이들의 상태는 더 좋지 않았다. 사내의 말마따나 많이들 지친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지. 오늘은 이쯤에서 쉬도록 하세.”

“예.”

사내가 선두를 향해 신호를 보냈다. 무리의 이동이 느려졌다. 그들은 잠시 후 적당히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짐을 풀었다.

“장로님. 이 정도면 칸자굴 놈들의 추격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작은 모닥불 앞. 장로라 불린 노인을 중심으로 몇몇 사내들이 둘러앉았다. 사내들은 모두 노인을 보고 이야기 했다. 노인이 이 무리의 지도자임을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렇겠지.”

“또 우리가 그 마을 녀석들에게 그리 크게 피해를 준 것도 없으니 제국 놈들도 이를 악 물고 추격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건 너무 순진한 생각이네. 제국의 논리는 초원의 것과 달라. 그들은 절대 쉽게 추격을 포기하지 않을 걸세.”

“허면 언제까지 이리 거품을 물고 도망쳐야 하는 겁니까? 장로님께서도 보셨겠지만 이제 거의 한계입니다. 여자와 아이들은 더 이상 빠르게 걸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러다가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추격대가 우릴 잡기 전에 우리가 먼저 지쳐서 쓰러질 겁니다.”

“…….”

노인이 한숨을 쉬었다.

그라고 왜 이쯤에서 숨을 고르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위험이 다가올 확률이 천에 하나, 만에 하나만 있어도 무리를 이끄는 그는 그것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번의 그릇된 판단이 곧 그들 전체에게 크나큰 비극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정말 제국군이 추격을 포기했을까? 확실히, 어쩌면 내가 너무 두려움에 휩싸여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노인은 갈등했다. 하지만 자신에게 결정을 촉구하는 눈들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더 이상 움직이는 게 무리라는 데 동의하네. 내일까지는 이곳에서 쉬도록 하세.”

“알겠습니다.”

사내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들은 곧 마을 사람들에게 소식을 알리러 갔다. 홀로 남은 노인은 타들어가는 장작을 보며 걱정스런 한숨을 삼켰다.

*

“불을 피운 흔적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머물렀다 간 것이 확실합니다. 대략 이틀 정도 된 것 같습니다.”

병사의 말에 군터는 혀를 내둘렀다. 모든 것이 막시밀리언의 예측대로였다.

“이틀이라면 따라잡는 데는 하루면 족하겠군요.”

“서두른다면 그보다 일찍도 가능하지.”

“안 그러실 거잖습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지?”

“혹시라도 교전을 하게 된다면 어느 정도의 휴식은 필요하니까요.”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살라스는 마치 그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것 같았다. 막시밀리언이 도망자 놈들의 마음을 보듯이.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대장님께서 어떻게 놈들의 이동경로를 짐작하셨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건 저도 궁금하군요. 항상 느끼지만, 막시밀리언님은 대단한 분이십니다.”

“대단하지. 매번 뵙지만 도통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도 할 수가 없으니.”

막시밀리언은 무술 실력이라거나 군을 움직이는 운용 능력 같은 것은 별로 뛰어나지 않은 것 같았지만 상인의 핏줄이라 그런지 머리를 쓰는 것. 예들 들면 여러 가지 셈이나, 특히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능력이 탁월했다. 군터는 사실 막시밀리언이 무관이 아니라 문관의 길을 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종종했다.

“어찌 하실 생각이십니까?”

“방침은 이미 전달받았다.”

“예? 추격을 개시할 때부터 말입니까?”

“그래.”

“그 방침이라 함은?”

군터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온기가 사라진 검은 잔해를 거칠게 짓밟았다.

“야습.”

*

군터는 막시밀리언의 옆에 서 있었다. 그들은 지금 도망자 무리를 보고 있었다.

“완전히 방심했군. 이 정도면 추격대가 포기하고 돌아갔으리라 여긴 거겠지.”

그들은 커다란 바위 옆에서 불을 피우고 있었다. 이는 기습을 걱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사방이 탁 트이고 길게 자란 풀들이 없는 장소를 골라야 했다.

“자존심이 상하는군.”

“예?”

이해하지 못해 물으니 막시밀리언이 웃으며 돌아섰다.

“저것들이 저렇게 마음을 놓고 있다는 건, 그만큼 우리가 얕보였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아…….”

“슬슬 가세나. 상한 자존심을 다시 세워야 하지 않겠나.”

“예.”

야습은 가장 어두운 때에 이뤄졌다. 도망자들의 방비가 가장 허술해지는 시각. 불침번들마저 정신이 흐려지는 시점.

두두두!

거칠게 내달리는 말발굽소리가 한밤의 정적을 깼다. 불침번들이 소리를 듣고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을 때, 이미 군터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는 불침번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eru! jerbrjebweuy!(적이다! 어서들 일어나요!)”

어린 아이였다. 할렌보다도 어려 보이는.

‘널 여기에 세운 놈을 탓하거라.’

창검의 날이 무자비하게 소년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잘려나간 머리가 목 아래로 떨어지고 피가 높이 솟구쳤다. 군터는 연달아 이제 막 몸을 일으키던 사내의 가슴을 찔렀다. 가슴이 꿰인 사내는 창검 끝에 걸려 그대로 떠올랐다.

“커억!”

창대를 타고 핏물이 죽 밀려왔다. 고통과 두려움에 젖은 눈이 군터를 내려다봤다.

“흥!”

사내가 팔다리를 움직이며 허우적거리자 군터는 창검을 휘둘러 사내를 집어던졌다. 칼을 빼든 이들이 달려오고 있는 방향이었다. 피를 뿜으며 날아간 사내의 몸뚱이는 그의 동료들을 덮쳤고, 족히 너덧 명은 되는 사내들이 꼴사나운 모양새로 자빠졌다.

“대장님!”

프레드릭의 목소리다. 그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는 군터도 알고 있었다. 그의 눈에도 전면에서 좁혀오는 포위망이 보였으니까.

“우측으로 빠진다!”

다가오는 적들을 피해 방향을 틀었다. 힘차게 내달리는 기병대의 앞에는 나무 십여 그루가 있었다. 백여 필의 말들을 묶어 놓은.

“wnoiernqio!(막아!)”

하지만 사람의 달리기로 어찌 말의 달리기를 따라잡을까. 군터와 병사들은 스쳐 지나가며 말들을 묶어놓은 줄들을 끊었다. 다 자르지는 못했어도 족히 4분지 3의 말들이 줄에서 풀려나 사방으로 뛰쳐나갔다.

그것으로 군터 기병대의 역할은 끝이었다. 이제는 멀찍이 빠져나가서 도망치는 적들을 추살하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뒤쪽에! 쫓아옵니다!”

“음?”

부하의 고함에 뒤를 돌아보니 십여 기의 기마가 그들을 쫓아오고 있었다. 그를 본 군터는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를 흘렸다.

막시밀리언의 지시로 세 개 보병대가 포위망을 좁혀오는 중이었다. 그런데 얼마 남지 않은 기병을 이끌고 쓸 데 없는데다가 힘 낭비나 하고 있으니 웃음이 나올 밖에.

“저쪽에 꽤나 머리가 뜨거운 놈이 있는 모양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무시한다!”

추격해오는 선두에 씩씩거리는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더 이상 구겨질 수 없을 만큼 일그러진 얼굴을 보니 그 넘치는 분기가 여기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qerwqiuerurata(이 겁쟁이 놈들!)”

“시끄럽게 짖어대는데요. 이쯤이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 이쯤이면 됐다.”

전장에서도 어느 정도 떨어져 나왔다. 이제는 저 어리석은 멧돼지를 찔러 죽일 시간이다.

“아무도 나서지 마라!”

부하들을 대기시키고 군터는 홀로 말을 몰아 달려 나갔다. 아까부터 몸이 근질근질해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기마의 임무라는 것이 본디 그렇지만, 전투라면 역시 정면으로 부딪치는 맛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rwqjwqi! qirwnbiqr!(겁쟁이 놈이! 실성을 했나 보구나!)”

역시 저 멧돼지는 머리통을 장식으로 달고 다님에 분명했다. 뒤에 대기하고 있는 기병의 수만 자기들의 몇 배가 되거늘, 어찌 저렇게 당당하게 쫓아올 수 있었을까. 본인의 실력에 대한 자신?

“qwbrqweubr rqiwerbr!(입을 놀리는 만큼 실력도 있었으면 좋겠구나!)”

초원어를 들은 멧돼지가 순간 흠칫했다. 하지만 곧 아랑곳 않고 다시 콧김을 뿜었다. 그의 무기는 커다란 도끼창이었다.

“하앗!”

도끼날이 뚝 떨어졌다. 말의 다리를 노리는 한 수였다. 그 전까지 죽일 듯 눈을 부라린 것에 비하면 지나치게 영악한 수법.

“흥!”

군터는 어림도 없다는 듯 크게 고삐를 당기며 말의 배를 찼다. 그의 말은 그 즉시 달리던 그대로 높이 뛰어 올랐다. 동시에 창검의 날이 초승달처럼 아래를 쓸었다. 칼날의 궤적에 걸린 사내의 머리가 정수리부터 턱까지 쪼개졌다.

“실력 없이 입을 놀린 대가다!”

단 1합으로 대장을 거꾸러뜨린 군터는 순식간에 나머지 적들도 베어 넘겼다. 누구도 그의 창검을 받아내지 못했다. 결국 적들은 등을 보이고 달아났다. 군터는 그들까지도 쫓아가 마지막 한 명의 목숨까지 끊어버렸다.

대기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이후, 가만히 군터의 살육극을 지켜보고 있던 프레드릭은 기어이 마지막 한 명까지 추살해버리는 군터를 보고 혀를 내둘렀다.

“하여간…대단한 양반이라니까.”

“대장님의 실력을 의심치는 않지만, 그래도 저런 것은 안 좋습니다. 지휘관이 저렇게 앞으로 나서다가는 자칫…….”

“소용없다는 거 알지? 괜한 소리 하면 혼나기만 한다.”

프레드릭이라고 말을 안 해봤을까. 몇 번을 말해도 군터는 쓸 데 없는 걱정이라며 일축할 뿐이었다. 그러니 결국에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저렇게 나서서 제대로 된 부상을 입은 적이 한 번도 없으니 걱정이 된답시고 뭐라 말하기도 뭐했다.

“우리가 보기에는 무모하지만, 저 사람이 볼 때는 무모하지 않은 거야. 우리 대장님은 머리가 좋지는 않지만 멍청하지는 않아.”

그것이 수 년 간 군터를 봐온 프레드릭의 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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