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43화 (43/1,064)

<-- 도망자들 -->

“선두는 자네가 맡아주어야겠다.”

“예. 기꺼이.”

선봉은 군터 기병대의 몫이 되었다. 주된 임무는 정찰. 빠른 기동력을 지닌 기병대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탐마는 살라스와 베본이 맡는다. 너희들의 임무에 대해서는 따로 입 아프게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

“옛.”

“맡겨주십시오.”

살라스와 데본, 두 십인장들이 각기 휘하 병사들을 이끌고 먼저 떠났다. 군터는 나머지 병사들을 이끌고 길을 열었다.

“컬젠이라니. 듣자하니 약탈자 놈들의 수가 기백이라면서요? 어떻게 그 정도 수가 넘어오는데 모를 수가 있었을까요?”

프레드릭의 물음은 타당한 의문제기였다. 오테론의 탐망은 그 정도의 수가 넘어오는 것을 모르고 지나칠 정도로 허술하지 않았다.

“한 둘이 아니었으니까.”

“예?”

“초원에서 넘어온 놈들이 한 둘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놈들이 넘어오는 동안 두 요새도 나름대로 사투를 벌이고 있었던 모양이다.”

출발하기 전에 알게 된 소식이었다. 두 요새에서 원병을 청하는 전령이 당도했다. 그 전령이 전한 내용은 실로 충격적인 것이었는데, 족히 열 무리가 넘는 대규모 약탈자들이 밀려오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 중 몇은 요새의 병력이 출진하여 섬멸, 혹은 패퇴시켰지만 그렇게 물리친 것보다 더 많은 수가 남아 남하하고 있었다. 두 요새의 주둔 병력만으로는 도저히 처리할 수 없는 수준이었는지라, 오테론에서는 급히 원병을 급파하는 한편 살마드로 전령을 보냈다.

막시밀리언 천인대에서도 400명이 급파되었다. 200명은 오테론에 남았고, 현재 컬젠을 습격한 약탈자들을 토벌하기 위해 움직이는 병력은 400명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기마 병력은 군터의 백인대가 전부였으니, 당초 계획과는 달리 토벌군은 상당히 빠듯한 규모로 짜인 셈이었다.

“그건 큰 일 아닙니까? 대체 초원에서 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랍니까? 설마 이놈들이 전쟁이라도 일으키려는 건 아니겠죠?”

“전쟁? 누가?”

“예? 그야, 그 초원 놈들이…….”

“아국에서야 초원 놈들이라고 뭉뚱그려 이야기하지만, 실상 초원은 수백 개의 크고 작은 부족으로 나뉘어 있다. 나라도 없고, 왕도 없지. 그런데 누가 전쟁을 일으킨단 말이냐.”

“하지만 이번 일을 보면.”

“이번 일은 나도 놀랐다, 이런 일은 분명 드물지. 아마도 부족들 간에 전쟁이 일어난 것일 거다. 그것도 한 두 부족이 아니라 여러 부족이 서로 싸운 거겠지. 약탈자 무리에 여인과 아이들도 끼어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틀림없이 놈들은 전쟁에서 패하고 도망쳐 나온 도망자 무리일 것이다.”

군터는 확신했다. 하여 이번 임무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요새 쪽의 원군이 아니라 이 토벌군에 편성된 것에 조금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기왕 전장에 나서는 것이라면 심심한 임무보다는 전공을 세울 기회가 더 많을 격렬한 곳에 투입되고픈 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

“보고! 컬젠 마을의 생존자들을 발견했습니다.”

“생존자?”

“예! 대략 400여 명인데, 모두 마을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흠.”

약탈당한 마을에 생존자들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은 상당히 이상한 일이다. 더군다나 생존자가 400명 정도라니. 그 정도면 그냥 온전한 마을 하나의 인구 급이 아닌가.

“그래. 수고했다.”

하지만 보고에 대한 고민과 판단은 그의 몫이 아니었다. 군터는 즉시 부하 셋을 뒤따라오고 있는 본대로 보냈다. 그들은 지금 들은 내용을 고스란히 막시밀리언에게 전할 것이고, 이에 대한 판단은 그가 내리게 될 것이다.

잠시 후, 본대로 향했던 병사들이 돌아왔다.

“마을로 탐마를 보내 그곳 상황을 살피라 하십니다!”

“알겠다.”

예상했던 지시가 그대로 내려왔다. 군터는 즉시 명령을 내렸다.

“제이미, 벡스. 너희는 컬젠으로 가서 어떻게 된 일인지 소상히 알아봐라.”

“옛!”

군터는 말을 몰고 가면서 생각에 잠겼다. 정찰은 부하들이 하고 있고, 그는 움직이는 말 위에 앉아있기만 하면 되었기에 할 거라고는 생각 밖에 없었다.

‘특이한 놈들이군.’

보통 약탈이라 하면 돈이나 물건,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 그리고 통상적으로, 약탈을 하면서 사람을 남겨두는 경우는 거의 없다. 노예로 삼거나 팔려고 한다면 잡아갈 것이고, 아니라면 죽인다. 후환을 남기지 않기 위함이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을 400여 명 씩이나 고스란히 살려두고 갔다?

‘컬젠이 약탈당했다는 보고도 마을에서 직접 올라왔다고 했지.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군.’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왜,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따져본다. 이는 군터가 백인대장이 되고서 가지게 된 가장 큰 변화였다. 이전의 그는 그저 명령을 받으면 받은 대로 움직이고, 적이 보이면 싸우는 식의 단순한 군인이었다. 하지만 백인대장 정도 위치가 되면 그런 식으로만 움직일 수는 없었다.

막시밀리언은 일찍이 그에게 이와 관련한 조언을 해주었다. 군터는 그의 조언을 듣고 변화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가 그토록 욕하던 무능한 지휘관이 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놈들은 도망자다. 아마도 부족의 일부가 통째로 도망쳐 나온 거겠지. 추적자들의 추격을 피하려 급하게 움직였을 테니 충분한 준비를 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의 준비란 여러 가지를 의미한다. 무장일 수도 있고, 말일 수도 있으며, 식량일 수도 있다.

‘쉬지 않고 도망쳤겠지. 피로가 심했을 테니 마을을 통째로 쓸어버리려 했다가는 다소간의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적당히 약탈하고 빠진 것이 아닐까?’

여기까지가 군터의 추측이었다. 여기서 더 파고들려 하니 머리가 지끈거려 포기했다. 아직까지는 머리를 쓰는 것이 영 익숙하지가 않았다. 그는 체질적으로 언제나 머리보다는 주먹을 선호해왔다. 이제껏 그리 살아왔는데 어느날 갑자기 마음을 먹었다고 해서 쉬이 변할 리 없었다.

*

“저곳입니다. 생각보다는…멀쩡한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멀쩡한 것이 아니라 그냥 멀쩡했다. 목책도 상한 곳이 하나도 없었고, 그 안에 보이는 집들도 그랬다. 겉으로만 봐서는 도저히 습격당한 마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너무 멀쩡합니다. 수상할 정도로.”

살라스가 말했다.

“일단은 주의하며 대기하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어째서지?”

“컬젠이 약탈자들과 모종의 관계를 맺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애초에 보고가 올라온 것이 컬젠이었으나 지금 이렇게 보니 너무나 멀쩡하지 않습니까.”

사실 살라스의 걱정은 지나친 비약이었다. 하지만 확실히 컬젠의 모습은 너무나 이상했다. 일단 그의 말처럼 주의할 필요는 있어 보였다.

“여기서 멈춰서 본대가 올 때까지 대기한다.”

마을에서도 그들의 접근을 알아챘는지 부산스러운 모습이었다. 특히 군터 기병대가 고지에서 멈춰 서서 움직일 생각을 안 하니 더 반응이 요란했다.

잠시 후, 마을에서 나이 지긋한 노인 한 명과 장년 두 사람이 나왔다. 그들은 군터 기병대가 멈춰 선 곳까지 걸어왔다.

“이 마을의 촌장인가?”

“그렇습니다. 나리.”

“습격을 당했다 들었는데, 내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는군.”

“그것이…….”

“그래서 막 자네들이 그 약탈자 무리와 주고받은 게 있지 않나 생각 중이었네.”

담담하게 던진 말에 촌장이 펄쩍 뛰었다.

“주, 주고받다니요! 당치도 않으십니다! 저희는 황제 폐하의 종복인데 어찌 무도한 야만인 놈들과 작당모의를 하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실은…….”

“내게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네.”

“예?”

“그 말은 아껴두었다가 저 쪽에 오고 계시는 분께 하도록.”

군터는 슬쩍 고개를 돌려 후방을 가리켰다. 막시밀리언이 이끄는 본대의 깃발이 저 멀리서 다가오고 있었다.

*

막시밀리언은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고지에 자리를 마련했다. 그는 의자를 놓고 앉았는데, 그 뒤쪽에는 군터를 비롯한 백인대장들이 늘어서 있었다. 막시밀리언의 앞에 선 촌장은 굉장히 위축된 것처럼 보였다.

“우선은 심심한 위로를 전하겠네. 자네들이 화를 입은 것은 전적으로 야만인 놈들에 대해 제대로 방비하지 못한 우리의 잘못이야. 오테론의 군을 대신해 내가 사과하지.”

“아이고! 사과라니요! 당치도 않으십니다!”

“자…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지. 컬젠이 무사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고, 왜 무사했느냐 트집을 잡고픈 마음은 조금도 없네. 하지만 난 분명 야만인들의 습격을 받았다고 들었어. 자네가 보낸 전령에게서 말이야. 혹 내가 뭘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이 있는가?”

“아닙니다요. 말씀하신 모든 것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자네가 내게 설명을 해줄 차례군. 야만인들이 마을에 무엇을 했으며, 그들은 어디로 갔는가?”

촌장과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막시밀리언은 군터로 하여금 사방으로 정찰병을 보내게 했다. 혹 있을지 모를 야만인들의 매복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살라스가 그랬고, 군터가 그랬던 것처럼 막시밀리언 역시 너무나 멀쩡한 컬젠의 모습에 깊은 의구심을 품었음이 분명했다.

“그러니까…엿새 전이었습니다.”

촌장은 쩔쩔매면서도 입을 떼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엿새 전. 야심한 밤에 야만인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목책을 포위했고, 알 수 없는 초원의 말로 거칠게 위협을 가했다.

컬젠 마을은 삽시간에 공포에 빠져 소란스러워졌다. 마을에 있는 자경단의 수라고 해봐야 마흔이 넘지 않았고, 마을을 포위하고 있는 야만인들의 수는 어두워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족히 수백은 되어 보였던 것이다.

마을이 점점 더 절망에 빠져들고 있을 때. 갑자기 야만인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놀랍게도 그는 제국어를 할 줄 알았다. 그는 먹을 것과 말을 내어주면 마을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고 돌아가겠노라 약속했다.

그 대목에서 촌장은 변명하듯 말을 덧붙였다. 막시밀리언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은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었습니다.”

촌장을 비롯한 마을의 유력자들은 머리를 맞대고 상의에 들어갔다. 만약 요구한 것을 주었을 때 야만인들이 물러간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쩔 것인가.

그들은 짧은 시간 동안이지만 치열하게 토의했고, 그 결과물을 들고 야만인들과 대화를 나눴다.

“오테론으로 전령을 보내도록 길을 열어줄 것. 그리고 사흘의 시간을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사흘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야만인들이 약속을 깨고 공격한다 해도 오테론에서 원군이 올 때까지 버틸 자신이 있었던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우리 마을의 목책은 튼튼하고, 어둠이 걷히면서 본 적들의 구성에 어린 아이와 여자들까지 섞여있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촌장의 생각은 틀렸다. 왜냐하면 그가 보낸 전령이 오테론에 닿은 것은 이틀 전이었기 때문이다. 촌장은 사흘이면 충분하리라 여긴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나흘이 걸려 오테론에 당도했다.

막시밀리언은 굳이 그것을 촌장에게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그는 촌장의 말을 한 번도 끊지 않고 모두 들어주었다.

“그들에게 식량과 말 스물 네 필을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로 아무런 해코지도 하지 않고 물러가더군요.”

“자네의 말을 믿겠네. 그리고 자네와 커젠의 기지를 칭찬하지. 자네들이 야만인들에게 물자를 내준 것도 탓하지 않겠다. 그런 일이 벌어진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에게 있다고 봐도 틀리지 않으니.”

“넓으신 아량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촌장은 다리가 풀렸는지 갑작스레 휘청거렸다. 그를 따라온 장정 두 명이 급히 그를 부축했다. 아마도 야만인들에게 물자를 내준 것에 대해 추궁을 당할까 싶어 어지간히도 걱정했던 모양이다.

“그래. 놈들은 어디로 갔는가.”

“남쪽, 남쪽으로 갔습니다. 틀림없습니다.”

“남쪽인가…….”

막시밀리언이 가만히 턱을 쓸었다.

========== 작품 후기 ==========

쿠폰 감사합니다. 처음 받아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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