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족, 가정, 행복 -->
집이 생기고, 집에서 항상 기다려주는 이가 생겼다는 건 굉장히 낯설면서도 기쁜 일이었다. 비로소 가족을 되찾은 느낌이랄까? 물론 벨리사와 그는 아직 결혼을 한 것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결혼이라. 그것도 하기는 해야지.’
사실 결혼이라는 것이 제도로는 있지만 그럴듯하게 격식을 맞춰서 하는 것은 이름난 상류층들의 이야기이고, 대부분의 일반 사람들은 간단히 남자와 여자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음을 주변에 알리고 소소하게 잔치를 여는 정도로 치르는 게 전부였다.
군터 역시 결혼을 하게 된다면 떠들썩하지 않게 할 생각이었다. 아무리 좋은 날을 기념키 위한 것이라 해도 그는 번잡스러운 것은 딱 질색이었고, 결혼의 규모야 어떻든 당사자 두 사람만 만족하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역시 장신구 같은 것은 있어야겠지.’
허전한 벨리사의 목과 손가락을 떠올렸다. 물론 그녀의 목은 드러난 살결이 가장 아름다우며 손가락 역시 그렇지만, 군터는 그녀를 위해 무언가 근사한 것을 선물하고 싶었다.
물론 나중의 일이었다. 근사한 것을 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한데, 벨리사를 데려오고 집까지 사느라 지금은 수중에 여윳돈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침착하라고 했지.’
로크의 충고를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겼다.
맞는 말이다. 근래의 하루하루가 너무 낯설 만큼 행복해서, 혼자 실없이 웃을 때도 있었다. 군터는 이런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생소했다. 그렇기에 너무 느슨해지려는 스스로를 경계했다.
“대장님. 준비 다 끝났습니다.”
“아아, 그래.”
프레드릭의 보고에 군터는 몸을 일으켰다. 때마침 적절하게도 오늘은 마상 전투훈련이 있는 날이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는 역시 몸을 움직여주는 것이 최고 아니겠는가.
* * *
“으응.”
벨리사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끙끙댔다. 그러자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던 풍만한 중년 여인이 고소를 지었다.
“어렵죠? 호호호. 이게 보기에는 별 거 없어 보여도 쉽게 되는 일이 아니랍니다.”
“네에. 생각보다 어렵네요. 이거.”
중년 여인은 옆집에 사는 이웃이었다. 며칠 사이 안면을 트고 지금은 그녀로부터 뜨개질을 배우는 중이었다. 샐리라는, 조금은 외관과 어울리지 않는 이름을 가진 중년 여인은 푸근해 보이는 외모만큼이나 넉살이 좋았다. 지금 이 뜨개질도 자기가 먼저 나서서 가르쳐주겠노라 한 것이었다.
“너무 힘줘서 쥐지 말아요. 힘이 들어가면 오히려 바늘이 생각보다 더 잘 안 움직이게 되니까요.”
“네. 그러려고 하는데 잘 안 되네요.”
“어떻게 처음부터 잘 하겠어요? 하다 보면 늘어요, 하다 보면.”
샐리는 끊임없이 말을 하고, 이따금씩 시선을 벨리사에게 향하면서도 바느질을 척척 해냈다. 손과 머리가 따로 노는 것 같이 보일 정도였다.
“정말 잘하시네요.”
“심심할 때마다 하니까요. 벌써 10년 넘게 한 건데 이 정도도 못하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하죠.”
“와아. 10년 동안이나…….”
“벨리사 동생도 익숙해지게 될 거에요. 그럴 수밖에 없죠. 우리네 바깥양반들은 밖으로 돌아다니는 시간이 기니까, 자연히 우리는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날 수밖에 없죠. 특히나 벨리사 동생의 남편은 기병대의 백인장이잖아요?”
“…그렇죠.”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해지게 될 거란 말을 들으니 벨리사는 알던 것임에도 마음이 착잡해졌다. 그녀는 혼자 있는 것이 싫었다. 물론 집에는 유리아가 함께 있지만, 그녀는 군터가 아니었다.
‘이런 게 배부른 고민이겠지?’
살마드에 있을 때에 비하면 이곳은 그야말로 천국이다. 원치 않는 누군가에게 안겨야 할 일도 없고, 욕을 듣거나 맞을 일도 없다. 이곳에서는 아무런 걱정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오? 소질이 있네요. 전보다 훨씬 나은 것 같은데요?”
“정말요? 괜히 하시는 말씀은 아니죠?”
“그럼요.”
벨리사는 밝게 웃었다. 외로움과 괴로움을 이겨내는 그녀만의 수단이었다. 웃고 있으면 가끔씩은 안 좋은 기분도 잊어버릴 수 있었다. 물론 그런다고 우울한 감정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잠시 잊힐 뿐.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족했다. 적어도 웃고 있는 순간만큼은 그런 감정들에서 도망칠 수 있었으니까.
“나중에는 요리도 가르쳐줄게요. 동생 요리 잘 못하죠?”
“예? 아아…잘은 못하지만, 그래도 조금 정도는.”
“흐응. 그래요? 손을 보면 별로 집안일을 오래 해본 것 같은 손은 아닌 것 같은데…….”
“그, 그런가요?”
집안일을 별로 안 해본 것은 맞다. 바느질은 찢어진 옷을 꿰매는 정도 밖에 할 줄 모르고, 음식 같은 경우는 정말 간단한 몇 가지 음식밖에 할 줄 몰랐다. 그마저도 맛을 보장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말이다.
“예. 귀한 집서 자란 따님 같았거든요.”
“아…….”
귀한 집 따님? 설마.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당장 며칠 뒤의 미래를 걱정하며 몇 없는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던 그녀다. 하지만 샐리는 다행스럽게도 그렇게 눈썰미가 좋은 편은 아닌 듯했다. 벨리사는 떨리는 입술을 꾹 다물고 웃었다. 그리고 바뀐 화제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냈다.
* * *
그리 길지 않은 인생에서 행복했던 시절을 찾아보자면 역시 친절한 촌장의 집에서 지내며 로크를 비롯한 친구들과 뛰어 놀던 때였다. 아무 걱정 없이 마을의 이곳저곳을 누비며 장난을 밥 먹듯 치던 시절. 그때의 그는 하늘을 누비는 새처럼 자유로웠고 아무런 걱정거리도 없었다. 그것이 인생에 있어 유일하게 행복했던 시절로 꼽는 이유였다.
그런데 벨리사를 만나고 난 뒤로는 생각이 달라졌다. 그녀를 작지만 아늑한 집에 들이고 난 뒤부터는 하루하루가 모두 행복했다. 이제까지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다 여겼던 어린 시절의 그때보다도 더.
“오셨어요?”
집 문을 열고 들어가면 벨리사가 쪼르르 나와 반겨준다. 싱글거리는 얼굴을 보고 있으면 여러 가지가 떠올랐다.
그것은 사내로서 여인에게 자연스레 갖는 엉큼한 마음 같기도 하고, 추위에 시달린 자가 모닥불 앞에서 느끼는 온기 같기도 했다.
그녀를 보며 느끼는 감정은 복잡했지만, 그 모든 것이 뒤섞여 나온 결과는 단순한 한 가지였다. 군터는 살짝 홍조를 띠고 그를 맞이하는 벨리사를 안아 들고 침실로 들어갔다. 유리아는 집 옆에 딸린 창고를 개조한 곳에서 지내고 있었기에 지금 집 안에는 그들 둘 뿐이었다.
얼마 후. 군터는 벨리사를 위해 한 쪽 팔을 내어주고서 천장을 보고 있었다.
“오늘은 어땠어?”
“좋았어요. 샐리씨한테서 여러 가지를 배웠죠.”
“여러 가지?”
“바느질 하는 법 같은 거요. 저도 대충은 할 줄 아는데…옷 한 벌을 만들 수준은 안 되거든요.”
“바느질? 당신이 그런 걸 할 필요는 없어.”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뭐라도 하고 싶어서.”
“흠.”
그 어느 사내가 사랑하는 여인을 귀하게 여기고 싶지 않겠는가. 군터 역시 벨리사를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귀부인들처럼 호강을 시켜주고 싶었다.
그런 마음을 알았음일까. 벨리사는 수줍게 웃으며 그의 품으로 더 깊숙이 머리를 묻었다.
* * *
벨리사는 이제 그녀의 새로운 삶에 어느 정도 적응을 마친 것처럼 보였다.
나이 많은 친구도 사귄 것 같았고, 유리아와의 관계도 그럭저럭 괜찮은 듯 보였다. 그리고 가장 걱정했었던 오테론의 날씨에도 두툼한 옷을 여러 겹 껴입으며(이때의 벨리사는 그녀의 나이 많은 친구와 비슷해 보였다.) 나름대로 저항해 나갔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그의 생각보다 강한 여성이었음이 증명된 것이다.
“멀었다 이 자식아!”
“아악!”
우렁찬 비명소리에 고개를 드니 할렌이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것이 보였다. 그 앞에서 프레드릭이 한껏 기고만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끄으으!”
“자식아! 넌 사내 실격이다! 사내로서 가장 중요한 급소도 살피지 않다니!”
보아하니 프레드릭이 할렌의 영 안 좋은 부위를 가격한 것 같았다.
‘어지간히도 급했나 보군.’
프레드릭이 가볍고, 천박하며, 짓궂은 사내라는 것은 그를 아는 이라면 누구나 다 동의할 이야기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는 뛰어난 군인이었다. 가벼운 겉모습 속에 누구보다도 더 독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그가 아직 덜 자란 어린 아이의 가운데 다리를 걷어찼다는 건 그만큼 상황이 좋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면 할렌 저 녀석도 상당한 재능이다.’
군터 기병대에서 대장인 군터를 제외하고 최고의 실력자는 살라스였다. 그는 십인장 중 가장 어리지만 누구보다도 뛰어난 무술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아직까지 기마술과 여러 상황에서의 임기응변이 조금 부족하지만, 이는 경험이 쌓이면 자연히 해결 될 문제였다.
아무튼 그런 살라스의 재능은 군터조차 인정할 만큼 대단한 것이었는데, 요즈음 보면 할렌의 재능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아직 신체적으로 성장이 덜 끝나 어떻다 판단하기는 이른 감이 있지만 만약 이대로 조금만 더 자란다면 확실히 살라스에 버금갈 재능이 될 소질이 있었다.
‘저 녀석은 이미 의식하고 있는 것 같군.’
자기는 애써 아닌 척을 하지만 군터는 할렌이 은연중에 살라스에게 경쟁의식을 드러낸다는 것을 눈치 챘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한낱 노예 주제에 십인장에게 경쟁심을 불태운다니.
‘하지만…나쁠 것 없지.’
언제까지고 할렌을 노예로 둘 생각은 없었다. 그건 그 어미인 유리아도 마찬가지. 군터는 적절한 시기가 오면 그 둘을 면천시켜줄 생각이었다. 사람을 부리는 것에 거리낌은 없지만, 노예에 대해서는 별로 긍정적이지 않았던 군터다. 그런 그의 생각은 이번에 벨리사를 데려오면서 더 확고해졌다.
‘저 녀석이 잘만 커준다면…쓸 만한 부하를 하나 더 얻는 셈인가?’
“우아아아악!”
그때 간신히 고통을 수습한 할렌이 눈이 뒤집혀서 프레드릭에게 달려들었다가 같은 곳을 또 한 번 얻어맞고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프레드릭은 이번에도 턱을 꼿꼿이 세운 채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한껏 으스댔다.
‘일단 그렇게 되기 전에 저 빌어먹을 성격부터 좀 고쳐놔야겠지.’
저 다혈질이라는 말로도 설명이 안 되는 개 같은 성미부터 죽여 놔야했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로 전장에서 자기 혼자 돌진해서 사망하는 웃기지도 않은 장면을 보게 될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