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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마드로 돌아가는 길. 군터는 거의 다 떨어져가는 약초를 이번에도 듬뿍 으깨어 벨리사에게 발라주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군.”
오두막에서 오갔던 이야기들에 대해 벨리사는 한 마디도 묻지 않았다. 마치 그런 이야기들을 나는 들은 적이 없다는 듯이.
“알아야 되는 거면 당신이 해주겠죠. 그리고 솔직히 나는 그게 다 무슨 이야기들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무슨 신이 어쩌고저쩌고…너무 안 와 닿는다고요.”
살짝 섞인 볼멘소리가 귀여워 군터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와 함께한 지 불과 며칠 밖에 되지 않았으나 그녀는 몰라볼 정도로 밝아졌다. 어쩌면 이 모습이 그녀의 진짜 모습일지도 모른다. 정말 마음 편히 웃는 그녀의 얼굴은, 그 무엇보다도 아름다워 보였다.
“그…….”
“응?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머뭇거리지 말고 해.”
“오두막에서…저보고 아내 될 사람이라고 했잖아요.”
“그랬지. 그게 왜?”
“진심이에요?”
“왜 의심하지?”
“아니, 당신은 백부장이잖아요 .저는 한낱 술파는 곳에서 노래를 부르던 여자였고. 당신의 아내가 되기엔 제가 너무 부족한 게 아닌가 싶어서요.”
약초를 문지르던 손이 딱 멈췄다. 군터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전혀 부족하지 않고, 난 당신보다 대단한 사람이 아니야.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
사납게 쏘아붙이고 나서 다시 약초를 바르기 시작했다. 조금의 침묵 뒤에, 군터는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었다.
“만약 내가 당신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았다면 난 지난 1년 동안 고생을 하지도 않았을 거야.”
“…미안해요.”
“알았으면 됐어.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
벨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끝없이 이어지는 말들에 담긴 감정만은 말소리보다도 더 또렷하게 느껴졌다.
[belpara! daude…karak!]
분노. 어마어마한 분노. 그리고 한없는 절망에서 허우적거리는 헤어 나올 수 없는 두려움. 공포.
오직 그 두 감정만이 번갈아 요동쳤다. 그 끔찍하리만치 격렬한 감정의 홍수 속에서 그는 서서히 자신을 잊어갔다.
* * *
“허억!”
자리를 박차다시피 하며 깨어났을 때, 군터는 옆에 놓아둔 창검부터 쥐었다. 서늘한 금속의 감촉이 손 안에 가득 들어오고서야 불안하게 갈팡질팡하던 마음이 약간이나마 안정을 찾고 이성이 돌아왔다. 물론 끔찍한 두려움은 여전히 그를 깊게 잠식하고 있었다.
“우응…….”
곁에서 잠들어 있던 벨리사가 몸을 틀었다. 세상모르고 깊게 잠든 그녀의 모습에 군터는 다시 한 번 마음을 진정시켰다.
아무 일도 없다.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깊게 잠든 건가? 설마 그럴 리가.’
얕게 눈만 붙이는 식의 휴식에는 익숙했다. 피곤해서, 혹은 다른 이유로 잠들어버린다는 것은 그에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깊게 잠든 것은 아니었다. 몸에 남아 있는 약간의 뻐근함이 그 증거다. 모닥불의 장작이 얼마 타들어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시간도 얼마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엇이었는가. 그 끔찍한 소리는.
‘바칼인가.’
추측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 그 끔찍한 감정들. 그것들은 일전에 사교도의 마을에서 바칼을 보며 느꼈던 것과 매우 흡사했다. 필시 바칼의 그림자가 여전히 그의 안에 남아 있는 것이리라.
‘역시 그간의 악몽들도 모두 이것 때문이었나?’
실은 악몽에 시달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사교도 마을에서의 일이 있은 후, 이따금씩 군터는 식은땀으로 목욕을 한 채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이제까지는 그것이 무슨 꿈이었는지 조금도 기억하지 못했다. 물론 추측은 했지만 이제야 그 추측이 사실로 굳어진 것이다.
‘꼴사납군.’
겁쟁이라 불린 적은 살면서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를 아는 모든 이들은 그를 담대하다 했다. 심한 경우에는 무모하다고까지 했다. 그 누구도 그를 비겁하다거나, 졸장부라거나, 겁쟁이라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군터는 자신의 꼴이 겁쟁이와 같다고 생각했다. 죽어버린 신의 잔재에 짓눌려 악몽이나 꾸는 지금의 모습이 얼마나 보잘 것 없고 추한가.
“…….”
갑자기 무언가 생각이 난 군터는 품을 뒤적거렸다. 그리고 자그마한 돌을 꺼냈다.
투박하고 표면도 거칠거칠한,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흔한 돌멩이와 별 다를 바 없어 뵈는 외관과 달리, 이것은 신의 숨결이 담겨 있다고 하는 그들 부족의 신물이었다. 대대로 부족의 무녀들만이 보유할 수 있었던 보물 중의 보물.
‘겉으로 보기에는…볼품없는 돌멩이일 뿐인데.’
그래도 평범하지 않은 물건이란 건 알겠다. 돌의 표면에 빼곡하게 새겨진 신언(神言)이 아니라도 돌이 풍기는 은은한 기운이 느껴졌으니까. 모친에게서 발현되지 못했던 무자의 재능은 아들인 그에게서 나타났고, 군터는 어렸을 적부터 이런 신비를 남들보다 잘 느끼곤 했었다.
하지만 범상한 돌이 아니라고 해서 이것이 흉신의 그림자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수 있겠느냐 한다면 역시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만약 다른 이가 그리 말했다면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군터는 외조모를 여전히 증오했지만, 무녀로서 그녀의 능력은 인정했다. 일단 그녀는 맹수를 포함한 온갖 짐승들을 집에서 기르는 개 마냥 다룰 수 있는 실력 있는 술사이지 않은가.
그리고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돌을 손에 쥐고 있으니 싱숭생숭했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 같았다. 아니면 벨리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는 다른 한 손 때문이거나.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계속 생기는 것 같은데.’
돌이켜보면 요 근래(근래라고 해도 범위를 어느 정도나 잡아야 할지는 모르지만)에 벌어진 일들은 모두 예상치 못한 것들뿐이었다.
백인대장이 된 것부터 시작해서 신이라는, 그저 머릿속에 단어로만 떠올리던 불가해의 존재와 조우한 것. 그리고 그야말로 상상치도 못했던 감정을 알게 해 준 여인과 만난 것까지.
‘행복…한 거겠지.’
나아가야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출세하기 위해서, 목표로 삼았던 곳에 닿기 위해 악착같이 기어 올라갔다. 결코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고 뒤돌아보는 일 따위는 당연히 없었다. 오직 쉼 없이 달리고 또 달리는 것만이 그의 삶 전부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더 높이 올라가고픈 야망은 여전히 충만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함께 하고픈 여인이 생겼고, 그녀와 함께하는 삶을 꿈꾸고 있다.
“으응.”
계속 머리에 두툼한 손이 올라있는 것이 답답했는지 벨리사가 또 한 번 몸을 틀며 그의 손아귀를 빠져나갔다. 그 모습에 군터는 소리 없이 웃으며 조심스레 가죽 이불을 그녀의 목 아래까지 끌어올려주었다.
* * *
군터는 살마드를 떠나기 전에 벨리사를 인사시켰다. 처음엔 로크에게, 살마드를 떠나기 이튿날 전에는 부하들에게.
“아이고, 제수씨. 이 멍청한 놈하고 같이 살려면 고생이 많으시겠습니다. 그래도 이놈이 멍청하기는 해도 듬직하고 좋은 놈이니 머리 나쁜 걸로 너무 뭐라 하지는 마세요.”
“듣던 대로 재미있는 분이네요. 좋은 말씀 감사해요.”
벨리사는 군터와 둘이 있을 때 보이는 장난기는 어딘가에 꽁꽁 감춰둔 채 현숙한 여인처럼 대꾸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군터는 살짝 놀랐다. 그리고 그녀가 사내들을 대하는데 굉장히 능숙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와아! 드디어 직접 뵙네요! 말로만 들었었는데……. 대장님! 언제 이런 아름다운 분을 꼬드기신 겁니까?”
“꼬드기다뇨. 프레드릭님. 말을 좀…….”
살라스가 방방 뛰는 프레드릭에게 핀잔을 줬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살라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병사들은 전혀 (외적으로) 안 어울리는 두 사람을 번갈아보며 감탄할 뿐이었다.
“벨리사와 함께 오테론으로 갈 거다. 그렇기 때문에 미리 말해둔 것처럼 일찍 떠나는 거다. 그녀는 말 타는 데 익숙지가 않거든. 우리끼리 움직일 때보다 2배는 걸리지 않을까 싶다.”
“에이! 저희는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그나저나 오테론으로 함께 가신다면, 아예 살림을 차리시는 겁니까?”
“당연히.”
그 말을 하자마자 안 그래도 소란스러웠던 병사들은 그야말로 뒤집어졌다. 그들은 마치 거시기가 잘린 늑대처럼(물론 거시기가 잘린 늑대를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서럽게 울부짖어댔다. 몇몇은 눈마저 그렁그렁해졌다.
“그러니까 아직 볼 일이 남은 녀석들은 되도록 내일까지 마무리 짓도록.”
물론 그 일이라는 것은 본능적인 욕망과 관련된 일들이었고, 그의 지시대로 다음날까지 모든 일을 해결한 병사들은 이튿날 아침에 조금 퀭한 얼굴을 한 채 집합했다.
“마지막으로 잘 봐둬. 지금 가면 언제 다시 돌아오게 될지 모르니까.”
“됐어요. 다시 못 온다고 해도 별 상관없는 곳인데요.”
“음.”
잠깐 잊었지만 그러고 보면 벨리사에게 있어 살마드에서 보낸 거의 모든 시간들은 좋은 기억이 아닐 것이다. 군터는 자신의 무신경함을 가볍게 자책했다.
“저번보다 훨씬 힘들 거야. 언제든 견디기 힘들면 말해.”
“네. 너무 걱정하지 마요. 이제는 어느 정도 요령도 붙었다고요.”
싱글싱글 웃으며 당차게 말하는 벨리사.
‘요령이 아니라 근육이 붙어야 하는데.’
그녀의 허벅지는 부실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튼튼한 것도 아니었다. 매끈하기는 하지만, 말을 타고 오래 이동할 수 있을 정도로 강인해 보이지는 않았다.
“출발하자.”
그녀에 대한 걱정을 깊이 품은 채, 군터는 부하들에게 출발 명령을 내렸다.
* * *
매우 다행스럽게도, 살마드를 떠난 군터 기병대는 무사히 오테론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테론에 도착하자마자 벨리사는 축 늘어져버렸는데, 사실 그녀는 일정의 중간 즈음부터는 항상 녹초였다. 그래도 우는 소리 않고 꿋꿋이 버텨낸 것이 대단할 정도였다.
“그나저나 대장님. 집은 알아보셨습니까? 마님께서 지내시기에 병영은 좀…….”
프레드릭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군터의 부하들은 벨리사를 마님이라고 불렀다. 벨리사는 당치 않은 표현이라며 손 사레를 쳤지만, 사실 다른 마땅한 호칭이 없기도 했기에 그녀를 부르는 명칭은 마님으로 굳어졌다.
“알아놓은 집이 있다.”
“대장님께서 알아서 잘 하시리라 생각하지만, 하여간 집을 구할 때는 신중하셔야 합니다. 뭐, 어디다 집을 구하든 백인대장의 집이라는 소문이 나면 허튼짓할 놈은 없겠지만…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니까요.”
오테론은 군사도시인 만큼 치안이 좋은 편이지만 그렇다고 사건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오테론에도 상대적으로 낙후된 구역이 있었고, 이따금씩 부랑배들에 의한 강도, 폭행이나 살인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프레드릭이 한 마디를 하니 이번에는 살라스도 한 마디를 보탰다.
“하인도 들이셔야 합니다. 마님께서 집안일을 모두 하시는 것도 힘들 테고, 무엇보다 집에 여인 혼자만 있으면 좋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그래. 그래야지. 하인이라…그건 미처 생각지 못했군.”
마음만 앞서서 깊게 생각을 해보지 못한 부분이었다. 확실히 살라스의 말처럼 하인도 필요할 것 같았다. 그러나 필요하다고 해서 아무나 갖다 쓸 수는 없었다.
‘유리아를 데려다 쓰는 것도 좋겠군.’
할렌도 이제는 어느 정도 컸고, 군터 백인대의 병영에는 그들 모자 말고도 노예가 몇 명 더 있었으니 유리아 한 명 정도는 빼내도 문제없을 터였다.
‘그래. 유리아라면 믿을 수 있다. 일단은…알아놓은 집부터 마무리 지어야겠군.’
군터는 그날 하루 종일을 바쁘게 움직였다.
먼저 관청으로 가 미리 알아봐두었던, 군인 거주 지구에 있는 자그마한 집 한 채를 샀다. 집의 크기에 비해 값이 꽤나 비쌌지만 어쩔 수 없었다. 군인 거주 지구는 오직 군인들만을 위한 거주 구역으로, 오테론에서 가장 치안이 좋은 곳 중 하나인 만큼 집값이 비쌌다. 때문에 군인 거주 지구라고는 해도 대부분 백인장 이상들만이 그곳에서 살고 있었다.
그렇게 집을 사고 나자 군터는 유리아를 시켜 미리 집을 정리하게 했다. 그 전에 살던 이가 따로 짐을 챙겨가지는 않았는지 쓸 만한 가구 같은 것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기 때문에 청소만 하면 됐다. 비싼 집값에는 이런 가구들의 값도 포함이었던 것이다.
“와아……”
다음날 군터를 따라 그들의 집에 온 벨리사는 탄성을 한 번 흘린 채 그대로 굳었다. 혹여 집이 마음에 들지 않는가 싶어 벨리사의 눈치를 살피려던 군터는, 그녀의 눈이 그렁그렁해진 것을 보고 오해를 풀었다.
“있죠. 이게 다…꿈만 같아요.”
뭐라 말해야 할지 몰랐다. 군터는 말없이 그녀를 안아주었다. 그리고 진정이 안 되는 듯 들썩이는 그녀의 뒷머리를 몇 번이고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 * *
“군터 이 사람!”
오랜만에 다시 만난 막시밀리언은 그를 보자마자 화난 얼굴로 언성을 높였다. 그에 군터는 자신이 뭔가 잘못한 게 있나 싶어 생각해보았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그런데 화난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오던 막시밀리언은, 당황한 표정의 군터를 앞에 두자마자 표정을 바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자네 집을 샀다면서! 집에 들인 여인은 자네 안사람이 될 사람인가? 아니면 이미 안사람인가? 어쨌거나 섭섭하구만! 내게는 일언반구도 없이 말이야!”
“어…음. 송구합니다.”
그리 말하면서도 뭐가 송구한지도 몰랐지만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아 일단 고개부터 숙였다.
“요 근래 돈을 모았던 것도 다 이 때문이었나? 집을 사려고 장사치들에게 돈까지 빌렸다면서?”
막시밀리언은 정말 모르는 게 없었다. 군터는 바로 어제 일어난 일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막시밀리언을 보고 약간의 두려움과 꺼림칙함마저 느꼈다.
‘내게 사람을 붙여놓은 건가?’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분명히 확인한 것은, 막시밀리언의 눈은 그의 성정만큼이나 날카롭다는 점이다. 혹여라도 그의 앞에서 어설픈 거짓을 말했다가는 크게 낭패를 보게 되리라.
“섭섭하군. 섭섭해. 그렇게 돈이 필요한 일이 생긴다면 장사치들이 아니라 나를 먼저 찾아와야 하는 것 아닌가? 자네는 나를 수하의 곤궁함을 모른 체 하는 냉정한 상관으로 만드는군.”
“그럴 마음은 결코 없었습니다. 저는 다만…….”
“아아, 됐네. 자네가 장사치들에게 빚진 돈은 내 다 갚아두었으니 그리 알게.”
“예?”
“내 성의이니 그에 대해선 아무 말도 말아. 그건 그렇고, 이야기 좀 해보게. 어떻게 만난 여인인가? 결혼은 했나? 응?”
막시밀리언은 어느새 장난기 많은 어린애처럼 눈을 빛냈다. 군터는 그의 그런 급격한 태도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눈만 뻐끔거렸다. 그를 상관으로 모신지도 꽤 오래 됐건만, 이따금씩 보이는 이런 모습들은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리 경황없는 와중에도 군터는 일단 감사인사부터 하고 봤다. 그가 장사치들에게 빌린 돈은 거금이라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작은 돈도 아니었다. 아무리 막시밀리언이 부자라 해도 그만한 돈을 선뜻 내어준다는 것은 그만큼 군터를 아낀다는 의미였다. 군터도 그것을 잘 알았다.
“감사합니다. 더욱 노력하여 섬기겠습니다.”
“그래그래. 혹여 다음부터 이런 비슷한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장사치들 말고 내게 먼저 찾아오게. 자네는 내 수족과 같은 사람이니, 내 팔다리에게 돈푼 좀 쓰는 것이 무에 그리 아깝겠나.”
군터는 감격하여 더욱 몸을 낮췄다. 막시밀리언은 껄껄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리곤 곧바로 얼굴표정을 바꿔 독촉했다.
“그건 이제 됐고, 이야기보따리 좀 풀어보라니까? 어떻게 만난 여인인가? 응?”
다시 장난꾸러기처럼 변한 막시밀리언. 그의 뜨거운 시선을 받은 군터는 난처한 얼굴로 띄엄띄엄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유리아라고 해. 아쿼러즈이고, 내 노예야. 할 일이 있으면 그녀에게 시키도록 해.”
“…….”
벨리사에게 유리아를 소개하는 자리였다. 소개를 마치고 유리아가 공손하게 허리 숙여 인사를 했다. 그런데 인사를 받는 벨리사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에 냉기까지 흘렀다.
“왜 그래?”
“…아니에요. 아무것도.”
말로는 아무것도 아니라 하지만 목소리로 보나 표정으로 보나 아무것도 아닌 게 전혀 아니었다. 군터는 벨리사가 유리아를 마음에 들지 않아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유리아. 잠시 나가 있도록.”
“예.”
벨리사의 싸늘한 반응을 느낀 것은 유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시무룩해져서 방을 나섰다.
군터는 방문을 닫아걸었다. 그리고 여전히 표정이 좋지 않은 벨리사에게 다가갔다.
“왜 그래?”
“…….”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으면 말해. 난 머리가 좋지 않아서, 말해주지 않으면 몰라.”
“…저 여자, 꼭 집에 들여야 하나요?”
“응?”
“집안일이건 뭐건, 나 혼자 다할 수 있는데……. 정말이에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녀를 폄하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녀의 매끈한 손은 척 보기에도 험한 일과는 영 거리가 멀었다. 집안일, 혹은 잡일이라는 것이 그리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병영에서 일을 하던 할렌과 유리아를 보고 진즉에 깨쳤던 군터였다.
‘왜 이러지?’
군터는 자신의 머리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최대한 머리를 굴려 왜 지금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를 추측하기 시작했다.
‘벨리사는 유리아를 집에 들이기 싫어해. 그냥 유리아가 싫어서 그런 건가? 하지만 유리아는 딱히 모난 구석은 없는데.’
“진짜에요. 저 잘할게요. 네?”
군터가 말이 없자 벨리사는 적극적으로 매달렸다. 그럼에도 군터가 별 반응이 없자 이제는 거의 울먹이는 수준으로 변했다.
군터는 이런 상황이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그가 벨리사를 그리 오래 봤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런 모습의 벨리사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불안해한다.’
그녀는 겁먹은 것처럼 보였다. 팔을 벌려 안아주자 거칠게 품속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있는 힘껏 그를 껴안았다.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그제야 군터는 그녀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유리아에게 마음을 줄까 두려워하는 거군.’
더 정확히는 그로 인해 자신이 버림받을까 걱정하는 것이다. 도무지 떨어질 생각을 않고 꽉 매달린 그녀를 보며 추측은 확신으로 굳어졌다.
“뭔가 오해하고 있어. 유리아는 그저 일을 시키는 노예일 뿐이야.”
“…….”
“유리아는 아들이 있어. 할렌이라고 하는데, 당신보다 머리 반개는 더 커. 그 녀석은 병영에서 일을 하고 있지.”
여전히 끌어안은 팔에 힘은 빠지지 않았다. 군터는 아이를 달래듯, 그녀를 쓰다듬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은 유리아보다 훨씬 더 아름다워. 사실 유리아는 보통 여인들과 비교해도 그다지 예쁘지는 않지. 맹세컨대 난 유리아에게 단 한 번도 끌려본 적이 없어. 내가 당신을 두고 유리아와 놀아날 것 같아?”
“…그런 것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거든요?”
속마음을 들킨 벨리사는 움찔했다가 바로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게 퍽 귀여워보였던지라 군터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튀어나온 입을 꾹 눌러 밀어넣었다.
“으읍! 뭐에요?”
“만져달라는 거 아니었나?”
“무슨! 당신 점점 변태처럼 변해가는 거 알아요?”
“그래? 뭐 아무튼, 걱정하지 마. 난 어디까지나 당신을 위해서 유리아를 부른 거야. 만약 당신이 정 그녀가 싫다고 한다면 다시 병영으로 돌려보내지.”
“…….”
“어때?”
“알았어요. 괜히 심술 부려서 미안해요.”
사과하는 그녀를 다시 끌어안았다. 부드러운 살 내음이 코를 간질였다.
‘생각보다 마음이 약해. 신경 써야겠군.’
이번 일로 군터는 벨리사에 대해 새로이 알았다.
그녀의 마음은 상당히 불안정했다. 사실 그녀가 살아온 날들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바라보고 의지할 곳은 자신 밖에 없었으니, 자신의 모든 행동에 그녀는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미안해요. 정말…….”
몇 번이고 같은 말을 중얼거리는 그녀.
군터는 그때마다 미안할 것 없다며 답해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답답하다고 할 때까지 계속 안고 있어 주었다.
========== 작품 후기 ==========
2018-01-05 1시 39분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