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39화 (39/1,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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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마드에 있는 동안 군터는 벨리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앞으로의 일들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우선 군터는 그녀에게 오테론으로 가야한다고 말했다. 그가 이 이야기를 꺼냈을 때 벨리사는 왜 그런 당연한 것을 말하느냐는 듯 굴었다.

“이미 알고 있던 거잖아요? 설마 나만 여기다 두고 가려고 했어요?”

사전에 이미 이야기한 내용은 맞다. 하지만 군터는 그녀가 오테론이라는 곳을 너무 쉽게 보고 있는 듯해 걱정스러웠다.

“쉽게 생각하지 마. 그곳은 사내들도 넌덜머리를 내는 곳이야. 1년 내내 뼛속까지 스미는 찬바람이 불지. 단단히 마음먹지 않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겠다고 울게 될지도 몰라.”

“그런 일은 절대로 없거든요? 걱정 붙들어 매요.”

기뻤다. 벨리사가 아무 망설임 없이 오지로 따라가겠다고 해주어서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그녀의 눈에 맑게 생기가 돌고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기뻤다. 자신과 함께 한다는 것이 그녀에게도 기쁨이 되는 듯해서. 그래서 기뻤다.

“난 잠깐 갔다 와야 할 곳이 있어. 같이 가겠나?”

“어디든지요.”

물을 것도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그가 가는 곳이라면 정말로 어디든 따라올 기세였다.

“좋아. 준비해. 말은…탈 줄 모르겠지?”

당연히 그녀는 말을 탈 줄 몰랐고, 심지어 타본 적도 없다고 했다. 천상 한 말에 두 사람이 앉아 가야 할 판이었으므로 군터는 살마드를 떠나기 전에 말 두 마리를 준비했다.

“근데 어디 가는 거에요?”

“지독한 늙은이를 만나러.”

“지독한 늙은이?”

벨리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 * *

“아프다…….”

말을 한 번도 안 타본 사람이 갑자기 며칠씩 말을 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느긋하게 유람하듯 가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속도를 내야 하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다. 비록 군터가 벨리사를 배려하여 최대한 천천히(그의 기준에서는) 간다고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벨리사는 통증을 호소했다. 특히 엉덩이와 허벅지 쪽에.

“미안해요.”

벨리사는 한껏 풀이 죽었다. 괜히 따라온다고 해서 짐만 되는가 싶어 군터의 눈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녀는 지금 뒤로 엎드린 채였다. 군터는 그녀의 허벅지와 엉덩이를 최대한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쓰라림을 덜어줄 약초가 잔뜩 묻어 있었다.

“그런 말 하지 마. 원래 그런 거다. 말을 탄다는 게 그렇게 쉽지는 않지.”

“외할머니라고 했죠? 어떤 분이에요?”

“지독하고 괴상한 늙은이지.”

“가족인데 너무 심하게 말하는 거 아니에요?”

“가족이라고 꼭 친할 필요는 없지. 그 늙은이와는 남보다도 못한 사이야.”

“에이. 그래도 가족인데…친하게 지내면 좋잖아요.”

군터는 뭐라 대꾸하려다 도로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보기에는 가족이 하나라도 남아있는 자신이 행복해보일지 모른다. 어쨌거나 그녀는 이 세상에 가족, 친구 하나 없이 혼자였으니까.

“…내가 아쿼러즈라는 말은 했었지.”

“네.”

군터는 벨리사에게 자신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그 중에는 당연히 그의 출신에 관한 것도 있었다.

“그 늙은이는 우리 부족의 무녀였어.”

무녀란 신물(神物)을 다룸으로서 신과 통하는 이를 말한다. 무녀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 무녀의 일은 여인만이 할 수 있었다.

“무녀는 대대로 일인전승이야. 당대 무녀의 명이 끊어질 때 차대의 무녀가 자리를 계승받지. 그런데 보통 무자(巫者)의 자질이라는 것은 피를 타고 이어지는 경우가 많아. 우리 부족만 봐도 대를 이어 무녀 자리를 계승한 사례가 많았지. 그 늙은이도 자기 조모의 뒤를 이어 무녀가 된 경우고.”

그래서 기대가 컸었던 것 같다. 자기가 무자의 피를 이어 무녀 자리에 오른 만큼 자기 딸도 그러리라 여겼겠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딸은 어미의 기대를 채워주지 못했다.

“내 어머니는 지극히 평범한 여인이었지. 무녀의 딸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정도로. 그 늙은이는 그게 참기 힘들었는지, 어머니를 딸 취급도 하지 않았어.”

물론 그녀의 입장에서는 그냥 방치했다고 볼 수도 있다. 특별히 괴롭히거나 한 적도 없었고, 그저 없는 사람 취급한 것이었으니.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딸은 그녀로부터 이어받은 피로 인해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 했다.

“별별 놈팡이들이 다 들러붙었지. 어머니는 평범했지만 그 몸에 흐르는 피는 그렇지 않았거든.”

초원부족에는 제국처럼 결혼이라는 풍습이 없다. 남편과 부인의 구분 없이 원한다면 관계를 맺고 아이를 낳았다. 한쪽이 원치 않는 상태서 관계가 이루어지는 경우도 허다했다.

“내 어머니에게서 딸을 얻고 싶었던 거겠지. 잘하면 차기 무녀를 딸로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가능성도 꽤 있었다. 무녀의 자리는 어차피 격세로 이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까. 그런 면에서 본다면 한 세대 차이일 뿐인 군터의 어머니는 애초부터 무녀가 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자질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 된 기억 속에서, 내 어머니는 괴로워하고 계셨어. 난 어머니가 웃는 모습을 본 기억이 전혀 없어.”

아주 어린 시절부터 증오에 익숙해졌다. 가장 먼저 배운 감정 역시 증오였다. 그는 어머니를 괴롭게 하는 모든 사내놈들을 증오했고, 머리가 조금 굵어졌을 때는 어머니를 짐승들 틈바구니에서 떨게 한 외조모를 증오했다.

“난 내 어머니를 사랑했던 만큼 그 늙은이를 미워했어.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

벨리사는 더 이상 외조모에 대해 묻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다른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계속 꺼내며 군터의 기분을 맞춰주려 했다. 그런 그녀의 노력이 눈에 보일 정도라 군터는 매일 밤 기꺼운 마음으로 붉게 달아오른 그녀의 엉덩이와 허벅지에 으깬 약초를 발라 주었다.

* * *

“저거 고, 곰 아니에요?”

“괜찮아. 늙은이가 부리는 문지기 같은 거야. 머리통을 후려쳐도 물지 않을 걸?”

여전히 초라한 오두막 앞에는 온갖 짐승들이 모여 있었다. 이전에 들렀을 때와 전혀 변한 것이 없는 모습.

군터는 어슬렁대며 길을 열어주는 짐승들을 지나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그런 그의 등에는 벨리사가 딱 달라붙어 있었다.

“흘흘. 그 처자는 누군고?”

오두막에 들어서자마자 가래 끓는 목소리가 들렸다.

“내 아내가 될 사람.”

벨리사의 얼굴이 슬쩍 붉어졌다. 군터는 그녀의 표정 변화를 보지 못한 채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노파를 보았다.

몇 년 사이에 더 추레해진 그녀는 내일 당장 숨을 멈춰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노쇠해 보였다.

“좋구나. 참 고와. 그나저나…넌 무슨 그리 흉악한 것을 묻히고 다니느냐?”

노파의 눈이 데굴데굴 굴렀다. 무언가 불안한 것을 보기라도 한 듯이.

“무슨 말이지?”

“모르는 척 하지 마라. 네가 제 발로 날 찾았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네게 붙은 흉신(凶神)의 그림자와 연관이 있겠지. 안 그러냐?”

“흉신인지 뭔지는 모르지만, 확실히 당신에게 용건이 있는 것은 맞소.”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으니 일단 자리에 앉지 그러느냐. 그쪽 아가도 편히 앉고.”

의자는 하나뿐이었다. 군터는 벨리사를 의자에 앉히고 자기는 바닥에 앉았다. 그리고 곧장 이야기를 시작했다. 얼마 전에 겪었던 사교도 마을에서의 일을.

군터는 그곳에서 겪은 모든 것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지하에 있던 사교도의 마을을 쫓은 것부터 시작해서 마을 가까이에 다가가며 느꼈던 불길함. 불가사의했던 시체들. 제단 위에서 보았던 거대한 어둠. 마지막으로 제단에서 보았던 바칼의 문장과 제단 위에 쓰러져 있던 세 명의 신관으로 보이는 시신들에 대한 것까지.

노파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 모든 이야기들을 들었다. 군터의 말이 다 끝났을 때, 그녀는 무언가 고민하듯 인상을 찌푸렸다.

“심상치 않구나. 심상치 않아. 네가 보았다는 그 어둠의 형상은 바칼이었을 것이다. 틀림없어. 너를 짓눌렀던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은 바칼이 품고 있던 편린. 너는 그의 최후를 보았고, 그 과정에서 그가 품고 있던 감정의 찌꺼기들을 느낀 것이다.”

“최후라고?”

최후라는 것은 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애초에 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불멸의 속성을 기본적으로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이 죽는다는 이야기는 그 어디에서도 들은 바 없었다.

“바칼은 본디 신이었으나, 그가 바칼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을 때부터 이미 신이 아니게 되었다.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는 검은 들소는 그 존재를 부정당하며 본래의 지위를 잃은 채 격하 되었고, 신으로서의 본질마저 희미해졌다. 난 네게서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만 해도 바칼이 이미 사라진 줄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의 몇 안 되는 신도들에 의해 존재를 부지하고 있었구나. 하지만 네 말에 따르면 그것도 끝이 났으니, 넌 신의 마지막을 본 몇 안 되는 사람이 되었다.”

“몇 안 되는?”

그 말인즉 같은 경험을 한 이가 있었다는 거다. 전에도 신의 죽음이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신은 불가해한 존재이며, 그 존재 자체가 세상을 지탱하는 축이다. 하지만 고래로부터 세상을 바뀌는 축은 새로 생기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했다. 근거할 수 있는 바탕을 잃은 신은 힘을 잃고 세계에 녹아든다. 일전에 제국의 군주(軍主)가 바칼에게 그러했듯이.”

“군주? 일개 인간이 신을 몰아냈다는 말인가?”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이제껏 군터는 인간이 신을 몰아낸다는 건 신화나 전설 같은 것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제국의 군주라는 정확한 지칭은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신빙성을 부여하지 않는가.

“내 어머니의 어머니가 아직 어렸을 적의 일이다. 황제의 명을 받은 제국의 군주가 군대를 이끌고 바크렌에 왔었지. 강대한 제국군에 맞서기 위해 당시 바크렌을 다스리던 왕은 그들이 섬기던 신의 힘을 빌렸다.”

신의 힘은 강력했다. 이전까지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던 왕국의 군대는 신의 힘으로 제국군에 맞서 싸웠다. 제국군은 고전했고 전황은 고착되어 갔다.

“그러자 제국의 군주가 나섰다. 그는 강력한 술법(術法)을 부려 왕국에 힘을 빌려주던 신에게 강제로 이름을 부여했지.”

살라스에게도 얼핏 들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름을 부여한다는 것이 그렇게 큰 의미인가?”

“신에게 이름을 부여한다는 것은 그 격을 끌어내리는 행위다. 신으로서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지. 이는 굉장히 강력한 술법이며, 저주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아무나 할 수 없고, 한다 해도 저주의 대상이 강력하다면 도리어 술자가 화를 입기 쉽다.”

“하지만 성공했군.”

“그래.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는 모르지만, 제국의 군주는 기어이 신을 끌어내렸다. 존재를 부정당한 신은 힘을 잃었고, 자연히 그에게서 힘을 받던 왕국의 군대도 덩달아 힘을 잃었다. 그 뒤로는 너도 잘 알고 있겠지. 제국의 군인이라면 말이다.”

“음.”

왕국은 멸망했고, 왕가는 씨 몰살을 당했다. 제국의 군주는 옛 왕국의 도성을 무너뜨리고 그 위에 살마드라는 이름의 새 도시를 세웠다.

“하지만 여전히 믿기지 않는군. 어떻게 일개 인간이 신을 거꾸러뜨릴 수 있지?”

만약 사교도의 마을에서 보았던 것이 정말로 바칼이었다면, 더더욱 그 이야기를 믿을 수 없었다. 힘을 잃고 몰락했다지만, 그런 바칼의 앞에서 군터는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겨웠다. 그만큼 그때 보았던 어둠의 형상은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재앙 그 자체였다.

“모른다. 그 이전까지 전해들은 신들의 몰락은 서로의 다툼에 의한 것이었지, 인간이 개입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고 보면 제국의 여섯 군주에 대한 말들은 대부분 허황된 것들이 많았다. 하나 같이 믿기 힘든, 멀쩡한 정신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날들이 거의 없는 술주정뱅이들이나 주절거릴 것 같은 이야기들.

하지만 지금 이 이야기를 들으니 그 거짓말 같은 말들이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그건 그렇다 치지. 그런데 바칼은 왜 죽은 거지? 몰락하고서도 계속 살아있지 않았나.”

“살아있었다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 그저 축으로서 존재할 뿐이지. 글쎄, 그가 왜 최후를 맞이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옛날 제국의 군주가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 그의 존재를 뒤흔들었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을 수도 있지. 한 번 신격을 잃은 신은 온갖 것들에 위협을 받을 수 있다.”

이래서야 의문을 풀러 왔다가 오히려 더한 의문만을 안게 된 셈이다.

“머리만 아프군. 그럼 날 보자마자 했던 이야기는 뭐지? 흉신의 그림자라고? 그런 게 내게 붙어있나?”

“모든 생명은 최후의 순간에 가장 강렬하게 빛을 내지. 작은 벌레도 그렇고, 인간도 역시 그렇다. 하물며 몰락했다고는 하나 신의 마지막이었다면 말할 것도 없느니.”

노파가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가볍게 던졌다. 군터는 그것을 받아 확인하고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건…….”

그것은 자그마한 돌이었다. 딱히 특별해 보이지 않는 돌의 표면에는 자그마한 문양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난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무녀의 대가 끊기니 신물(神物)도 새로운 주인을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

“…….”

“숨결만이 남은 것이나 몰락한 신의 그림자로부터 지켜주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군터는 다소 복잡한 심정으로 노파를 보았다.

그저 밉기만 하고, 아직까지도 용서가 안 되는 노인이었지만 스스로 마지막을 말하며 초연한 모습을 보이니 왠지 모르게 숙연해졌다.

마지막으로 오두막을 나서기 전. 군터는 슬쩍 노파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그녀는 등을 보이고 있었다. 고요한 실내엔 흔들의자가 내는 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군터는 잠시 노파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말없이 오두막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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