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38화 (38/1,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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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칠게 내달리던 말발굽이 멈췄다. 살마드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서였다.

짙은 눈구름을 머리 위에 얹고 있는 살마드가 보인다. 넓은 도시 위로 하얀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내린지 꽤 되었는지 도시 전체가 이미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살마드에도 눈이 내리는군요.”

프레드릭이 허연 입김을 뿜으며 말했다.

오테론에서야 종종 내리는 게 눈이라지만 살마드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초원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이 미치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자연히 눈은 보기 드물었다. 특히 지금 내리는 것 같은 함박눈은 더더욱.

“대장님.”

“응?”

“뭐 좋은 일 있으십니까?”

“왜? 그렇게 보이나?”

“아니, 뭐랄까…그, 선물 받기 전의 어린애 같은 표정이셔서 말입니다. 대장님도 그런 표정을 지을 줄 아셨습니까?”

프레드릭은 말을 하고서도 또 돌덩이 같은 주먹이 머리통을 쥐어박을까 싶었는지 혼자서 움찔거렸다. 그러나 그의 머리에 뜨끈한 혹이 달리는 일은 없었다. 애당초 말과 말의 거리라는 것이 주먹이 닿을 정도로 가까울 리가 없지 않은가. 하도 헛소리를 할 때마다 머리통에 혹 나는 게 일상이 되었다 보니 이제는 자동적으로 반응하게 된 그였다.

“글쎄. 나도 지금 내 기분이 영 낯설다.”

“예?”

“아니. 아무 것도 아니다. 어서 가자.”

표정만큼이나 들뜬 목소리였다.

* * *

살마드에 도착한 후. 군터는 숙소에 짐을 풀기도 전에 말을 탄 채로 곧장 벨리사가 일하는 주점으로 향했다.

가는 길은 익숙했다. 1년 동안 꿈속에서 몇 번씩이나 거닐었던 길이기 때문이다. 과장 좀 보태자면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을 정도였다.

“어서 오십시오.”

아직은 이른 시간이고, 눈이 내려 입에서 입김이 펄펄 날 정도로 추운 날씨임에도 종업원이 가게 앞에 나와 있었다.

‘전에는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낯선 광경이었지만 어쨌거나 군터는 그에게 타고 온 말의 고삐를 건넸다.

“잠시 부탁하지.”

평소 같았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일이었다. 다른 이에게 자신의 말을 맡기는 일은 그가 가장 기피하는 일 중 하나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도 아무렇지 않게 넘길 만큼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었다.

“혼자 오셨습니까?”

변하지 않은 분위기였다. 군터는 살짝 감회에 잠겨 실내를 가볍게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벨리사는 어디에 있지?”

“예?”

느닷없는 물음에 잠깐 당황하던 종업원은 곧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벨리사는 어째서 찾으시는지…….”

“지금 여기에 있지? 군터가 찾아왔다고만 전해주게.”

“으음. 알겠습니다.”무언가 안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기라도 한 것인지, 종업원은 살짝 굳은 얼굴로 어디론가 향했다. 그리고 잠시 후, 조금 기다리고 있으니 그토록 그리던 여인이 나타났다.

“오랜…만이네요.”

“그래.”

직접 얼굴을 본 것은 1년만이지만, 이야기는 자주 나눴었다. 종이에 적힌 그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군터의 수하들 몇이 며칠 동안 말을 달려야 했지만, 덕분에 1년만에 만나서도 서로의 근황 같은 것은 굳이 물을 필요도 없었다.

“오래 기다렸다. 이제 됐으니…가자.”

“…….”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녀는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 듯했다. 많이 놀라고, 또 조금은 감동한 것 같기도 했다. 보고 싶은 대로 보였을 뿐인, 그만의 착각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정말 저를 데려가려고 오신 건가요?”

“왜 그런 걸 묻지? 지난 1년 동안 충분히 이야기하지 않았나?”벨리사는 여전히 멍한, 전보다 야윈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군터는 벨리사와 함께 주점의 빈자리에 가 앉았다. 급히 할 말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기다렸을 뿐이다. 어차피 이야기를 들은 종업원이 쪼르르 달려가 고해바쳤을 테니까 말이다.

“으음. 손님.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종업원과 함께 척 보기에도 뺀질뺀질해 보이는 중년인이 걸어왔다. 그는 고개 숙인 벨리사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군터의 얼굴과 그의 가슴께에 달린 백인장의 휘장을 번갈아 보았다.

“오테론 소속 막시밀리언 천인대의 백부장, 군터다. 벨리사는 나와 함께 오테론으로 가기로 했네.”

“으음. 그건 좀 곤란한 말씀입니다만…….”

“곤란하다? 어째서? 당신은 벨리사의 면전에서 너 같은 가녀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고 하지 않았나? 이제와 마음이 바뀌기라도 한 건가?”

벨리사의 얼굴이 1년 전보다 야윈 이유가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두 달 전. 그녀를 가녀로서 무대에 설 수 있게 해주었던 이 주점의 주인이 숨을 거둔 것이다. 그 뒤를 이은 그의 장남이 바로 눈앞의 재수 없게 생긴 중년인이었다. 그는 그의 아비와는 달리, 손님들에게 인기를 끌지 못하는 벨리사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듣기로는 그녀에게 수작질을 부리려 한 적도 있다고 했다. 만약 군터가 로크에게 일러 따로 벨리사를 부탁하지 않았더라면 일을 치렀을지도 모른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군터는 살심이 치밀었다. 만약 그 당시 그가 오테론이 아니라 살마드에 있었다면 칼춤을 췄을지도 몰랐다. 시일이 지났지만,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노기가 치솟는 그였다. 지금 언성을 높이지 않고 이 쓰레기 같은 작자와 마주하고 있는 것도 그로서는 상당한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하하. 조금 오해를 하고 계시군요. 벨리사는 저희 가게의 중요한 가녀입니다. 당장 오늘도 노래를 불러야 하고, 그녀의 뒤를 이을 가녀도 따로 준비하지 못했는데 갑작스레 일을 관둬버리면 저희가 곤란해진다는 말이지요.”

“흥! 입에 발린 소리는 그쯤 해두지. 벨리사는 노예가 아니다. 그녀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고 싶은 곳에 있을 수 있는 자유가 있지.”

“그렇게 말씀하셔도…저희로서는 곤란합니다만.”

군터는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저 얼굴에 주먹을 꽂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아냈다. 지금 여기서 성질을 부리는 것은 쉽지만, 그랬다가는 벨리사를 데려가는 일에 정말로 차질이 생길지도 모른다. 지금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오직 벨리사를 오테론으로 데려가는 것뿐이었다.

“쓸데없는 말싸움은 더 이상 하지 않겠다. 벨리사는 나와 함께 오테론으로 떠난다.”

탁!

말을 마치면서 군터는 주머니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목에 힘 좀 주고 다니는 자들이 이곳을 드나드는 것을 알고 있다. 덕분에 주인장의 목에도 힘이 들어갔다고 이해하지. 하지만 여기서 더 바란다면 나도 내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군.”

바짝 날이 선 목소리에 스산한 살기가 감돌았다. 꿀꺽 하는 소리와 함께 사내의 목젖이 크게 요동쳤다.

“기다리지 않겠다. 나는 벨리사와 함께 떠날 것이고,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않아. 그러니 지금 답해라. 우리가 이대로 떠나도 되는 거겠지?”

“으음…….”

군터의 살기 어린 눈빛이 더욱 강렬해지자, 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아, 알겠습니다. 그리 하시지요.”그의 대답이 떨어진 순간. 군터는 벨리사의 손을 잡았다.

“가자.”

더 이상 조금도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군터는 아직까지도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벨리사의 손을 잡아끌었다.

“아. 따로 챙길 짐은 있나?”

“네? 네…조금.”

“알았다. 조금 있다가 부하들을 시켜 가져오게 하지.”

건물 밖으로 나오고, 군터는 힘겹게 첫 한 마디를 꺼냈다.

“기다려줘서 고맙다.”

“저는…….”

우물거리던 벨리사가 입을 떼려던 찰나.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 두 팔로 등을 감싸고, 그녀의 머리를 가슴에 끌어당겼다.

“아무 말도 하지 마라. 이야기는…앞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지금은 그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이렇게 있고 싶었다. 벨리사를 품에 안은 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다. 그녀가 품 안에 있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

죽은 듯 가만히 있던 그녀가 팔을 들어 군터의 허리를 감쌌다.

그 순간, 지난 1년간의 모든 노력은 비로소 보상받았다.

* * *

부하들을 시켜 가져온 벨리사의 짐은 생각보다 너무 별 거 없었다. 척 보기에도 상당히 나이를 먹었을 것 같은 옷가지 몇 벌이 짐의 전부였다.

군터가 며칠 동안 머물게 된 숙소에서, 그들은 한 침대에 누웠다.

“…….”

군터는 품에 안긴 벨리사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할 수만 있다면 더 일찍 오고 싶었다. 탈영을 해서라도 오고 싶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어.”

“…….”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그리고, 기다려줘서 고맙다.”

몇 번 입술을 달싹이던 벨리사가 작게 목소리를 냈다.

“난…당신을 기다린 게 아니에요.”

“응?”

“그냥…살았던 거죠. 죽을 용기는 없었으니까.”

그녀는 멍한 얼굴로 천장을 보고 있었다.

“묻고 싶었어요. 왜 저였죠? 세상에 여자는 많아요. 당신은 저를 오래 안 것도 아니고, 무슨 대단한 인연이었던 것도 아니잖아요?”

“너에겐 그랬을지 몰라도, 내겐 대단한 인연이었다.”

“사실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요.”

“편지를 주고 받았었지 않나.”

“글을 보는 것과 얼굴을 직접 보는 것과는 다르죠. 너무 급작스럽고…그래서 당황스러워요.”

“…그래서 싫은가?”

“아뇨. 그건…아니에요.”

“그럼 됐어. 곧 익숙해질 거다. 앞으로는…….”

“당신이 기다려달라고 했을 때는…기뻤어요. 당신이 1년 뒤 날 찾아줄지와는 상관없이, 그냥 그런 말을 해준다는 것 자체가 기뻤죠. 난…….”

“지난 이야기는 이제 필요 없어. 앞으로만 생각하면 된다.”

벨리사의 머리에 대줬던 팔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 끌어안았다.

“내 지난 1년은 괴로웠다. 하지만 지금은 내 인생의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행복해. 너 역시 그러길 바란다. 우리는 앞으로 계속 함께할 거고, 계속 행복할 거다.”

“…….”

벨리사는 말이 없었다.

그녀의 눈에서 투명한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군터는 흘러내리는 그것을 조심스레 뻗은 손가락으로 훔쳤다.

눈물을 닦은 큼직한 손가락을 보며 벨리사가 베시시 웃자, 그 역시 희미하게 따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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