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흉조 -->
“으, 으윽!”
눈을 떴다. 아니, 뜨였다. 어깨를 흔들어대는 억센 손길에 머리가 울렸다.
“대장님! 정신이 드십니까?”
“…죽지 않은 건가?”
“죽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살라스……?”
흐릿한 초점이 잡히자 죽어라고 어깨를 흔들어대는 게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예. 접니다. 어떻게 되신 겁니까? 갑자기…….”
“어떻게 되다니. 넌…….”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본 것이 떠올랐다. 그 끔찍한 존재. 도저히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볼 수 없는, 뭐라 표현해야 할지도 막막한 어둠.
“넌 그걸 못 본거냐?”
“그거…라니,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대장님께서는 저 제단 앞쪽에서 갑자기 멈추셔서는 그대로 쓰러지셨습니다.”
“뭐라고?”
무슨 헛소리를 하나 싶어 다른 병사들을 보았다. 하지만 그들 역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말도 안 돼.’
그렇게 거대하고, 끔찍한 것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고? 게다가 그냥 멍하니 서 있다가 쓰러져? 모든 것이 기억과 맞지 않았다. 왜냐하면 마지막 순간에 그는, 분명히 밀려드는 어둠을 향해 창검을 내질렀기 때문이다.
‘그래. 분명히.’
옆에 놓여 있는 창검을 잡았다. 이 익숙한 감촉과 일체감. 틀림없다. 틀림없이 이 녀석으로 그것에 저항했었다.
‘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군. 한바탕 악몽을 꾼 것 같아.’
그것도 이 이상 끔찍할 수 없는 지독한 악몽을.
“괜찮으십니까?”
“그래. 괜찮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나도 모르겠군.”
본 것을 그대로 이야기한들 믿지도 않을 것이다. 미친 놈 취급이나 안 당하면 다행이겠지. 그러느니 차라리 대충 얼버무리기로 했다.
“그나저나…저 제단은 뭐지?”
“음. 글쎄요. 한 번 봐야 알겠습니다마는…범상한 것은 아닌 듯싶습니다.”
저 제단. 그 어둠의 존재는 제단 위에 있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고, 알 수 없는 불길한 소리를 내며 덤벼들었었지.
‘으윽!’
그 존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흐르고 손이 가늘게 떨렸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 어둠이 불러일으킨 공포는 아직까지도 남아 들끓고 있었다.
* * *
살라스는 군터의 명을 받고 제단을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다른 병사들은 마을의 모든 건물을 뒤지며 수색작업을 계속했다.
“흐음.”
처음엔 제단 위를 살피던 살라스는 이제 제단의 벽면을 둘러가며 보고 있었다.
“뭐 좀 알아낸 게 있나.”
“예. 아마도 이 제단은…바칼의 제단인 것 같습니다.”
“바칼?”
생소한 단어다. 말하는 투로 보아 명사인 것 같지만, 군터는 이제껏 바칼이라는 명칭은 한 번 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예. 아마 들어보신 적이 없을 겁니다. 이 이름은…꽤 오래 전에 잊혔으니까요. 바크렌의 토착민들에게조차도.”
살라스가 벽에서 손을 떼며 굽혔던 몸을 폈다. 그리고 보라는 듯, 벽면 한 쪽을 가리켰다.
“이 문양이 바로 바칼의 문양입니다. 저도 어릴 적 읽었던 고서에서 한 밖에 본 적이 없는데, 설명하는 구절이 인상 깊어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문양 같은 건 됐다. 바칼이라는 건 뭐지?”
“바칼은 신의 이름입니다. 물론 이제 와서는 악마니, 사귀 같은 취급을 받고 있지만 제국이 바크렌을 지배하기 전까지만 해도 바칼은 바크렌의 토착신으로 숭배 받았었습니다. 눈치 채셨는지 모르겠지만, 바크렌이라는 명칭도 본래는 바칼의 이름에서 딴 것입니다. 물론 그 이름을 지은 것은 제국이지만요.”
“제국이? 어째서?”
말만 들으면 왜 그런 일을 했나 싶었다. 제국이 이 땅을 지배한 이후로 바칼이 악마니 사귀 같은 것으로 몰렸다면, 굳이 지방의 이름을 바칼에게서 딸 이유가 없지 않은가.
“실은 바칼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제국입니다. 본래 바칼에게는 이름이 없었습니다. 저도 잘은 모릅니다만, 신에게는 이름 같은 것이 필요 없다는군요. 이름이라는 것은 인간에게만 필요한 것이고, 인간은 감히 신을 부를 수 없기 때문에 이름 역시 알지 못하고 알아서도 안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국은 바크렌의 토착신에게 바칼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죠.”
“이름을 붙임으로서 바칼을 격하시켰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어쨌든 제국이 바칼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이 땅에 바크렌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좋아. 그래서?”
“이 제단. 그리고 이리도 은밀한 곳에 주거지를 마련해놓고 조직적으로 움직인다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이들, 그러니까 여기에 있던 이들은 바칼을 섬기는 사교도 집단이 분명합니다.”
사교도라.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확실히 이곳이 사교도들의 마을이라면 이 상황이 설명 가능했다. 제국은 절대 사교도를 용납하지 않으니, 사신(邪神)을 믿는 이들은 이런 깊숙한 구멍 속에 숨어 사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녀석들은 이곳에 숨어 살면서 약탈로 연명했다는 말인가?”
“도적떼와 다를 바 없지만, 더 치밀하고 더 악랄하지요. 목적 없이 욕망에만 충실한 도적들과는 달리 사교도들은 신앙이라는 궁극적인 목표이며 절대적인 가치를 위해 일을 행하니까요. 아마 도시에 풀어놓은 첩자로부터 연락을 받고 상단을 덮쳤겠지요.”
“여기 뭔가 쌓여 있습니다! 상단으로부터 약탈한 물건인 것 같습니다!”
멀리서 부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군터는 그 소리는 무시한 채 계속해서 물었다.
“좋아. 그렇다면 여기에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은 뭐지?”
방금 전에 죽은 것처럼 멀쩡한 시체들. 그것들은 지금 당장 눈을 뜨고 일어나도 놀랍지 않을 만큼 멀쩡했다. 숨을 쉬지 않고 몸이 차갑다는 것을 빼면 정말로 살아있는 것 같았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궁금하군요. 이들이 왜 다 죽어 있는지. 그리고…….”
군터와 살라스의 시선이 동시에 움직였다.
제단 위. 제물을 바치는 받침대 같은 것의 앞에 세 구의 시체가 엉켜 쓰러져 있었다. 그들 모두 검은 색의 사제복 같은 것을 입고 있었다. 아마 저들이야말로 이 사교도 마을을 이끄는 신관들이었을 터.
“바칼에게 기도라도 했나 보군요.”
“…….”
아마 살라스는 그냥 던진 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군터는 그 툭 던진 한 마디를 그냥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살라스가 제단을 내려간 뒤에도 한참 동안이나 그 세구의 시체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 * *
“흐음. 그래…그렇군. 허! 사교도라니, 그것도 참 오랜만에 듣는데.”
오테론으로 돌아온 군터는 막시밀리언에게 보고했다. 사교도의 마을에서 되찾은 상단의 물건들을 고스란히 가져왔을 때부터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던 막시밀리언은 보고 내용에서 사교도가 언급되자 감탄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를 내었다.
“세상이 흉흉하니 별것들이 다 나와 설치는군. 그나저나 사교도들이 다 죽어 있었다니? 자네가 그 악독한 것들을 다 처리해놓고서 시치미를 떼는 것은 아닌가?”
“아닙니다. 정말로…….”
“그래, 그래. 알겠네. 뭐 사교도란 것들이 워낙에 사특하고 이해 못할 족속들이니까. 어느 날 갑자기 계시를 받아서 단체로 자살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아무튼 수고했네. 기대 이상의 성과야.”
사실 막시밀리언에게 있어 사교도라는 것들이 자살을 했는지, 군터의 손에 다 목이 베였는지는 그다지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는 오직 살마드에 있는 귀찮은 관리에게 어깨 펴고 할 말이 생겼다는 것과, 사교도들이 약탈한 상단의 물건들이 고스란히 수중에 들어왔다는 것에만 신경이 쓰였다.
“이것은 오롯이 자네의 공이라 봐도 무방하네.”
탁!
탁자 위에 묵직한 주머니가 올라왔다. 군터의 눈에 동요가 일었다. 그 일렁임을 본 막시밀리언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자네도 이제는 완전히 돈 맛을 안 것인가? 요 근래 들어 무리에 가까울 정도로 임무를 맡더니만. 돈이 그리 좋은가? 하긴, 돈 맛이라는 것이 한 번 맛보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지. 하지만 조심하게. 돈만큼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것도 없지만, 또 돈만큼 사람을 쉽게 망쳐놓는 것도 없으니.”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이만 나가보게. 고생했으니 푹 쉬어야지.”
“예.”
군터는 군례를 올리고 막사를 나섰다. 그리고 막사를 나오자마자 왈칵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이를 갈았다.
‘젠장!’
막시밀리언은 농담 식으로 말했지만, 군터는 그 가벼운 농담에도 지독한 수치심을 느꼈다. 아마 막시밀리언은 이제 그를 속물로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 마디 반박조차 못했다. 왜냐하면 실제로 요 근래에 그가 무리를 했던 것은, 조금 전에 돈주머니를 보고 반색했던 것은 모두 돈 때문임이 맞았기 때문이다.
“…….”
거칠게 옷 앞섬을 헤집고 손을 집어넣었다. 딱딱한 목걸이가 손에 잡혔다. 그 차가운 감촉이 손에 닿자 일그러졌던 얼굴이 다시 평온을 찾았다.
‘벨리사…….’
약 1년 전.
서툴게 뱉은 고백에 대한 답은 이틀이 지나고 다시 만나서도 받을 수 없었다. 그때까지도 그녀는 망설이고 있었다. 확신이 없어 보였다. 답을 달라 다그치고 싶었지만 군터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그는 떠나기 전까지 매일 그녀의 노래를 들으며 술을 마셨다. 처음에 벨리사는 다소 부담스러워 하는 듯했지만 군터가 아무런 해코지나, 심지어 합석을 요구하지도 않고 조용히 자리만 지키다 물러나니 벨리사도 염려를 덜었는지 차츰 마음을 열었다.
군터가 살마드를 떠나기 전까지, 그들은 매일 이야기를 나눴다. 손님과 가녀로서가 아니라 가게 밖에서도 만남을 가졌다. 오테론으로 돌아가기 전까지의 한정된 짧은 시간 동안, 그들은 어색하고 서툴지만 빠르게 서로에 대해 알아갔다.
그리고 살마드를 떠나기 전날 밤. 마지막으로 그녀를 보았을 때 벨리사는 마침내 기다리던 답을 내주었다.
“좋아요.”
맹세컨대, 스물이 갓 넘었을 뿐인 사내가 살아온 시간이 결코 길지는 않았지만 그 살아온 모든 날들을 통틀어 가장 기쁜 한 순간이었다.
“그럼 저는…당신을 따라가야 하나요?”
“아니.”
“그래”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욕심이었다. 그녀를 맞이하기에는 너무 일렀다. 그는 아직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이는 로크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하게 된 생각이었다. 그는 백인장이지만, 이제 갓 백인장이 된 풋내기에 불과했다. 당연히 벌어놓은 돈 따위 있을 리도 없고, 있어도 살마드에 와 기분을 내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런 상황에서 무작정 여자를, 그것도 사내들도 괴로워하는 북쪽의 찬 도시로 데려간다? 도망이나 치지 않으면 다행이다.
“아니. 지금은 아니야. 준비가 되면…그때 돌아올 거야.”
“네?”
벨리사는 당황한 듯했다. 거의 군터가 마음을 고백했을 때와 비슷한 정도의 반응이었다. 자기만 승낙하면 바로 데리고 갈 줄 안 것 같았다. 왠지 멋쩍어져, 군터는 변명하듯 재빨리 말을 했다.
“금방이야. 사실 내가 백인장이 된 지 얼마 안 돼서…….”
그는 그녀에게 1년의 기다림을 부탁했다. 당황했는지, 어처구니가 없었던지 잠시 침묵하던 그녀는 희미하게 웃으며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주었다.
수수하기 그지없는 싸구려 목걸이였다. 튼튼하게 생겼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눈에 띄지 않는.
그녀는 그것을 건네주며 알겠다고 했다. 그것은 그가 어렵게 꺼낸 고백에 대한 수락이자 긴 기다림에 대한 승낙이었다.
‘얼마 안 남았다. 이제 곧…….’
품에 넣어둔 주머니의 묵직함이 느껴졌다.
이제 곧 1년이다. 살마드로 돌아가 그녀를 다시 보게 되면, 그때는 홀로 떠나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