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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34화 (34/1,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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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크와 만나 한 잔 하던 중이었다.

“뭔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고 있냐?”

“응?”

“아니. 정신이 다른 데 가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그래?”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거냐?”

안 좋은 일이라…….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다. 우려했던 것과 달리 일찌감치 병사들도 다 모았고, 거기에 더해 착실히 훈련까지 시키는 중이다. 목표했던 것을 초과 달성한 셈이니 일이 있어도 좋은 일이 있다고 봐야 했다.

모든 일이 다 순조롭다. 상념에 잠긴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유는 로크가 의심하는 것과는 정반대였다.

“그런 일 없다.”

“아닌 척 하기는. 어디 거울 있으면 가서 좀 봐라. 가뜩이나 못 생긴 얼굴이 완전 못 봐줄 정도라니까.”

“그렇게도 내 주먹맛이 그리웠으면 진즉 말하지 그랬냐. 그랬으면 네 얼굴도 내 얼굴처럼 만들어줬을 텐데.”

“아이고. 그것만은 좀 봐줘라. 아니, 그나저나 진짜로 무슨 일인데? 나한테 말하기 어려운 일이냐?”

“정말 그런 거 아니다.”

“그럼 뭔데?”

대꾸 없이 잔을 들었다. 가득 찬 술을 한 입에 털어 넣었다.

“…….”

말하기 어려운 일이냐고? 그렇지는 않다. 로크와 그는 서로 속에 있는 모든 말을 다 터놓고 할 수 있는 사이였으니까. 어떤 일이라도 다 이야기할 수 있다.

다만, 그럼에도 머뭇거리게 되는 것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스스로 낯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마치 숫기 없는 소년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얼마 전에, 알게 된 여자가 있는데.”

몇 번이나 머뭇대다가 간신히 입을 떼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에 아무 생각 없이, 그저 호기로 번듯해 보이는 주점을 찾아갔던 일. 거기서 만난 한 여인.

처음에는 그저 목소리와 노래가 좋아 몇 번 찾아갔을 뿐이었지만, 어느새 부터인가 그녀와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게 되었던 것. 그리고 이제는 시도 때도 없이 그녀가 머릿속에 떠오른다는 것까지. 근래에 겪은 모든 일을 다 이야기했다.

로크는 가만히, 진지하게 그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평소 같았으면 짓궂은 농담 몇 마디라도 섞었을 테지만 어렵사리 이야기를 이어가는 군터가 굉장히 진지한 기색이었기에 그도 시답잖은 농 따위는 집우고 친구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하! 이 자식. 날 거기 데리고 간 이유가 있었구만?”

그리고 마침내 짧지만 긴 이야기가 끝났을 때. 로크는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런 건 아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나저나 드디어 너한테도 이런 때가 오는구나. 영원히 안 올 줄 알았는데 결국 오기는 왔어. 참 늦기도 하다.”

“놀리는 거냐?”

“놀리다니? 난 그냥 축하하고 싶을 뿐이야. 드디어 너도 사내가 되는구나 싶어서.”

“지금까지는 내가 사내가 아니었단 말이냐?”

“여자를 알아야 사내지. 아! 여기서 말하는 여자는 그냥 여자 말고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여자를 말하는 거야.”

“농담할 기분 아니다.”

“나도 농담 아니야. 그나저나 뭐가 문제야? 지금 네 감정이 뭔지는 어차피 너도 잘 알잖아?”

“…….”

“모른 척 하는 거냐? 임마, 너 그 여자한테 빠진 거야. 눈 돌아간 거라고. 반한 거지. 낯간지러운 말로 하자면, 사랑 아니냐. 사랑.”

로크의 표현을 빌자면, 그 낯간지러운 단어를 듣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애써 외면하면서 아니라고 부정하던 진실과 강제로 마주하고 말았다.

“축하한다. 첫사랑 아니냐? 네가 나 모르게 마을의 못난이들하고 눈이 맞지 않았다면 말이야.”

술병과 잔을 오가는 손길이 분주해졌다. 연거푸 두 잔을 털어 넣었다.

후끈거렸다. 속도, 얼굴도.

“그래서 어떻게 하려고?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거 맞지? 노래 부르는 건 알겠는데, 뭐 정확히 어떤 여자야?”

“어떤 여자긴. 노래 부르는 여자지.”

“…설마 그게 전부냐? 제법 이야기 많이 했다며? 그동안 그런 것도 안 물어보고 대체 뭐했어?”

“난 그냥…….”

그간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떠올려보면, 대체로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많이 했었던 것 같다. 그냥 가볍게 꺼내고 주워 담을 수 있고, 웃을 수 있는 이야기들. 그랬기에 그녀와 대화를 할 때면 서로 인상을 찌푸릴 일이 하나도 없었다.

“대책이 없구만. 그래서 뭐야? 그냥 한 번 자보고 싶은 거야?”

“그런 거 아니다.”

반사적으로 튀어나간 말은 사뭇 사나웠다. 여차하면 욕이나 주먹이라도 튀어나갈 기세였다. 순간적으로 주먹에 힘이 들어가기도 했다.

‘이거이거 빠져도 아주 단단히 빠졌구만.’

로크는 제법 사나운 친구의 표정을 보고 찔끔했다. 여기서 괜히 짓궂은 농을 던졌다가는 정말로 한 대 얻어맞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시원하게 욕이나 먹던가.

“좋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 이거지? 결혼?”

“…모르겠다.”

“하긴, 우리끼리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웃기긴 하지. 정작 당사자인 그 아가씨의 마음이 어떤지 전혀 모르는데 말이야. 막말로 공짜 술이랑 음식이나 얻어먹으려고 네 테이블에 앉은 걸지도 모르잖아?”

“…….”

군터는 또 다시 욱한 기색이었지만 로크는 그를 골리기 위해 한 말이 아니었다. 군터도 진지한 로크의 표정을 보고는 금방 냉정을 찾았다. 분노가 어렸던 얼굴에는 약간의 무기력함과 실망이 들어섰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얌마.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처질 건 또 뭐야? 아직 아무것도 확실한 건 없다고. 내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 아가씨도 너한테 마음이 있을지도 몰라.”

“그럴지도 모르지.”여전히 목소리는 밝지 않다. 로크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치며 말했다.

“너 내가 알던 내 친구 군터 맞냐? 뭘 그렇게 등신 같이 구는 건데? 뭐 네 얼굴이 남부럽지 않게 험상궂게 생겨먹기는 했지만, 그래도 넌 백부장이잖아? 반면에 그 여자는 먹고 살 길이 막혀 술집에서 노래 부르는 처지고.”

“욕을 하는 거냐, 위로를 하는 거냐. 하나만 확실히 해라.”

“너나 확실히 해라. 너 곧 떠나야 하잖아? 마음이 있으면 확실하게 그 아가씨한테 이야기를 하라고. 등신 같이 혼자서 끙끙대지만 말고 말이야.”

군터는 로크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확신이 서지 않았다. 용기가 없다는 게 아니라, 벨리사에 대한 그의 마음이 단순히 가벼운 흥미인지 정말로 깊은 마음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로크의 말처럼, 이제껏 진지하게 사랑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이성에게 갖는 진지한 사랑이라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다.

“너 내가 멜리 좋아했던 거 알지?”

“왜 모르겠냐.”

멜리는 꽤나 오랫동안 로크가 마음에 품었던 여자다. 그들보다 한 살이 더 많았는데, 로크는 그녀를 3년이 넘게 마음에 품었었지만 지금 그녀는 같은 마을의 네 살 많은 사내와 결혼하여 애까지 낳았다. 그녀가 결혼하던 날에 로크가 얼마나 술을 들이켰는지는 술상대를 해준 군터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나처럼 되기 싫으면 되도록 빠르게, 확실히 하는 게 좋아. 지금 네 마음이 정말로 진지하다고 해도, 그걸 너무 늦게 확인하게 되면 그때 그 여자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거든.”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뭐…그런 여자는 아니라고는 하지만, 술집에서 노래를 파는 것도 그렇게 떳떳한 직업은 아니잖아? 그 술집 주인이 제법 잘 대해주기는 하는 모양이지만, 생긴 것도 반반한 여자면 지저분하게 들이대는 놈들도 꽤 있을 거란 말이지.”

“…….”

“뭐, 안 좋은 말을 하려는 건 아니야. 나야 네가 잘 되길 바라지. 하지만 답답하게 굴면 될 일도 안 된다.”

“하아. 그래. 무슨 말인지 안다. 하지만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어.”

“그렇겠지. 그러니까 빨리 알아봐. 네 마음이 어떤지.”

“……”

로크가 가슴 한복판을 쿡쿡 찔렀다.

“어떻게 되건, 나처럼은 되지 마라.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하나뿐인 충고고 조언이다. 나 같은 놈이 제일 등신이라고. 알지?”

“물론. 잘 알지.”

“…말이라도 아니라고 해주면 안 되는 거였냐?”

“킥! 이제 지저분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마시자.”

“그래. 마시자. 마시는 게 남는 거다. 제기랄.”

정말 뒤늦게 찾아온, 아니. 찾아온 것일지도 모를 군터의 첫사랑을 기념하며 둘은 세상이 빙빙 돌 때까지 죽어라고 술을 부었다. 결국 인사불성이 된 로크가 먼저 쓰러지고, 홀로 남은 군터도 쓰러질 때까지 무식하게 술을 푸다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 * *

어느덧 시간이 흘러 오테론으로 돌아가야 하는 날이 왔다.

출발 전날. 군터는 로크와의 술자리 이후에는 조금 뜸하게 들렀던 술집을 다시 찾았다. 오늘도 벨리사는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군터의 테이블로 왔다.

“왔어요?”

근 닷새 만에 본 벨리사는 여전했다. 싱그럽게 웃는 낯으로 그를 맞았다. 어제 왔던 이를 오늘 또 보듯이. 며칠 동안 왜 안 왔었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좀처럼 질문을 하는 법이 없었다. 이야기를 주로 이끌어가는 것은 군터였고, 그녀는 주로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간간이 목소리를 내는 식이었다.

“내일 떠난다.”

무심하게, 아무렇지 않은 척 툭 던지는 한 마디가 그리도 꺼내기 힘들었다.

“어디로요?”

“오테론이라고…아나?”

“아뇨. 처음 듣는 곳이에요.”

“갈색초원에 접한 곳이야.”

“아…….”

그녀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떠난다는 말 때문인지, 떠나서 향하는 곳이 위험한 곳이기 때문이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무엇이든, 떠난다는 말에 그녀가 흔들리는 것을 느끼자 군터는 또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의 마음이, 티끌만큼이라도 자신을 담고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이는 로크가 했던 말이 틀렸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물론 어쩌면, 이 역시 그저 시늉일 뿐이고 지금 그가 느끼고 있는 것도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다시 돌아오시나요?”

“죽지 않는다면.”

“언제쯤?”

“반 년. 아무리 빨라도.”

“그렇구나…….‘

실은 들르지 않고 그냥 떠나려 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런 다짐을 잘 지켰다. 하지만 오늘,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결국 그녀를 다시 찾고야 말았다.

벨리사는 멍하니 술잔을 보고 있었다. 영롱한 술에 비친 그녀의 눈은 조금 흐리멍덩했다. 그 눈을 보고 있자면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군터는 그녀를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목소리가 목구멍 중간에서 턱하고 막혔다. 벙어리가 된 듯했다.

‘…안 돼.’

로크의 얼굴이 떠올랐다. 후회하기 싫으면 확실히 하라는, 경험에서 우러난 처절한 조언을 상기시켰다.

요 며칠 동안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며칠 동안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으면서 점차 커져가는 목마름에 나름대로 답도 냈다. 로크가 여기 있었다면 당장 그 뻐끔거리는 입을 활짝 열어서 속 시원히 말하라고 뺨이라도 한 대 쳤을지도 모르겠다.

로크가 옳다. 그의 말이 맞다. 지금 여기서 물러나면 그보다 더한 등신은 없다. 망설여서는 안 된다. 마음을 굳건히 다잡아야 한다.

“…아무래도, 나는 네가 좋은 것 같다.”

“예?”

멍하던 눈에 빛이 돌아왔다. 당황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하지만 더 당황스러운 것은 그였다.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전에 입이 먼저 경솔하게 움직여버렸다.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 이걸 어떻게 수습을 해야 하지?

‘아니. 수습을 해야 하나?’

로크의 얼굴이 떠올랐다. 혀가 잔뜩 꼬부라져서는, 나처럼 후회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반복해서 말하던 친구가 떠올랐다.

“말…그대로다. 너는, 아니…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지?”

“저는…너무 갑작스러워서…….”

정말로 당황한 듯 말끝을 흐리는 벨리사였지만, 군터는 단번에 거절의 말이 나오지 않은 것에 만족했다.

“당장 답을 말하라고는 하지 않아. 그저 내 마음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답은 당신이 원할 때 줘도 괜찮아. 난 기다릴 수 있으니.”

남은 술을 단번에 털어 넣고 몸을 일으켰다. 요 며칠 눈을 감으면 아른거리던 얼굴이 바로 앞에 있건만 지금은 그 얼굴을 보기가 쉽지 않았다. 가슴이 쉴 새 없이 쿵쾅거리고 세상이 흔들렸다.

로크가 지금 이 상황을 보았다면 무슨 멍청한 짓거리냐며 가슴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은 이 정도가 군터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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