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33화 (33/1,064)

<-- 말 위에 올라 -->

휘하로 들일 병사들을 보러 다닐 때였다.

“werubiubwei(함께 가겠나)?”

“dgfjsdjiroi(그러지요).”

또 한 명의 병사를 얻은 차에, 뜨끈한 시선이 느껴져서 보니 웬 앳된 청년이 긴가민가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한테 무슨 볼 일이라도 있나.”

“아닙니다. 그…혹시 존함을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존함이라니. 낯간지러운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이런 경험을 언제 한 번 한 것도 같았다.

“…군터다.”

그의 이름을 듣자마자 청년의 안색이 확 밝아졌다.

“역시!”

“응?”

청년이 정중히 고개 숙였다. 무작정 몸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배운 티가 나는 인사였다.

“은공을 뵙습니다. 혹시 살라스라는 이름을 기억 하시는지요.”

“살라스……?”

들어본 적 없는 것 같은 이름이었다. 하지만 청년은 확신에 찬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당신은 나를 알고 있어!” 라고 외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기억이 안 나실 만도 할 겁니다. 딱 한 번 뵈었을 뿐이니까요. 하지만 은공께서는 저와 저희 마을 사람들의 목숨을 구해주셨습니다. 은공이 아니었다면 저희는 죽거나 노예로 팔려 갔을 겁니다.”

청년은 거의 열변을 토하다시피 했다. 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군터는 그제야 이 살라스라는 청년에 대해 기억해낼 수 있었다.

“아…그때 그 꼬마인가.”

아마도 로크와 함께 임무를 나갔을 때였을 것이다. 징발 임무였는데, 살마드로 돌아오는 길에 도적떼와 조우하여 격퇴하고 도적들에게 붙잡혀 있던 사람들을 구해준 적이 있었다.

‘그래. 그때 그 애늙은이 꼬마.’

언젠가 반드시 은혜를 갚겠다며, 자신의 이름을 반드시 기억해 달라고 했던 꼬맹이.

“그게 너란 말이냐. 다 컸군.”

“하하. 부끄럽습니다.”

얼굴은 아직 앳된 모습이 남아있지만 떡 벌어진 어깨와 적당히 큰 키는 어엿한 사내였다. 그때 자신이 구해줬던 꼬마가 이렇게 자랐다니 군터도 왠지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잘 됐군.”

그렇게 훈훈하게 웃으며 끝내려 했다. 그런데 살라스는 그게 아니었던 모양인지, 돌아서려는 군터를 붙들었다.

“은공께 청이 있습니다.”

“음?”

“부하 병사들을 모으고 계시다면, 저도 데려가 주십시오. 한 사람 몫은 충분히 할 자신이 있습니다.”

“마음은 가상하다만…….”

“대단한 재주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말을 탈 줄 압니다. 결코 짐이 되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시험이라도 치르겠습니다.”

실력은 어떨지 몰라도 의욕만은 상당히 충만해 보였다. 그 간절한 눈을 물끄러미 보던 군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게까지 말하니 시험해 보겠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기준 미달이라면 너도 더는 말하지 말거라.”

“감사합니다. 은공께서 제 재주를 보시고도 아니 된다 하시면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 * *

가장 중요한 건 아무래도 기마술이었다. 이제껏 들인 아쿼러즈 병사들은 핏줄은 못 속이는지 모두 제법 능숙한 솜씨를 보였다. 살라스가 부대에 들기를 원한다면 적어도 그 정도 수준은 보여줘야 했다.솔직히 별 기대는 안 했다. 같은 졸이라도 보병과 기병의 차이는 컸다. 그 차이는 당연히 봉급에서도 나타나기 때문에, 군터는 살라스의 의욕을 그저 어린 청년의 욕심이라고 여겼다.

“이랴!”

그런데 의외로 살라스의 기마술은 썩 괜찮았다. 감탄할 수준은 물론 아니었지만 지금까지 받은 아쿼러즈 병사들과 비교해봐도 그리 크게 떨어지는 수준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하위에 턱걸이 하는 정도? 이 정도면 제국인의 기준에서는 충분히 훌륭하다 할 만한 수준이었다.

“괜찮군.”

“합격입니까?”

살라스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아직. 기마술은 그럭저럭 됐으니 다음으로 넘어가지.”

말 위에서의 솜씨를 확인했으니 이번에는 말 아래서의 솜씨를 볼 차례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십인장 중 한 명이 무기를 휘휘 돌리며 다가왔다. 물론 쇠붙이는 아니었고, 훈련용으로 만들어진 나무 재질이었다.

타악!

목봉이 서로 거세게 부딪쳤다. 발기술을 비롯한 박투까지 동원되어, 서로가 전심전력으로 부딪쳤다.

“오! 제법인데요…가 아니라, 까딱하면 지는 거 아닙니까?”

처음 감옥에서 빼내올 때부터 그래도 거르고 걸러 뽑은 부하들이었다. 거기에 수 년 간 실전을 겪으면서 이제는 어디다 내놓아도 정병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한 수준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런 녀석을 상대로, 믿기 힘들지만 살라스는 우위를 보이고 있었다. 양쪽 다 얼굴이 시뻘겋게 변해서는 땀까지 뻘뻘 흘려대는 것으로 보아 서로 젖 먹던 힘까지 끌어 쓰고 있음이 분명했다. 방심도, 봐주는 것도 전혀 없다는 뜻이다.

“그만.”

멈추라고 말을 했건만 둘은 여전히 불이 붙었다. 하는 수 없이 군터가 그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퍽! 퍽!

“커흑!”

각자 사이좋게 복부와 가슴을 한 대씩 두들겨 맞고서 비틀대며 물러났다. 방금 전까지 바로 옆에 있었던 프레드릭조차 어어 하다 놓쳐버렸을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었다.

“죄송합니다.”

수하 십인장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숙였다. 물러가라 눈짓을 준 군터는 살라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시험은 이쯤 하면 됐어. 합격이다. 제법이군.”

합격이라는 말에 살라스의 얼굴이 고통도 잊고 대번에 환해졌다.

이렇게 보면 영락없는 샌님인데 또 의외로 실력은 어지간한 십인장들 급이라니.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나이도 어리지 않은가.

‘재능이 있다.’

기술 자체는 평범한 정도다. 하지만 몸놀림이 남달랐다. 재능. 그것도 상당한 수준의 재능이다. 자질만 보자면 현재 그의 부하들 중 최고일지도 모른다.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군.’

이건 길 가다가 금화를 주운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뭉텅이로 든 주머니를 말이다.

씩 웃은 군터가 손을 내밀었다. 살라스가 감격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붙들고 일어섰다.

* * *

병사들의 모집은 수월하게 이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인원을 모을 수 있었고, 집중적인 훈련에 들어갔다. 물론 훈련은 오테론으로 돌아가서 진행해도 되는 것이었으나, 그들에게는 한 달이라는 일정이 있었다.

“굳이 있는 기간을 단축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시커먼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너무나도 빤한 수작질이었다. 그래도 그걸로 타박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사실 군터도 주도까지 와서 생에 처음 누리는 호사, 혹은 사치를 조금 더 누리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다.

‘나 답지는 않지만.’

답지 않으면 또 어떤가. 호사도 부릴 수 있을 때나 부리는 것. 허투루 흥청망청할 생각은 없지만, 각박하게 살고 싶지도 않았다.

* * *

“오늘도 오셨네요.”

“그래. 오늘도 노래 잘 들었다.”

가녀, 벨리사가 작게 웃으며 앉았다.

“손님도 참 특이하시네요. 남들이 다 좋다고 하는 노래는 별로라고 하시고, 남들이 다 별로라고 하는 제 노래가 좋다고 하시니.”

“난 화려한 것보다는 심심한 게 좋거든.”

“그거 제 노래가 심심하다고 욕하시는 건가요?”

“욕하는 노래를 들으려고 비싼 술 마시러 오지는 않지.”

“하긴, 그것도 그러네요.”

군터가 그의 빈 잔을 채웠다. 그리고 슬쩍 벨리사 쪽을 보았는데, 그의 시선을 받고 잠시 망설이는 듯하던 벨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군터가 뜻밖이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받겠다고? 웬 일이지?”

“저도 오늘은 조금 마시고 싶거든요. 그리고…공짜 술이잖아요?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제가 이런 술을 마셔볼 수 있겠어요?”

거기까지 들은 군터는 두 말 않고 그녀의 잔을 채워주었다.

“벌이가 별로 좋지는 않은가보군?”

“많이 버는 사람들은 많이 벌지요. 하지만 저 같이 그저 빈 시간을 채우기 위해 무대에 오르는 가녀들은…….”

노래를 부를 때는 여유롭기 그지없던 목소리가 현실을 이야기하면서는 힘을 잃었다.

그에 군터는 술을 홀짝이는 벨리사를 찬찬히 살폈다.

예쁜 얼굴이다. 제국인들 기준으로는 조금 검게 느껴질 수 있지만, 초원인의 기준으로는 딱 건강하게 보이는 옅은 갈색 피부에 그보다 더 검은 빛이 나는 긴 머리카락.

그러나 그 아름다움을 감싼 것은 부드러운 비단옷이 아닌,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입었는지도 모를 헤진 옷 한 벌이다. 그것만 봐도 그녀의 궁핍한 삶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떻게 하다가 노래를 부르게 됐지?”

그 뒤로 우울한 이야기를 피해 이런저런 주제로 대화를 나누다가 우연찮게 화제가 넘어갔다. 이미 술이 적당하게 들어간 두 사람은 처음보다 풀어진 상태로 대화를 이어갔다.

“이곳의 주인어른께서 무대에 설 수 있게 해주셨어요.”

“주인어른? 이곳의 주인 말인가?”

“예. 돌아가신 제 아버님께서는 자그맣게 과일 장사를 하셨는데, 주인어른께서는 자주 과일을 사러 오는 단골이셨죠.”

“이곳의 주인이라면 엄청난 부자일 텐데 굳이 직접 과일을 사러 다닌단 말인가?”

“특이하죠? 주인어른께서 좀 그런 면이 있으세요. 그래서 남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제 노래도 좋다고 하셨던 건가 봐요.”

“흠.”

“1년이 조금 안 된 일이죠. 아직도 기억이 나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혼자가 된 제게 오셔서는 일거리가 없다면 본인의 가게에서 노래를 불러보라 하셨죠.”

“가업을 잇지는 못했나?”

“여자 혼자 장사를 한다는 건 힘든 일이랍니다. 특히 젊은 여자는 더욱.”

“…….”

말을 들으니 알만했다. 세상에 혼자가 된 젊은 미녀가 장사를 한다? 그랬다면 거리의 그늘에 사는 놈들부터 시작해서 온갖 날파리가 다 꼬였을 것이다.

“제가 자신 없어 하니 주인어른께서는 이렇게 말씀해주셨어요.”

벨리사의 얼굴에 흐릿한 미소가 번졌다.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과일이 있다. 단 과일을 좋아하는 사람도 언제까지 그것만 먹지는 못한다. 때로는 시큼한 것도, 고소한 것도 찾게 되는 법이다. 네 노래는 그렇게 찾게 되는 흔치 않은 과일과 같다.”

“맞는 말이다. 세련되게 갈고 닦은 기교도, 간드러지는 목소리도 계속 듣다 보면 질리기 마련이지. 애당초 난 그런 것들을 좋아하지도 않지만.”

“주인어른은 제게 기회를 주셨어요. 덕분에 저는 풍족하지는 않아도 어렵지 않게 살아갈 수 있게 됐죠.”

“은인이군.”

“예. 큰 은혜를 입었죠. 주인어른께는 항상 감사하고 있어요.”

그러나 은인과 감사함을 이야기하면서도 벨리사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무언가 내막이 있는 듯했으나 군터는 더 묻지 않았다. 캐물어본들 이야기 할 것 같지도 않았고, 술자리에서 어울리는 이야기 또한 아닌 듯했기 때문이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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