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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제국에서 아쿼러즈에 대한 취급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외관만 보자면 바크렌의 제국민이나 아쿼러즈들이나 별 차이 없었다. 제국의 정복전쟁을 통해 병합되기 전까지만 해도 바크렌을 지배하던 왕조는 초원과의 교류를 활발히 했고, 그 과정에서 인적교류도 이루어졌다. 본래 게다가 바크렌의 토착민이라는 것이 초원에서 넘어온 이들도 상당수 있었기 때문에 대대로 초원사람과 내지(內地)사람은 외관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바크렌이 제국의 영토로 병탄된 이후로도 마찬가지.
제국인과 아쿼러즈들의 차이는 그런 육체적인 것에 있지 않았다. 전적으로 정서적인 것의 문제였다.
수십 년 세월 동안 한 세대가 지나고, 또 한 세대가 지나면서 거의 온전히 제국의 문화와 규율을 받아들이며 제국인이 된 바크렌인과 달리, 초원에서 태어나 초원의 아들딸로 자라오다가 어느 날 갑자기 제국인이 되어버린 아쿼러즈들의 사고는 같을 수가 없었다.
그 극심한 괴리에 대부분의 아쿼러즈들은 혼란스러워 했고, 기존의 제국인들과 마찰을 일으켰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닫아걸고 혼자가 되었다.
물론 모든 아쿼러즈들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그랬고, 그러다보니 초원에 접하지 않아 초원민족에게 그다지 반감이 없는 바크렌인들조차도 아쿼러즈들에 대해 그다지 좋지 않은 눈길을 보내게 되었다. 말도 못하거나 어눌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하는 이들을 좋아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좋습니다. 데려 가시오.”
군에 몸을 담은 아쿼러즈들은 조금 나은 편이겠지만, 그렇다 해도 사정은 비슷했다. 잘 섞이지 못하거나, 아니면 섞였더라도 은연중에 경계나 멸시의 눈빛을 받는다. 그런 이들을 빼오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awerjiwjeoir(나를 따르겠나)?”
그들을 만나 초원어로 한 마디만 하면 눈빛이 변했다. 그들은 느닷없는 고향의 언어에 처음에는 당황했다가, 그 다음에는 놀라워했다. 그러며 군터의 가슴팍에 달린 휘장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믿기지가 않을 것이다. 아쿼러즈가 백인대장이 된다는 것은 그들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일 테니까. 모르긴 몰라도 아쿼러즈로서 백인대장이 된 것은 군터가 최초일 것이다. 장교의 등용문은 특별히 아쿼러즈에게 닫혀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제국인도 오르기 힘든 자리에 아쿼러즈가 오른다는 것은 역시 상당히 어려운 일이니까 말이다.
“ewhuiwbreiuwbu(어디로 갑니까)?”
“werubw(고향).”오해할까 싶어 한 마디 더 덧붙였다.
“ekdweihriowhwaetoibewt(당연히 놀러 가는 건 아니다).”
“weorijoiwjro(싸우러 가는 겁니까)? riowenrioenwriwonererop(그렇다면 당신을 따라가야 할 이유는 뭡니까)?”
따를 수 있는 동족을 만났다는 것에 격동하여 곧장 고개를 끄덕이는 이도 있는 반면에, 이렇게 되묻는 이들도 있었다. 군터로서는 둘 다 좋았다. 전자는 쉽게 따라주니 좋았고, 후자는 생각할 줄 아는 똘똘한 이들이라서 좋았다.
“robweoirbwqwin(너와 함께 얻는 것을 너와 함께 나누겠다).”
그 한 마디면 족했다.
“…wnreiwondslke(따르겠습니다).”
그렇게, 군터는 30여 명의 새로운 부하들을 얻었다. 단 하루만의 성과였다.
“반갑다 애송이들!”
모집한 병사들은 즉각 미리 대여한 병영에 모였다. 그곳에서는 음흉한 웃음을 띤 프레드릭 이하 십인장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없다.”
“알고 있습니다. 빡세게 훈련시키도록 합죠.”
아쿼러즈들인 만큼 말 타는 실력만큼은, 설령 초원을 떠난 뒤로 말을 타지 못해 녹슬었다 한들 그럭저럭 쓸 만한 수준일 것이다.
하지만 군인으로서의 능력. 예컨대 전투 기술이라든가 기본적인 전술 숙지 같은 것은 미흡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살마드에만 박혀 있으면서 실전다운 실전은 한 번도 겪지 못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런 상태로는 곤란했다. 초원은 꿈속에서 등장하는 아름다운 고향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목숨이 오락가락 할 수 있는 살벌한 곳이었으니까.
“자, 시작하지!”
프레드릭의 활기차면서도 우렁찬 신호를 시작으로 간단한 시험이 시작 되었다. 새로운 병사들 개개인의 실력을 한 번 보기 위한 자리였다.
퍼억!
“컥!”
제법 진지하게 눈을 빛내던 병사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땅을 뒹굴었다. 거의 눈이 뒤집혔던 그는 간신히 정신을 차린 뒤 황망한 눈길을 보냈다.
“몸놀림은 나쁘지 않아. 하지만 힘이 부족하다. 그간 상당히 게으르게 몸을 썩혔나 보군.”
“weuriwbueri(무슨 힘이)…….”
“다음.”
그날 훈련에서 군터는 무려 열여섯 명의 병사들을 쓰러뜨렸다. 개중에는 도저히 승복이 안 되는지 두어 번씩 덤벼드는 이들도 있었으나 역시 주먹 한 방에 나가 떨어졌다.
군터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도리질을 치는 그들에게 짤막하게 한 마디를 남겼다.
“다들 형편없군. 난 병사가 필요하다. 자살 희망자가 아니라.”
십인장들이 맡은 병사들도 상태는 비슷했다. 찬바람을 맞으며 실전에 실전을 거듭한 용병(勇兵)인 십인장들과 살마드에서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보낸 신병들이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오늘부터 너희는 진정한 병사로 거듭난다. 기대해도 좋아.”
단호한 말에 병사들의 안색이 시퍼렇게 변했다.
* * *
군터는 간만에 로크와 만났다. 사실은 살마드에 온 첫날에 만나고 싶었지만 그때는 로크가 임무 때문에 살마드에 없었기 때문에 볼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오늘에서야 로크가 살마드로 돌아왔기에 자리를 마련했다.
“이야…믿기지가 않는구만.”
근 반 년 만에 다시 만난 로크는 손에 든 휘장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네가…아, 이제는 백인대장 나리라고 불러드려야 하나?”
“부러운 마음 이해한다.”
“이해한다고? 넌 절대 이해 못해. 지금 배가 아프다 못해 아예 찢어지려고 하는 중이거든?”
인상을 쓰면서 배를 잡는다. 군터는 클클 웃으며 잔을 입에 가져갔다. 유난히도 오늘 술은 달았다. 저 부러워하는 꼴을 보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
“하. 그때 너랑 같이 갈 걸 그랬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됐네요 이 사람아. 난 덜 벌어도 등 따신 게 좋아. 네 얼굴을 봐라. 40살이라고 해도 믿겠어요. 그게 다 거기서 고생을 작살나게 해서 그런 거 아니겠냐.”
“너도 만만치 않다. 40은 아니어도 30대 중반은 되어 보여. 그건 노인네처럼 등 따시게 누워만 있어서 그런 거겠지.”
“오…이제는 주먹 말고 입도 잘 놀리시는구만. 더 이상 가르칠 게 없는데?”
한바탕 웃고 떠들고 있으니 마음이 푸근해졌다. 살마드에 돌아왔음을 실감하는 것은 언제나 이렇게 로크와 술잔을 기울이며 농담 따먹기를 할 때였다. 그에게 있어 살마드란, 좋은 술과 여자가 있는 곳이기보다는 친구가 있는 곳으로 기억 됐다.
“그래서? 지금 몇 명이나 모은 건데?”
“서른 둘. 아직 한참 남았다.”
“그래도 하루 만에 그 정도 모았으니 넉넉잡아 열흘…아니, 닷새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
“아쿼러즈라고 해서 아무나 다 받을 생각은 없어.”
“하긴, 그것도 그렇군. 어중이떠중이어서야 아무래도 곤란하겠지.”
그 뒤로도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눴다. 생각 없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취기는 점점 올라갔다.
“넌 요즘 어때?”
“뭐가?”
“뭐 특별한 일 없냐는 거지.”
“특별한 일이 뭐가 있겠냐. 그냥 늘 오늘이 어제 같지. 내일도 오늘 같을 거고.”
“그거 참 심심하군.”
“난 심심한 게 좋아. 편하거든. 별 걱정 안 해도 되고, 신경 쓸 일도 거의 없어.”
확실히 로크는 그와 전혀 달랐다. 어렸을 때부터 가만히 보고 있으면 로크는 욕심이 거의 없는 것 같았다. 없는 건 아닌데 아주 작다고 할까. 좀 더 욕심을 부릴 법도 한데 그러지 않는다. 그냥 거기 멈춰 서서 만족한다.
“이상한 녀석.”
“남 말 하시네.”
“일어나자. 오늘은 내가 다 낸다.”
“오오! 역시 백인장 나리야. 통이 크셔!”
군터는 기분 좋게 노래까지 흥얼거리는 로크를 데리고 일전에 갔었던, 가녀가 있는 고급 주점으로 향했다.
“뭐야? 여기 좀 비싸 보이는데? 정말로 괜찮은 거야?”
“기분 낼 때 조용히 얻어먹기나 해라.”
안으로 들어가자 종업원이 마중 나왔다. 전에 보았던 종업원은 아니었다.
“어서 오십시오. 두 분…이십니까?”
종업원의 눈길이 군터의 얼굴에 가 닿았다가 곧장 그의 가슴팍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이전과 같이, 그 뒤에는 공손함만이 남았다.
“자리 있나?”
“예. 물론입니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종업원이 자리에 안내하자 로크는 살짝 긴장한 기색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니. 난 그냥 간만에 몸이나 푸나 했는데 말이지, 대체 여긴 뭐야? 너 이런 곳을 들락거리냐? 백인장 나리가 됐다고 아주 유세를 떠는구만.”
“그래서 불만이냐? 너만 원한다면 당장이라도 나갈 수 있는데.”
“아니, 뭐 그렇다는 거지. 좋아! 잘난 친구 놈 덕분에 나도 높으신 분 흉내 좀 내보자.”
커흠 하며 슬쩍 테이블 위의 자그마한 목판을 집어든 로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피식 웃은 군터가 그에게서 목판을 뺏어들었다.
“어이. 정말 괜찮겠어?”
“걱정마라 촌뜨기.”
“뭐야 자식아? 더러워도 물주니까 참는다.”
피식 웃은 군터는 저번에 시켰던 술과 음식을 그대로 시켰다. 종업원이 공손히 고개 숙이고 물러나자 그는 슬쩍 무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이 앉은 자리는 먼젓번과는 달리 1층의 구석진 자리였다. 아무래도 시간이 시간인지라 저번과는 달리 빈자리도 드물었다. 그럴싸하게 차려입은 자들이 한 자리씩을 차지하고 비싸 보이는 음식이며 술을 테이블 가득 놓고 같이 온 일행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나같이 척 보기에도 돈 걱정 같은 건 안 하게 생긴 자들이었다.
“이야. 근사한데?”
술과 음식이 나왔다. 로크는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식기를 움직였다. 군터는 먼젓번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실소를 흘렸다. 그러자 로크가 불퉁한 표정을 지으며 신경질적으로 고기를 씹었다.
“웃기냐? 웃겨? 내 생각에, 너도 처음에 왔을 때는 나랑 다르지 않았을 것 같은데 말이지.”
“그래. 맞아. 지금 너랑 비슷했지.”
“흥! 야, 그나저나 이거 맛있는데? 고기가 입에서 살살 녹아.”
당연히 그래야 한다. 저 고기 한 점이 평소에 먹던 고기 열 점보다 더 비싸니까 말이다. 지금 자기가 아무렇지 않게 먹어치우고 있는 음식의 가격을 알게 되면 로크는 지금처럼 밝은 얼굴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야. 노래 좋은데? 얼굴도, 몸매도…….”
고기는 다 삼켰을 텐데 로크의 목젖이 거칠게 움직인다.
군터도 무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얇은 드레스를 입은 가녀가 눈을 감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살결에 대고 쓸어내리는 것 같은, 부드러우면서도 감미로운 노래다. 그러나 노래만큼이나 신경이 쓰이는 것은 조금씩 비치는 가녀의 속살이다.
“그나저나 노래 한 번 정말 기똥차게 부르네.”
“아…그래.”
“친구 하나 잘 둬서 이런 호강을 다 해보네. 고맙다 자식아.”
“알면 잘해라.”
“예, 예. 받들어 모시겠습니다요.”
로크는 슬쩍슬쩍 주변을 훔쳐보며 다른 이들이 어떻게 식사를 하는지를 살핀 뒤 그럴듯하게 흉내를 냈다. 제법 그럴듯하게 칼질을 하고, 때때로 노랫말에 심취하듯 눈도 감았다. 군터의 눈에는 그저 우습게만 보이는 짓거리였지만, 어쨌든 로크는 처음인 주제에 나름대로 훌륭히 촌티를 지워갔다.
‘별로군.’
간드러지는 목소리에 잘은 몰라도 목소리를 놀리는 기교까지 훌륭하다. 노래를 잘 부르는 것은 확실했다. 그 증거로, 제대로 들을 줄 알아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저 주변 몇몇 머저리 같은 자들을 따라서 덩달아 심취한 척 하는 것인지 로크의 표정은 정말로 바보 같이 변해 있었다.
하지만 군터는 지금 무대에서 가녀의 노래를 즐길 수 없었다. 잘 부른다는 생각은 들지만, 들어도 그다지 즐겁지가 않았다. 맞은편에서 헬렐레 한 표정을 하고 있는 로크 때문은 아니었다.
‘기대가 컸던 건가?’
스스로 찾아온 허영의 한복판에서 군터는 문득 회의감을 느꼈다. 슬쩍 인상을 찌푸린 그는 쓴 잔 속의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