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 위에 올라 -->
눈이 쌓였던 흔적만이 남은 연무장에서 한 사내와, 아직 사내라고 하기에는 조금 일러 보이는 앳된 청년이 맞붙고 있었다.
“하하! 아침을 못 먹은 거냐? 힘 좀 더 써보지 그러냐. 이래가지고 한 대라도 제대로 갈길 수 있겠어?”
“이익!”
사내의 능글맞은 도발에 청년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하지만 흥분은 오히려 독이었으니, 청년은 씩씩대며 달려들었다가 사내가 슬쩍 뻗은 발에 걸려 볼썽사납게 자빠지고 말았다.
“어째 넌 대가리에 열 좀 올랐다 하면 그냥 미친놈처럼 날뛰는 거냐. 조금만 긁어주면 바로 이 모양이니…쯧쯧. 내가 봤을 때 너는 기술이니 힘이니 하기 전에 이 대가리부터 식히지 않으면 백날 해도 똑같겠다.”
사내가 쓰러진 청년을 내려 보며 혀를 찼다. 할 말이 없었던 청년은 입술을 깨물며 눈을 질끈 감을 뿐이었다.
“어쨌거나 오늘도 내 승리. 앞으로 사흘 동안은 귀찮게 굴지 말도록.”
“으으…….”
재빨리 몸을 일으킨 청년은 슬쩍 연무장 밖의 한 쪽을 곁눈질했다.
얼굴을 가로지르는 두 갈래 날카로운 흉터가 인상적인 거구의 사내, 군터가 팔짱을 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청년, 할렌은 한숨을 푹 쉬며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힘없는 그 모습이 꼭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았다.
“…죄송합니다.”
“왜 내게 사과를 하나. 날아간 건 네 목이다.”
실전에서는 지금보다 더 다양한 형태로 머리가 뜨거워지기 마련이다. 자기감정 하나 제대로 조절 못해서야 목 내밀고 죽여 달라 외치고 다니는 꼴.
“그 성미를 고치지 못하면 10년이 지나도 전장에는 데려갈 수 없다.”
“…예.”
푹 숙인 고개가 처량하다. 거기에 대고 위로 한 마디 해줄 법도 하건만, 군터는 냉정히 돌아섰다. 자기 스스로 성인 대접을 해달라고 한 놈인 만큼, 어린애 취급은 필요 없다는 것이 군터의 생각이었다.
‘열다섯이라고 했나.’
제국의 기준으로는 조금 어린 편이겠으나 초원의 기준으로 따지자면 얼추 성인이라 봐도 무방할 나이다. 한 사람의 몫을 할 수 있는 나이란 거다.
‘어느새 그렇게 시간이 흘렀군.’
처음 녀석을 봤을 때가 벌써 3년 전이다. 녀석과 녀석의 어미를 노예로 삼았고, 제국식 이름도 지어주었다. 동향이란 것도 있고, 녀석의 처지가 그와 비슷하여 여러모로 신경을 써주었다.
그랬던 녀석이 어느새 저렇게 컸다. 3년이라는 시간을 그냥 떠올렸을 때는 그리 길지 않게 느껴졌는데, 그 사이에 소년이 사내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새삼 길었구나 싶었다.
그러고 보면 한편으로 3년이란 세월은 군터에게도 여러모로 다사다난했다.
먼저 가장 큰 변화라면, 조금은 초라해 보이던 가죽 갑옷 대신 금속이 다량으로 섞인 갑옷을 착용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는 그의 가슴 한쪽에 자리한 금박 휘장과 연관이 있었다.
십인장 군터는 이제 없다. 대신 어엿한 장교라고 할 수 있는 백인대의 대장, 군터가 있을 뿐이다.
“군터 대장! 막시밀리언님께서 찾으십니다!”
“곧 가겠다.”
짧게 답한 군터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향하는 곳은 막시밀리언이 있는 사령부였다.
*
“자네…참 수완이 좋군.”
“과찬이십니다.”
막시밀리언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자이론은 복잡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영전을 감축 드립니다.”
“영전? 영전이라……. 그래. 영전이라면 영전이지.”
오늘 아침 살마드에서 전령이 왔다. 통상적으로 오던 전령이 아니었다. 자이론의 전출을 명하는 명령서를 든 전령이었다.
이제 그는 오랫동안 몸 담았던 오테론을 떠나 살마드에서 복무하게 되었다. 베브로스의 난을 진압하며 소실되었던 천인대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지휘관이 필요해졌던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자이론이 살마드로 가게 되며 오테론에서 천인장의 공석이 생기게 된 만큼 새로운 인물이 천인장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 내용 역시 살마드에서 온 전령의 명령서에 포함되어 있었다.
“자네야말로 축하하네. 천인대장 막시밀리언이 되었군. 이제는 나도 어느 정도 말을 높여야 하나?”
“가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이제까지처럼 편히 대해주십시오.”
“…그래. 그러지.”
가히 파격이라 할 만하다. 40이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천인장에 오르다니. 아니, 40이 뭔가? 이제 갓 서른이 넘었을 뿐이다. 그런 어린 나이에 천인장이 된 것이다.
이제껏 그런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런 이들 모두가 하나 같이 만만찮은 배경을 등에 졌던 이들이었음을 떠올려 본다면, 일개 상인의 자식인 막시밀리언이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자이론은 막시밀리언의 인사 과정을 놓고 어떤 자들에게서 어떤 이야기들이 오갔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아무튼 정말 놀랍군. 허탈하기도 하고, 또 한 편으로는 기대도 돼. 자네가 어디까지 올라갈지 말이야.”
“감사합니다. 그 크신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지요.”
한때 둘의 사이가 서먹해진 적도 있었다. 베브로스의 난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막시밀리언이 상관인 자이론의 명 없이 독단으로 휘하의 군을 이끌고 나가 사령관인 울벤트 리에론을 구한 일을 두고 말이다. 그것은 물론 결과적으로 보자면 대단한 공적이었지만, 상관인 자이론의 입장에서는 아니꼽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면 그때의 그 무모함이 결국 이리 큰 선물이 되어 돌아온 것이군.”
막시밀리언의 배경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막시밀리언의 부친과 자이론은 나름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애초 막시밀리언을 백인대장 자리에 앉혀준 것도 자이론이었다.
백인대장은 장교라고 하지만 말단 병사들도 운과 실력이 받쳐준다면 어찌어찌 오를 수 있는 자리다. 천인대장의 재량으로 비교적 자유로이 임명할 수 있는 직급이다.
하지만 천인대장은 격이 다르다. 무려 천 명의 병력을 휘하에 두는 자리다. 자그마한 요새의 사령관도 될 수 있는 자리이며, 그 위에는 오직 장군들만이 있는, 군부에서 중간 장교로서는 사실상 최고의 위치인 것이다.
실력과 운이 있다고 하여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든든한 배경. 그것이 필요하다. 절대적으로.
그런데 이 상인의 아들은 그 귀하고도 어려운 것을 손에 넣은 듯했다.
‘나보다 족히 20년은 더 빠르군.’
한때는 자이론 역시 그러한 배경이 있었다. 상관으로 모셨던 장군의 눈에 들어 그의 연줄로 어떻게든 이 자리까지 올랐다. 하지만 그는 딱 이 정도가 한계였다. 이 이상의 위치에 오른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기대된다고 말은 했으나, 아마 눈 앞의 젊은이도 여기까지가 한계일 것이다.
어쨌거나 수완이 대단하다. 아마 자신을 살마드로 불러들이게 한 것도 막시밀리언일 것이다. 시기도 적절하고 명분도 있으니 그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을 터. 자연스레 기회를 만들고 낚아채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생각해보면 그리 나쁘지 않아.’
주름이 는 것은 얼굴만이 아니다. 칼을 쥐는 손에도 세월의 흔적이 새겨졌다. 이제는 익숙한 초원의 바람을 맞는 것도 때때로 힘겨웠다.
이제 이 나이가 되었으니, 이제는 그 힘겨움에서 벗어나 따뜻한 살마드에서 남은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쉽지 않을 걸세.”
자이론은 허리춤의 검을 막시밀리언에게 건넸다. 막시밀리언이 허리를 굽히며 두 손으로 그것을 받았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자이론은 자신의 시대가 비로소 저물었음을 깨달았다. 이제는 새로운 시대가 이 사나운 바람에 맞서 나가리라.
*
“축하하네.”
군터는 막시밀리언에게 백인대장의 휘장과 고풍스러운 검을 건네받았다.
“하나는 응당 받아야 할 것이고, 하나는 내 개인적인 선물일세.”
“…감사합니다.”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군터는 홀린 것 같은 눈으로 휘장을 바라보았다.
“일단 늦기 전에 약속은 지켰군.”
“예?”
“이 사람. 잊었는가? 살마드에서 자네를 내 수하로 들일 때 내 뭐라 했던가?”
“아…….”
그제야 기억이 났다. 처음 보았을 때, 자신을 따르라며 이야기하던 막시밀리언. 그가 했던 약조가.
“자네에게 내 자리를 물려주는 셈이야. 그러고 보니 자네가 나보다 빠르군 그래. 자네 나이가 이제 스물 둘이던가? 셋?”
“셋입니다.”
“허! 종종 자네가 코르넬 정도 나이를 먹은 줄로 착각하곤 한다네.”
농담 같은 말이지만 슬프게도 농담만은 아니었다. 가뜩이나 체구도 큰 데다 인상까지 사납던 군터는 괴인의 발톱에 긁혀 얼굴에 흉터가 생긴 뒤로는 누구도 그를 20대로 보지 않게 되었다. 이따금씩 그를 잘 모르는 이들에게 나이를 밝히면 질 나쁜 농담으로 여길 정도다.
다만 군터는 그런 것에 그리 개의치 않았다. 태어나서 한 번도 잘생겼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는데다, 자신을 보고 다른 이들이 설설 피해 다니는 것도 익숙했기 때문이다. 잘나지 않은 얼굴이 흉터 몇 개가 더해지면서 잘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살벌해졌지만, 뭐 어떤가. 얼굴 뜯어먹고 살던 것도 아닌데 말이다.
“새로이 부대를 꾸려야 할 걸세. 본래 내가 이끌던 백인대를 맡으면 좋겠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결원이 꽤 있지 않은가. 게다가 코르넬 같은 경우는 또 따로 백인대 하나를 맡아야 해서 말이지.”
“괜찮습니다. 새로 꾸리는 편이 오히려 더 좋습니다.”
“그래. 조만간에 살마드로 갈 걸세. 거기서 모병을 하든, 징병을 하든 해서 충당할 것이야. 당연히 한 번에 다 갔다 올 수는 없고, 한 부대씩 보내야 할 터인데…….”
막시밀리언이 순번을 어찌 짜야할지 고민하던 때였다.
“대장님. 청이 있습니다.”
“청? 별 일이군. 말해보게.”
“제가 이끌게 될 백인대는, 기병대로 꾸리고 싶습니다.”
오랫동안 품어왔던 소망 중 하나.
군터는 그것을 처음으로 입 밖에 내었다.
*
“으음. 좋아. 어차피 자네와 코르넬 중에 한 명에게 맡기려고 했었네. 군마는 어차피 보급이 될 것이니, 자네는 사람을 준비하게. 한 달 주지.”
허락은 흔쾌히 떨어졌다. 본래 천인대에는 기마대가 백인대 기준으로 한 부대 내지 두 부대 있기 마련이었다. 막시밀리언은 그 자리를 군터에게 맡겼다. 이것은 그가 군터를 신뢰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군터는 벅차오르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담을 가진 채 살마드로 향했다. 말은 보급되어 나올 테지만, 말보다도 더 중한 것이 말을 탈 사람이었다.
기병은 보병과는 달라서, 인마(人馬)가 각자 중요했다. 말을 탈 줄 아는 사람이 있어도 탈 말이 없으면 무소용인 것처럼, 마찬가지로 탈 말이 있어도 탈 줄 아는 사람이 없다면 또한 무소용인 것이다. 기병은 사람과 말이 각기 그 자체로 귀중했다.
‘훈련은 차근차근 시켜도 된다. 일단 최소한 말을 탈 줄 아는 놈들로 모아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기존 군터 십인대(십인대라고 해봐야 인원은 여섯에 불과했다) 병사들은 모두 어설프게나마 말을 탈 줄 알았다. 군터가 틈틈이 시간을 내어 훈련시킨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제하고도 무려 백 하고도 네 명을 더 뽑아야 했다. 기존 병사들을 모두 십인장으로 진급시킨다 해도 십인장 자리가 넷이 비고, 그 밑의 병사들도 모두 채워야 했으니까 말이다.
‘바쁘겠군.’
기한은 넉넉히 받았지만 할 일은 더 빡빡했다. 살마드로 향하는 길이 다급해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