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브로스의 난 -->
전투가 끝난 후의 정리는 한창 전투가 벌어지던 와중보다도 훨씬 더 잔혹했다.
무려 7천여 개의 수급(물론 떠나기 전에는 일일이 귀만 잘라냈지만)은 그저 흘깃 한 번 본 것만으로도 며칠 동안 악몽에서 튀어나올 정도로 끔찍했다.
군터 역시 악몽은 꾸지 않았으나 살마드로 가는 길에 종종 귀가 잘린 어린아이와 여인, 노인들이 떠올랐다. 그가 아는 어느 싸움도 이번과 같지 않았기에 그는 상당히 심란한 마음이었다.
개선이라면 개선이건만, 군터 십인대에서 들뜬 이는 아무도 없었다. 대장인 군터부터가 말없이 무거운 분위기였고, 활달한 프레드릭마저도 확연히 말수가 줄어들었다. 평소와 같은 농담 따위도 당연히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막시밀리언 백인대의 거의 모두가 그러했다.
“애송이들이군.”
“이런 경험은 처음인가?”
“수확이잖아. 전리품 같은 거라고 생각해. 적어도 니들 목이 저렇게 절여지는 것보다는 낫잖아?”
자이론 천인대의 다른 백인대 병사들이 간간이 말을 걸었다. 서투르게 위로의 말 비슷한 것을 건네는 이들도 있었다.
군터에게도 그러는 이가 있었다. 다른 부대의 장교가 아니었다. 우습게도 막시밀리언이 그러했다.
“쇠로 된 간담을 가진 줄로만 알았는데 이런 것으로 우울해하기도 하는군. 간만에 나이다운 순진함인가?”
“…….”
웃는 낯으로 그런 말을 하는 막시밀리언에게 뭐라 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죄송하다고 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농담으로 받으면 되는 것일까.
그런 쓸데없는 고민을 하다가 제때 답하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입을 다문 셈이 되었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지, 막시밀리언은 다 안다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이더니 말을 이었다.
“자네도 조금은 알겠지만, 세상의 모든 일이 다 비슷하다네. 뭐 하나 간단히 돌아가는 법이 없지. 이것 역시 마찬가지.”
“무슨 말씀이신지.”
“저들은 말하자면 본보기인 셈이야. 이제 우리가 살마드에 도착한 후부터 바크렌 전역에 소문이 돌기 시작할 걸세. 총독의 명을 받고 움직인 제국군이 반란군을 무자비하게 토벌했다. 전공에 눈이 뒤집힌 군병들은 애고 어른이고,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눈에 보이는 대로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그 수가 자그마치 7천 개더라. 아, 물론 소문에서는 더 늘어나겠지. 아마 최소 2만 개까지는 늘어나지 않을까 싶군. 좀 더 쓰자면 그 이상이 될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목이 말랐는지 막시밀리언이 잠시 숨을 골랐다. 뜸을 들이는 것 같기도 했다.
“이번 토벌에서 가장 중요했던 건 반군에 대한 토벌 그 자체가 아니라는 거네. 토벌 자체보다는 토벌을 함으로써 얻게 되는 효과가 가장 중요하지. 어설프게 노예 얼마를 챙기는 것보다 이렇듯 확실하게 보여주는 게 효과가 더 좋다는 계산인 게야. 장사꾼의 핏줄로서 말하자면 그 계산은 정확하네. 오랜 역사 속에서 그런 방식은 항상 효과가 있었고, 이번에도 예외는 아닐 것이야.”
요컨대 공포를 유발시킨다는 것이다. 제국에 적대하거나 반감을 가진 이들 모두에게.
“아무튼 이렇게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 제국에 반감을 가진 이들은 두려워하겠지. 그렇게 되면 병장기를 쥐려 마음먹었던 이들은 어디 가서 술이나 마시면서 욕이나 뱉게 될 것이고, 욕을 뱉으려던 이들은 꾹 참고 묵묵히 일을 하게 될 걸세. 채찍을 들지 않고 채찍질을 하는 셈이지. 어떤가? 그리 생각한다면 수천의 노예보다 더 값진 것 아닌가?”
군터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떼었다.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무의미한 살육은 아니었다는 건 알겠습니다.”
막시밀리언이 쓰게 웃으며 군터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하네. 사실 나도 별로 유쾌하지는 않아. 그게 정상이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자는 혈귀겠지.”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음? 내게? 하하. 얼마든지.”
군터는 잠시 뜸을 들였다. 방금 전 막시밀리언의 말을 들으며 퍼뜩 떠오른 의문이었다. 사실 조금 오래 전부터 어렴풋이 품고 있던 것이기도 했다.
“이번 토벌로 대장님께서는 무엇을 얻으신 겁니까?”
막시밀리언은 반군과의 전투 첫날에 무리해서 사령관 울벤트 리에론을 구했다. 그것은 분명 큰 공이었지만 막시밀리언의 독단이었다. 군터는 그 일로 막시밀리언과 자이론의 사이가 서먹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렇게까지 해서 막시밀리언이 얻은 것은 무엇인가. 단순히 권력자의 눈에 들기 위한 무모한 돌진이었을까? 군터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고, 또 그렇지 않기를 바랐다. 그것은 그 무모한 돌진으로 잃은 부하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내가 얻은 것이라. 자네도 그런 것을 물을 줄 알았던가?”
재미있다는 표정이다. 그는 조금 즐거워보였다.
“무엇일 것 같은가? 자네가 한 번 맞춰보게.”
“…자리를 약속 받으신 겁니까.”
“틀렸어. 조금 실망이군. 나를 그런 소인으로 보았는가.”
졸지에 소인 비슷한 사람이 되어버린 군터는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사실 그가 머리를 굴려 떠올린 것은 그게 전부였다. 그도 그럴 것이, 높은 사람이 줄 수 있는 것이 자리 말고 더 있던가?
“나는 그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 걸세. 실은 사령관으로부터 은밀히 자리를 제안받기도 했지마는, 거절했다네.”
“어째서.”
그가 손가락 두 개를 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지. 하나는 준다고 해서 덥썩 받아먹으면 모양새가 영 좋지 않아서야. 시쳇말로 너무 싸 보인다는 것이지. 명색이 상인의 아들이거늘 그런 실수를 해서야 안 되지 않겠나.”
솔직히 첫 번째 이유는 조금 우습게 들렸다. 그가 이야기하는 상인의 논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한 번 사양했다가 울벤트가 할 만큼 했다며 입을 싹 닫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그것까지 묻지는 않았다. 괜히 그런 것을 묻는다면 막시밀리언의 말마따나 ‘싸 보일까’ 싶어서였다.
“그리고 또 하나. 나는 사령관에게 빚을 지웠네. 내가 만약 그가 주는 자리를 받는다면 그것으로 그는 빚을 갚게 되는 것이야. 그래서야 너무 허망하지 않은가. 목숨을 걸고 얻은 것이 고작 변변찮은 자리 하나라면 말일세.”
“그렇다면…….”
“빚을 받아내는 가장 좋은 방법이 뭔지 아는가?”
“…….”
“장사 중에 제일 쏠쏠한 장사가 뭔지 아나? 고리대라네. 한 번 돈을 빌려주고 가만히 놔두기만 해도 이자가 늘고 이익이 늘어나지. 들이는 수고에 비해서 가장 안전하고 착실하게 이문이 나는 장사야.”
“물론 여기에는 나름의 조건이 붙지. 하나는 빚을 진 자가 야반도주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빚을 진 자가 빚을 갚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네.”
여기까지 말했을 때 막시밀리언은 은근한 시선을 보냈다. 이쯤 했으면 뭔가 짚이는 것이 있지 않느냐는 듯.
하지만 애석하게도 군터는 그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사령관과 자리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무슨 장사며 고리대 이야기가 나온다는 말인가.
‘머리 아프군.’
군터의 표정이 영 좋지 못하자 막시밀리언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런, 이런. 자네는 천생 군인이로군.”
분명 나무라는 말일 터인데 그의 표정은 밝았다. 즐거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만족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복잡한 말은 집어치우지. 이렇게 생각하게나. 그는 나에게 빚을 졌어. 그리고 난 그에게 빚을 갚게 할 마음이 없다네. 진득하니 이자만 받아먹을 생각이지.”
“아…….”
“이제 좀 알겠나? 말하자면 투자인 셈이지. 당장 얻는 것은 없어보일지라도, 장기적으로 보면 당장 한 자리 얻는 것보다 더 크게 돌아올 걸세.”
“사령관이…이자를 낼 거라 확신하십니까.”
“그럴 것이고, 그리 되게 만들 걸세.”
그 대목에서 막시밀리언의 얼굴은 사뭇 진지해져 있었다.
* * *
“와아아아!”
살마드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귀를 울리는 환호가 쏟아졌다.
도시의 모든 이들이 몰려나온 것 같았다. 성문에서부터 시작되는 대로의 양 옆에는 사람들이 발 디딜 곳을 찾기 힘들 만큼 빼곡하게 서 있었다.
성벽 위에서 꽃잎이 흩날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어린 아이들이 바구니 같은 것을 들고 꽃잎을 뿌려대고 있었다.
“…뭐랄까,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네요.”
얼떨떨한 표정의 프레드릭이 웅얼거리듯 말했다. 군터의 표정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여기! 여기를 봐주세요!”
누군가 애타게 부르기에 돌아봤더니 웬 젊은 여인이 꽃목걸이를 든 채 소리치고 있었다. 군터와 눈을 마주친 그녀는 배시시 웃더니 그가 옆을 지나갈 때 그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쪽!
볼에 닿은 가벼운 키스는 덤이었다.
“하하하핫! 보기 좋군!”
이번에야말로 군터는 더할 수 없이 당황하였다. 황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그를 막시밀리언이 씩 웃으며 돌아보았다. 그는 군터의 바로 앞에서 걷고 있었기에 외간 처녀에게 볼을 빼앗기는 모습도 제일 좋은 자리서 구경할 수 있었다.
“어느 선각자가 말하길, 인생이라는 것이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더군. 꼭 맞는 말 같지 않은가?”
“그렇군요. 그 선각자가 누굽니까?”
“글쎄? 나도 궁금하군. 건너들은 이야기라서 말이야. 혹시 나중에 자네가 알게 되면 내게도 좀 알려주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개선 행진은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외성의 성문으로 들어서부터 시작된 행진은 내성 안까지 이어졌다.
“난 살마드에서 나고 자랐지만, 여기 들어와 보는 건 처음이야.”
병사들 중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군터 역시 내성에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십인장으로 살마드에서 복무할 때도 내성에 들어와 본 적은 없었다. 그만큼 내성은 보통 시민들에게는 개방되지 않는 금지나 마찬가지였다.
“정지!”
내성으로 들어서자 환호소리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마저도 내성의 성벽 바깥에서 들려오는 것일 뿐, 안에서 들리는 소리는 없었다. 바깥이 들떠 있는 느낌이었다면 성벽 안쪽은 엄숙한 분위기였다.
“울벤트 리에론 이하 이곳에 있는 모든 장정들이여!”
그때 한 사내의 목소리가 엄숙함을 깨뜨렸다.
“고생이 많았노라! 제국이 너희들의 용맹과 명예를 기억할 것이다!”
그는 높은 단상 위에 올라 있었다. 때문에 무수한 인파의 뒤편에 멀찍이 있던 군터도 그를 볼 수 있었다.
금 수실이 장식한 화려한 의복의 사내.
“위대하신 황제 폐하로부터 바크렌의 통치를 명받은 나, 바크렌의 총독 프랜시스 발라테릭스가 너희들의 노고를 치하하노라!”
그의 소개를 들은 순간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그것은 의식과 관계없는 본능적인 현상이었다.
총독. 황제로부터 임명 받은, 한 지방을 다스리는 최고 관리. 지금 눈에 보이는 저 사내야말로 이 땅에서 가장 존귀한 자, 강한 자였다. 그것을 알고 있는 군터는 묘한 흥분을 느꼈다.
스스로 무언가 이룬 것 같은, 마치 대단한 자가 된 것 같은 느낌. 고양감.
“너희들은 감히 제국에 반기를 든 역적들에게 황제 폐하의 위엄과 그 지엄한 칼날을 증명했다! 스스로 자랑스러워해도 좋다! 오늘의 주인공은 너희들이다! 살마드의 모든 백성들이 너희의 명예와 용맹을 노래할 것이로다!”
총독이 어깨높이까지 들었던 팔을 내림과 동시에, 천둥과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때까지 숨죽이고 있던 병사들이 억눌렀던 열기를 일제히 분출한 것이다.
“와아아아아아!”
“우아아아아아아!”
모두가 목이 터져라 소리 질렀다.
군터 역시 그 중 하나였다.
몸에서 끓는 열기가 다 식을 때까지, 그들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