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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28화 (28/1,064)

<-- 베브로스의 난 -->

“어둠이 깔리면 진지를 벗어나 대기한다.”

“오늘 밤에 적습이 있을 것이다. 적들이 진지를 덮치면 그대로 포위하여 섬멸한다.”

느닷없이 내려온 밑도 끝도 없는 명령이었다.

군터뿐 아니라 명령을 들은 군졸들의 얼굴에 어쩔 수 없는 황당함이 떠올랐다. 오늘 밤에 적습이 있을 거라고? 예측도 이 정도면 거의 예언 수준이 아닌가.

하지만 군인에게 상명하복은 절대적인 규율. 아무리 황당한 명령이라도 일단 떨어지면 따를 뿐이다.

“괜히 허탕만 치고 밤 잠 설치는 거 아닙니까? 이러려고 사흘 동안 쉬게 했나?”

“…먼젓번에 네가 중앙군이나 우리나 다를 게 뭐냐고 했었지.”

“예? 예…뭐, 그랬었죠.”

“저들은 무슨 명령이든 군소리 없이 따른다. 하지만 우리는 무슨 명령이건 일단 구시렁대지. 그 차이다.”

말을 하며 군터는 슬쩍 말레이드 군을 훑어보았다.

그들을 보면 정예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었다. 오테론의 군대도 정예라고 불리지만 그들이 사나운 들개라면 저들은 잘 훈련된 군견 같았다. 어느 쪽이 강하냐를 떠나, 군인으로서 더 이상에 가까운 것은 분명 저들 쪽이었다. 군인이라면 응당 저래야 한다. 저런 것을 바로 정병의 군기라고 부르는 것일 터다.

“움직인다.”

구름이 하늘을 가린 밤. 미리 명령을 받았던 부대들이 은밀히 움직였다.

“대기.”

매복 지점에 도착하고 숨을 골랐다.

이제는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이런 것은 또 처음이군.’

전투를 준비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사냥꾼이 되어 덫을 놓고 사냥감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생소한 경험이었다.

* * *

얼마나 기다렸을까. 일순간 진지 쪽에서 크게 소란이 일었다.

“쳐라!”

“와아아아!”

그게 신호였다.

“간다.”

신호가 왔음에도 처음엔 은밀히 움직였다. 본격적으로 고함을 지르며 달리기 시작한 것은 진지를 에워싸고 포위했을 때였다.

“역적 놈들을 모두 쓸어버려라!”

누가 먼저 외쳤는지 모를 그 목소리가 터져 나옴과 동시에 어둠 속에 도사리고 있던 사냥꾼이 활을 겨눴다. 그리고 기세 좋게 덫을 향해 돌진했던 사냥감은 그야말로 대혼란에 빠졌다.

“하, 함정이다!”

깨달았을 때는 이미 화살 비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미세한 파공음조차 사방에서 떨치는 거친 고함 소리에 묻혔고, 달도 구름 뒤에 숨었다. 쏟아지는 화살 비는 암살자의 음습한 칼날처럼 은밀하고 날카롭게 반군의 목숨을 앗아갔다

“내가 길을 열겠다! 모두 나를 따르라!”

그때 한 사내가 크게 외치며 앞으로 나섰다. 갈팡질팡하던 반군들은 그를 중심으로 뭉쳤고, 포위망을 뚫기 위해 뛰쳐나왔다.

“놀랍군. 아직도 기세가 살아있다니.”

그들이 향한 곳은 성으로 향하는 방향이었다. 그러나 다른 곳에 비해 포위가 두터운 편은 아니었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곳에는 말레이드의 천인장 모그로프와 그가 이끄는 말레이드군이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모그로프는 똑바로 달려오는 반군들을 보고 혀를 차며 칼을 뽑았다.

“본래 이런 역할은 로탄이 맡아야 하건만. 그 녀석은 꼭 필요할 때는 없군.”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그의 부관이 말했으나 모그로프는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됐다. 직접 하는 칼부림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다만, 저런 놈들 쯤이야 우습지.”

이윽고 반군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모그로프는 선두에 선 당당한 체구의 사내와 마주섰다. 사내 역시 모그로프의 차림새와 기세를 보고는 달리던 것을 멈췄다.

“최단거리 길의 포위가 얕은 것을 알아차린다면 한 번 더 생각하여 돌아가리라 여겼다.

내가 널 과대평가한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의 용력에 자신이 있는 것인가.”

“가까운 길을 놔두고 굳이 돌아갈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뿐.”

사내는 젊었다. 기껏해야 30대 중후반 정도. 그 나이에 백인장이 되었다면 특출 난 자라 봐야 할 것이다.

“후자로군.”

하지만 그래봐야 세상 넓은 줄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일 뿐. 모그로프는 그가 별로 대수롭지 않게 보였다. 어리석은 사령관을 골탕 먹인 일 역시 딱히 칭찬해줄 만한 것은 아니다.

“만용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애송이.”

비릿한 웃음이 흐르고, 칼날이 맞붙었다.

* * *

반군이 도주로를 정하고 움직이기 시작하자 포위망도 그에 맞추어 좁혀졌다. 빠르게 도주하던 반군은 모그로프의 친위 병력과 맞붙었고, 정체되었다. 그 사이 포위병력은 거리를 좁혔다.

“뛸 필요 없다. 쉬엄쉬엄 가자.”

다른 부대들이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가는 반면, 막시밀리언 백인대는 어디 산보라도 나가듯 느긋했다. 선두에서 그들을 이끌어야할 대장부터가 의욕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래도 괜찮은 겁니까.”

보다 못한 군터가 나서서 이런 말을 할 정도였다.

“저 판에 끼자고? 아서게.”

그렇게 느긋하게 뛰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전투도 끄트머리에 다다라 있었다. 사방에서 조여 오는 몇 배의 병력에 반군은 무기력하게 무릎을 꿇었다. 그나마 이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와 몇몇 이들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싸우고 있었지만 그것도 거의 한계였다.

“크윽!”

모그로프와 칼을 맞대던 사내가 바닥을 뒹굴었다. 마른기침을 토한 그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결국…이렇게 끝인가.”

힘이 빠진 처량한 목소리.

“틀렸다. 이미 진즉부터 끝나 있었다. 너희가 제국에 반기를 들었을 때부터.”

모그로프가 검을 쥔 손목을 휘돌리며 다가섰다. 상처투성이인 사내에 비해 그의 몰골은 처음과 다를 바 없이 깔끔했다. 심지어는 숨소리마저 평온했다.

“제국에 반기를 든 적은 없다. 제국을 곯아 터지게 하는 탐관들에게 대항했을 뿐.”

사내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몰골은 비참했으나 눈빛만은 여전히 강렬했다.

“흔한 반역자들의 논리로군. 반역자 놈들 모두가 다 그럴싸한 대의를 말하기 마련이지.”

“흥. 알아달라고 빌지는 않겠다.”

“기개가 쓸 만하다. 네놈이 이 역적들의 수괴인가?”

“그런 표현은 거부하지. 하지만 이 가련한 이들을 꼬드긴 놈은 내가 맞다.”

사내의 눈이 다시금 돌아갔다. 바닥에 쓰러진 이미 죽은 이들, 죽어가는 이들, 그리고 무기를 버린 채 두려워 엎드린 이들. 아직까지 싸우고 있는 이들.

“별로 상심 한 것 같은 얼굴은 아닌데. 혹여 실패할 것을 예상이라도 했던 건가.”

“글쎄.”

떨리는 손이 검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마주보고 선 두 사내는 잠시 서로를 노려보다가 일순간 땅을 박찼다.

“쿨럭!”

간결한 선이 사내의 목을 그었다. 사내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모그로프는 핏물에 젖은 검을 털었다.

“너희 반역자들은 모두 죽을 것이다. 여기 있는 놈들도, 몰래 성을 빠져나간 놈들도.”

“크, 크허! 크르륵!”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멍한 표정이던 사내가 그 말을 듣자마자 거칠게 발작했다. 시종일관 무표정하던 모그로프가 처음으로 웃었다. 비릿한 웃음이었다.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저 성 안에 있던 놈들은 모두가 반역자다. 산 아래로 도망친 놈들은 모두 말발굽에 짓밟힐 거다. 그걸 구경해도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네 놈은 보지 못하겠군.”

“크…르륵…….”

사내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마지막 순간, 그의 얼굴은 절망으로 얼룩져 있었다.

* * *

“따분한 임무로군.”

“이 토벌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일입니다. 좋게 생각하시지요.”

부관이 어르는 말투로 그를 달랬다. 그럼에도 여전히 로탄은 못마땅한 기색을 팍팍 풍겼다. 그는 말 위에서 팔짱을 끼고 앉아 어둠 너머를 보았다.

산을 타고 내려오는 이들이 보였다. 그 수가 족히 천은 훌쩍 넘어 보였다.

“군인은 전장에 서야 한다. 사냥터에서 뛰어다니는 건 사냥꾼에게 맡기면 될 일이거늘.”

로탄은 스스로를 군인이며 무인이라 여겼다. 그렇게 되기를 바랐고, 그렇게 살아왔다.

그런 그였기에 상관이라 할 수 있는 카리비온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분명 존중받아 마땅한 군인이었으나 그 성정이나 수법이 너무 음흉했다. 그는 모든 판을 세밀하게 짜놓고 상대를 거기 올리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자였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제대로 된 전투 한 번 없이 토벌을 마무리 짓지 않았는가. 아무리 상대가 오합지졸이라고 해도 말이다.

“아무튼 나랑은 정말 안 맞는 양반이야. 이 로탄을 사냥개 취급 하다니.”

“하하하. 그래도 포로들을 챙기면 짭짤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냐!”

로탄이 노성을 터뜨렸다. 그 서릿발 같은 기세에 부관이 찔끔하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포로는 필요 없다! 모조리 죽여라! 늙은이, 계집, 애새끼 할 것 없이 전부! 병사가 아니었다 할지라도 놈들 역시 역적. 한 놈도 살려둘 수는 없다. 알겠느냐!”

“옛!”

로탄의 손이 올라갔다. 동시에 기마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용히 앞으로 나아가던 말발굽은 곧 땅을 찍어 부술 듯이 거칠게 앞으로 향했다.

“어?”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도주하던 이들이 말발굽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어렵지 않게, 자신들을 향해 똑바로 달려오는 기마대를 발견했다.

“구, 군대다!”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지는 이들.

“한 놈도 놓치지 마라!”

그러나 살육자들은 너무도 빠르고 잔혹했다.

창이 들을 꿰뚫고 말발굽이 내리 찍었다. 사방에서 처참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참혹한 살육제가 조용한 초원 위에서 벌어졌다. 그 참상에 달마저 고개를 돌린 듯했다.

* * *

“수급이 7천여 두라.”

울벤트는 종이의 내용을 읽다가 힐끔 카리비온을 보았다.

그는 언제나처럼 평온한 얼굴로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그 모습만 보고 있자면 도저히 간밤의 살육을 명한 자라 보이지 않았다. 7천 개의 목 중에 노인의 것이 1700여 개였고, 여인의 것이 2300여 개, 아이의 것이 1100여 개였다. 모두 간밤에 산 아래서 목이 베인 이들이다. 그것을 명한 자가 바로 눈앞의 초로였다.

어쩐지 등줄기가 섬뜩해진 울벤트가 헛기침을 내뱉었다.

“대승입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 모두의 공이오. 일단 오늘까지는 수색을 하도록 하고, 별 일이 없다면 내일 돌아가도록 합시다.”

“그리 하시지요. 사령관.”

카리비온이 싱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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