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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27화 (27/1,064)

<-- 베브로스의 난 -->

“하하하핫.”

떡하니 세워진 성을 보았을 때, 카리비온은 유쾌하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웃음이 나오십니까.”

“재미있지 않은가. 이런 곳에다 성을 세우다니. 인근 마을의 주민들이 다 어디로 갔다 했더니만 저기에 모여 있었구만. 나는 기껏해야 산적 놈들처럼 산채나 몇 개 짓고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지.”

“조잡하지만 우습게 볼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렇다 할 공성 장비도 가져오지 않았지 않습니까.”

“만들면 되지. 조잡한 성에는 조잡한 장비가 어울리지 않겠는가.”

“기껏해야 사다리입니다. 얼핏 보니 기세가 만만치 않던데…생각보다 피해가 커질지도 모릅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카리비온의 손이 수염으로 향했다.

“아닐지도 모르고.”

*

두 명이 죽었다. 세 명은 중상이고 그 중 한 명은 죽은 듯 누워 숨만 쉬고 있다. 나머지 둘은 쉬이 거동치 못할 정도다. 물론 나머지도 멀쩡한 이들은 없었다. 기본적으로 크고 작은 자상 한 두 개 씩은 다 입었다.

“…….”

전장에서 죽고 다치는 것이야 굳이 거론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흔한 일이건만, 그럼에도 이리 씁쓸한 것은 처음으로 마음을 쓴 부하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름 하나하나, 얼굴 하나하나 기억하고 갖은 이야기를 나누며 정을 준 부하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차. 가만히 계십쇼. 틀어집니다.”

프레드릭이 상처에 붕대를 감아주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힘을 주어 팽팽하게 당겨 매듭까지 지었다.

“다 됐습니다. 너무 빡빡합니까?”

“아니. 딱 좋군.”

누구도 죽은 이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일부러 과도하게 아무렇지 않은 척 대화를 나누다가도 그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으면 의식적으로 화제를 돌렸다.

“미친놈들 아닙니까? 어떻게 이런 산골짜기에다가 성을 지어놓을 생각을 했지?”

그런 의미에서 이런 것은 꽤 괜찮은 대화 주제였다. 저 성을 처음 보고 느꼈던 황당함은 모두가 공유하는 경험이었으니.

“저 성을 넘어야 되는 거잖아요. 그죠?”

“그…공성전이라고 하나?”

그렇다. 공성전.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심지어 그들 중 가장 실전 경험이 풍부한 군터조차도 생소한 개념이었다. 저 성을 어떻게 점령한단 말인가.

“듣자하니 사다리를 쓴다던데?”

“사다리? 사다리를 놓고 올라간다고? 그럼 올라가는 동안 머리 위에서 화살을 쏘거나 하면 어떻게 해?”“글쎄…방패를 들고 오르지 않을까?”

겪어 본 적이 없으니 별별 추측들이 다 나온다.

그들이 한가하게 앉아 모여 이런 이야기나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은 일단은 군 전체에 휴식 명령이 내려왔고, 그 후로도 어지간하면 전투에 투입되지 않을 것이란 귀띔이 있었기 때문이다.

“쉬라고 했지 않나. 다들 제대로 쉬고 있는 게 맞는 건가?”

“어엇!”

막시밀리언이 웃으며 다가오자 편히 앉아 있던 병사들이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막시밀리언은 그들 하나하나와 눈을 마주치며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이번에 너희가 큰 공을 세웠다. 돌아가면 큰 상이 있을 것이다. 혹여 그렇지 않다면 내 사비라도 털어 후하게 상을 내리겠다.”

“가, 감사합니다.”

목소리가 감격에 차 떨렸다. 병사들에게 있어 그들의 백인대장은 익숙하면서도 먼 존재였다. 그의 부하라는 자각은 있지만 그러면서도 멀게만 느껴진다고 할까. 그런데 그런 그가 직접 어깨를 두드리며 다정하게 치하하니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막시밀리언은 병사들 하나하나와 짧게나마 이야기까지 나누며 치하한 뒤 군터를 따로 불러내었다. 그들은 막시밀리언의 막사로 향했다.

“군터. 정말 고생 많았네. 자네가 앞장서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면 해낼 수 없었을 것이야.”

‘해냈다라.’

군터는 적절하게 겸손하게 대꾸하며 그 말을 곱씹었다.

무엇을 해냈다는 걸까. 부하들을 사지에 몰아넣은 멍청한 사령관을 구한 것? 그것이 해냈다는 것의 의미라면 그는 별로 기쁘지 않았다.

“저 혼자 한 일이 아닙니다. 코르넬 십인장이 함께 해주지 않았다면 얼마 못 가 목이 떨어졌을 겁니다.”

언제나처럼 막시밀리언의 뒤편에 서 있던 코르넬의 무덤덤한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설마 거기서 자신의 이름을 거론하며 공을 돌릴 줄은 몰랐던 듯, 그는 살짝 당황하는 기색마저 보였다.

“하하하! 겸손하군! 좋아, 좋아. 코르넬에게도 물론 치하할 것이다. 하지만 정말 기대해도 좋네. 내 자네에게는 반드시 후한 상급을 내릴 것이니.”

“감사합니다.”

“그래, 그래. 돌아가 푹 쉬도록 하게. 아마 당분간은 우리가 전투에 투입되는 일은 없을 것이야.”

“예.”

*

사령관 울벤트의 막사에는 막사의 주인인 울벤트, 그리고 로탄을 제외한 천인장 셋이 모두 모여 앉아 있었다.

“언제까지 가만히 앉아 시간만 보내야 합니까. 휴식은 이틀이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울벤트는 다소 불퉁한 목소리였다. 몸에 칭칭 동여맨 붕대와 그의 불편한 심기가 무관하지 않았다.

그에 반해 카리비온은 평온 그 자체였다.

“조금만 더 쉬게 하시지요. 병사들 대다수가 한 달이 넘게 행군했습니다. 거기에 곧바로 전투까지 치렀으니, 이틀 가지고는 부족하지요.”

“끄응. 허면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겝니까?”

첫날의 뼈저린 실책을 저지른 이후, 울벤트의 기는 상당히 죽어 있었다. 막시밀리언과 카리비온의 지원이 없었다면 지금쯤 자신의 목이 붙어 있을 수 없었으리란 것을 울벤트는 잘 알았다. 아무리 그가 오만하다 해도, 목숨 빚을 진 데다 실력행사까지 확실하게 한 카리비온을 상대로 이 이상 까칠하게 굴기는 힘들었다. 그저 삐친 아이처럼 작게 투덜대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카리비온이 싱긋 웃었다.

“시간을 보내는 것을 너무 나쁘게 생각지는 마십시오. 지금 이 순간에도 전세는 꾸준히 우리 쪽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음?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저 반군은 본래 하나의 무리가 아닙니다. 그저 먹고 살기가 어려우니 들고 일어섰고, 그러고 나서 뜻이 맞는 이들끼리 뭉친 것에 불과하지요. 저들을 한데 묶는 결속력이라는 것은 그저 분노라는 감정 하나일 뿐입니다.”

진영 내에서도 높은 지대에 위치한 울벤트의 막사에서는 반군의 성이 한 눈에 보였다. 카리비온은 지그시 성을 주시했다.

“분노라는 것은…한 번 생기면 불처럼 활활 타오르지만, 또한 불처럼 쉽게 사그라지기 마련입니다. 가만히 두고 보십시오. 지금은 저렇게 눈에 불을 켜고 우리를 노려보고 있지만, 하루하루 날이 갈수록 저들은 분노를 잃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두려움을 얻겠지요. 성 안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는 현실, 비참한 죽음이 코앞까지 왔다는 현실에 매일 밤 악몽을 꾸게 되겠지요. 그때가 되면 이 싸움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울벤트가 어렵사리 입을 뗐다.

“자신만만하시군요. 정말 그리 되리라 확신 하십니까.”

“물론입니다. 근본 없는 오합지졸이란 것은 본디 그런 것이니까요.”

카리비온은 여전히 성을 보고 있었다.

조잡하게 지어진 석성에서는 악에 받친 반군의 험악한 기세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러나 카리비온의 눈에는 그 모든 것이 상처 입은 짐승의 마지막 발악으로 보였다.

굳이 덤벼들지 않고 가만히 놔두면 먹이를 먹지 못한 짐승은 힘을 잃어갈 것이다. 속살이 드러난 상처는 곪을 것이고, 썩어 들어갈 것이다. 그때가 되면 가련한 짐승은 이를 드러내기는커녕, 제대로 짖지도 못하리라.

*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사흘이 지나고 나흘이 지났다.

성을 포위한 채 아무런 공격이나 별 다른 움직임 없이 시간을 보내기만 하자 병사들도 무언가 이상하다고 여겼다. 물론 그들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었다. 그간 쌓인 피로를 풀 수 있는 꿀 같은 휴식의 날들이었으니 말이다.

“대장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쉬게 해주는 거겠지.”

“역시 그거겠죠? 그럼 언제쯤 다시 전투가 시작될까요?”

“글쎄.”

군터도 딱히 들은 이야기는 없었다. 그저 당분간은 쉬라는 이야기 뿐. 지휘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무슨 생각이 있는 거겠지.’

이따금씩 호위 십여 명을 대동한 채 진영 내 가장 높은 언덕에 오르는 지휘관이 있었다. 그가 바로 현재 실질적으로 토벌군을 이끌고 있다는 카리비온 하야신이라는 것을 군터는 잘 알고 있었다. 중앙군을 이끌고 반군의 포위망을 송두리째 박살낸 그의 모습은 아직까지도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지금 또 한 번 그가 언덕을 올랐다. 그는 멀찍이 있는 반군의 성을 바라보며 시간을 죽였다. 멀리서 얼핏 보면 느긋하게 산보나 하는 것 같지만, 군터는 그런 그의 행동이 결코 평범하지 않다 여겼다.

저 카리비온 하야신이라는 귀족 천인장은 비범한 자다. 그렇다면 그의 저런 행동에도 무언가 의미가 있으리라.

*

“흐음.”

그는 하루에 세 번씩 언덕을 올랐다.

굳어 있는 몸도 풀고, 적의 동태도 살피니 하나의 간단한 행동으로 두 가지 이득을 취함이다. 그렇기에 카리비온은 언덕을 오를 때마다 가벼운 즐거움을 느꼈다.

지난 나흘간 성벽 위로 보이는 반군의 분위기라던가 움직임은 대동소이했다.

그런데 오늘, 두 번째로 언덕에 올라 성벽 위를 보고 있자니 평소와는 다른 것이 보였다.

그 차이점이라는 것은 아주 미세하여, 눈썰미가 좋은 이가 아니라면 눈치 채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카리비온의 눈썰미는 그의 상관인 아란딜 페레모어도 인정할 만큼 빼어난 것이었다. 그의 눈에는 전날과 다른 반군의 동태가 확실하게 보였다.

“굳어 있구나.”

“달아날 길도 없이 포위를 당했는데, 당연히 굳어있지 않겠습니까.”

“아니. 다르다. 사람의 몸뚱이야 다양한 이유로 굳는다. 차이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를 살펴야 하는 법.”

첫날과 둘째 날, 그리고 어제인 셋째 날까지는 두려움이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새끼마냥 벌벌 떨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악에 받쳐 억지로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묘한 긴장감이 있지 않은가.

‘머리를 쓰지 않는 바보였다면 유인책 같은 것을 떠올릴 수 없었겠지.’

더군다나 어중이떠중이였다지만 어쨌든 한 차례 토벌군을 격퇴한 전적까지 있지 않은가. 낮춰 볼 상대는 아니라는 뜻이다.

‘이쯤 해서 수를 내리라 짐작했다.’

수염을 쓸던 그가 슬쩍 고개를 꺾어 하늘을 보았다.

구름이 제법 깔려 있고 바람이 없으니 밤이 되어도 다 가시지는 않을 듯 보였다.

“날도 좋고…오늘 밤에 들이 닥치겠구나.”

“야습…말씀이십니까.”

“그래. 오늘 밤이다. 준비하라 일러라.”

“예!”

언덕을 내려가는 카리비온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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