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25화 (25/1,064)

<-- 베브로스의 난 -->

“적습이다! 반란군 놈들이 쳐들어왔다!”

처음에는 작았던 외침.

그 소리에 몸을 벌떡 일으켰을 때 들릴 듯 말듯했던 소리는 천둥이 되어 있었다.

“적이다!”

“무, 뭐야?”

“무슨 일이야?”

피로에 짓눌려 숙면을 취하던 부하들이 하나 둘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그간의 경험이 헛되지 않아 비몽사몽의 와중에도 늘쩡대는 녀석은 없었다. 부하들이 막 눈을 비비며 일어났을 때, 군터는 서둘러 나올 것을 명하고 막사 밖으로 뛰쳐나갔다.

“우왕좌왕하지 마라! 자리에서 대기하라!”

막사를 나왔을 때, 막시밀리언은 이미 검을 빼들고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의 지휘 아래 막시밀리언 백인대는 한데 모여 숨을 가다듬었다.

“적은 어디에 있는 겁니까?”

군터가 다가가 물었다.

“모르겠네. 소리는 요란하지만 교전이 있는 것은 아니야.”

“…….”

주변은 어두컴컴했다. 진지 곳곳에 있는 횃불이 그나마 빛을 냈지만 진지 바깥쪽은 비추지 못했다.

“불부터 꺼!”

막사 몇 개에 불이 붙었는지 부산하게 움직이는 몇 병사들이 눈에 띄었다. 그게 전부였다. 막시밀리언 백인대처럼 전투태세를 갖추고 대기하는 부대가 여럿이었으나, 정작 싸워야 하는 적은 보이지 않았다.

소란은 곧 가라앉았다. 하지만 병사들은 다시 잠자리에 들 수 없었다. 긴장으로 굳었던 몸은 좀처럼 휴식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뜬눈으로 밤을 새워야 했다.

* * *

“약아빠진 짓을!”

울벤트는 그야말로 대노했다. 야밤에 있었던 급습은 그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다. 병사들이 크게 상하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열이 올랐다. 경계를 강화해야 한다는 조언을 뿌리쳤던 것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이왕 쉬게 할 거라면 푹 쉬게 하는 것이 좋다는 그의 생각은 기병 전력이 거의 전무한 반란군이 야습을 할 리 없으리란 예상에 근거했다.

실제로 반란군에게는 기병이 거의 없었다. 거의. 기껏해야 100기도 되지 못할 터였다.

하지만 그 100기도 안 되는 기병으로 반란군은 야습을 감행했다. 그들은 막사 여섯 개를 불태웠으며, 그 뒤로도 진지 주변을 잠깐 동안 맴돌다가 유유히 사라졌다.

사상자는 없었다. 죽은 이도 없었고, 다친 이도 없었다. 상한 것은 오로지 낡은 막사 여섯 개뿐이었다. 그놈들이 열통이 터지는 것은 그런 발칙한 짓거리를 하고 달아날 때까지 막지 못했다는 점이다. 수가 적어 눈에 띄지 않은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들이 워낙에 은밀하게 움직인 탓이 컸다. 초원의 기마궁수 흉내를 낸 것이다.

“병사들이 잠을 설쳐 피로가 심합니다.”

카리비온이 말했다. 그는 이 상황이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무척이나 태연했다. 잠도 편하게 잤는지 얼굴에 피로도 별로 없어 보였다. 그런 그를 보며 울벤트는 부끄러움을 넘어 수치심마저 느꼈다.

‘젠장!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그는 냉정을 유지하는 척,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알고 있습니다. 병사들을 쉬게 하지요. 또한 귀공의 말씀대로 경계를 튼튼히 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그런 그의 선언은 얼마 가지 않아 위기를 맞았다.

“적이다!”

너른 평야 멀리, 무늬 없는 깃발을 든 군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천박한 도발이로군!”

울벤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싱거운 야습에 이어 이제와 모습을 드러낸 저의를 모르지 않았다.

“피로한 군대라 하여 한 번 해볼 만하다 여긴 것인가? 우습군!”

“응전할 생각이십니까.”

“물론입니다. 하지만 놈들의 뜻대로 움직여주지는 않을 것이오.”

“허면?”

“우리는 이 자리에서 대기할 것입니다. 놈들이 먼저 움직인다면 기꺼이 싸워주겠지만, 우리가 먼저 놈들의 장단에 놀아날 일은 없소!”

제법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 판단이 제대로 된 상황파악에서 나온 것이든, 아니면 상대의 의도대로 끌려가기 싫다는 오기에서 나온 것이든, 어쨌거나 그것은 현 상황에서 내릴 수 있는 가장 적절한 판단이었다.

‘자, 이쪽은 어울려주지 않겠다는데…이제 어찌할 셈인가. 변죽만 올릴 것인가, 아니면…….’

카리비온은 평야 너머에 도열한 반군을 눈에 담았다.

* * *

뿌우우-!

뿔 나팔 소리가 평야를 가득 매웠다. 동시에 멈춰 있던 군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길게 늘어선 채 평야를 가로지르는 깃발 없는 군대.

“어처구니가 없군.”

울벤트는 온전히 몸을 세웠다. 병사가 달려와 그가 앉아 있던 의자를 치웠다.

“좋다! 내가 그러했듯 너희 또한 자만의 대가를 치르리라!”

애마에 오른 그가 손을 치켜들었다. 그의 신호에 붉은 깃발이 휘날렸다. 전고가 울리며 진군의 신호를 냈다.

둥-! 둥-! 둥-!

“진군하라!”

“진군! 진군이다!”

진형은 이미 갖춰져 있었다. 중군에는 울벤트의 살마드군 1천과 카리비안 천인대 1천으로 이루어진 2천. 좌군과 우군에는 자이론 천인대와 로탄 천인대가. 마지막으로 후군에는 모그로프의 1천이 자리했다.

“선봉은 이몸에게 맡겨 주십시오!”

로탄이 외쳤다. 그의 얼굴은 전장의 열기에 벌써부터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울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우군부터 나아간다!”

울벤트의 허락이 떨어지자 로탄은 크게 웃었다. 그는 자신의 뒤에 도열한 병사들을 돌아보았다.

“선봉은 우리의 것이다! 전공 또한 모두 우리의 것이다! 사양할 필요 없다! 마음껏 날뛰어라!”

로탄군 1천은 삼분지 1이 기병이었다. 그 말인즉, 기병만 300여 기라는 뜻이다.

300여의 기마가 앞에 서고 보병이 뒤를 받쳤다. 어느 정도 보조를 맞추어 전진하던 로탄군은 정면의 반군이 어느 정도 거리 안에 들어왔을 때 둘로 나뉘었다. 앞에 섰던 기병이 일제히 튀어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300여기의 기병. 그 선두에는 로탄이 있었다. 그는 사나운 눈을 치켜 뜬 채 적의 움직임을 살폈다.

“귀여운 짓을.”

반군이 밀집 대형을 갖추며 장창을 앞으로 내미는 것이 보였다. 기본에 충실한 대 기병진이다.

“그대로 달려라! 한 번 피하고 간다!”

“예엣!”

두두두!

우렁찬 말발굽 소리가 평야에 울려 퍼졌다.

이윽고, 기다리던 순간이 왔다.

“온다!”

가느다란 소리. 그리고 수백 발은 되어 보이는 화살이 솟아올랐다.

“전속돌진! 화살을 지나치고 우로 선회한다!”

“전속돌진!”

그 동안의 질주가 장난이었다는 듯, 기병대의 속도가 한층 빨라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휘는 화살비는 로탄의 기병대가 다 지나치고서야 텅 빈 평야에 꽂혔다.

“어엉?!”

떨어지는 화살을 피하고 우로 선회한 로탄은 이어지는 반군의 움직임을 보고 당혹에 빠졌다.

“뭐냐, 뭐냐! 어처구니없는 놈들이군!”

실로 어처구니가 없게도, 반군은 꽁지가 빠져라 도망치고 있었다. 추격을 대비하여 어느 정도 대열은 유지할 법도 한데, 그런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지 정말 말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고 있었다.

“어이가 없군. 기세 좋게 뿔 나팔을 불 때는 언제고.”

“추격합니까?”

“추격?”

로탄이 눈을 찡그렸다.

마주보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반군은 생각보다 처음의 위치에서 전진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달아나는 그들의 선두는 이미 산의 초입에 이르고 있었고, 후미 역시 지금 쫓아본들 따라잡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둥-! 둥-!

그때 뒤따라오던 본군에서 전고가 울렸다. 추격의 신호다.

“사령관의 명령이군. 쫓는다!”

“옛!”

멈췄던 기병대가 다시 한 번 질주했다.

“어차피 산으로 접어들면 달릴 일은 없다! 체력을 아끼지 마라!”

전속력으로 움직인 기병대는 산에 접어들기 전 후미의 반군을 가까스로 따라잡았다. 그들은 등을 보이며 달아나는 반군들을 마음껏 살육했다.

“으아악!”

마지막으로 달아나던 자의 등을 억센 말발굽이 짓밟았다. 우드득 소리를 내며 척추가 부러지고, 꺾어진 뒷목을 창날이 관통했다.

“고작 이게 끝인가.”

로탄은 허탈하게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워 있는 시체는 기껏해야 서른 여가 전부였다. 그렇게 신나게 말을 달려 잡은 게 고작 서른 정도인 것이다.

“뭐하는 거요! 왜 놈들을 쫓지 않소!”

어느새 뒤따라온 울벤트가 붉은 얼굴을 하고서 언성을 높였다. 그에 로탄이 떨떠름하게 답했다.

“이후부터는 산지입니다. 기병이 움직이기에는 제약이 많지요.”

“보병도 있지 않소!”

이쯤 되면 숫제 생떼나 다름없었다. 로탄은 짜증을 숨기지 않았다.

“고작 600명 남짓으로 추격을 하라는 말입니까. 도망치고 있다 하나 적의 수 또한 천이 넘습니다.”

“그렇다고 놈들이 그냥 도망치게 내버려둔단 말이오!”

“아직 멀리 가지 못했을 테니, 뭣하면 직접 쫓으시지요.”

“안 그래도 그럴 참이오!”

울벤트가 씩씩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적을 추격한다! 따르라!”

살마드 군과 오테론 군이 산지를 오르기 시작했다.

“너무 성내지 말게.”

잔뜩 얼굴이 붉어진 로탄을 카리비온이 달랬다.

“기본도 안 된 작자가 아닙니까! 저러다가 매복이나 당해 크게 낭패를 볼 겁니다!”

“그렇겠지.”

“그러…예?”

로탄이 멍한 얼굴이 되어 카리비온을 바라보았다.

“당할 테지. 매복.”

그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로탄은 자신이 뭔가 잘못 들었나 싶어 멍한 얼굴로 눈만 끔뻑였다.

“지휘관은 잔뜩 열이 올라 앞뒤 분간이 안 되고 있고, 그를 따르는 병사들은 원행에 피로해져 전투력이 급감한 상태지. 거기에 전장은 상대에게 익숙한 험지. 매복계를 쓰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때와 장소가 아닌가.”

“그리 생각하시면서 어찌 말리지 않으셨습니까?”

“말렸다 해도 쉽게 듣지 않았을 것이네.”

그 때 또 다른 천인장, 모그로프가 입을 떼었다.

“저 오만하고 무능력한 자의 기를 꺾어두실 참이군요.”

“맞네.”

카리비온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의 전투를 위해서는 저 모자란 작자가 적당히 죽어 있는 편이 낫네. 정말 죽는다고 해도 뭐…큰 문제는 없지. 어차피 그나 그 밑의 오합지졸들이야 있으나 마나이지 않은가.”

“그렇긴 합니다만…정말 저 자가 죽기라도 하면 뒷말이 나올 겁니다. 어쨌거나 그는 리에론 가문의 직계이며 이 토벌군의 수장이니까요.”

“그 말이 맞아. 그러니 조금 쉬다가 천천히 따라가세나. 정말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말이야.”

노련한 군인은 선선한 웃음을 머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