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브로스의 난 -->
3번째 종소리와 함께 자이론 천인대는 오테론을 나섰다.
3번째 종소리와 함께 자이론 천인대는 오테론을 나섰다.
오테론 천인대의 기병대가 좌우에 포진했고 보병들은 그 사이에서 열을 맞추어 움직였다.
“솔직히 좀 무섭기도 했는데, 괜한 걱정이었군요.”
프레드릭이 말했다.
말이 천 명이지, 그 정도의 인원이 움직이는 것을 그들이 언제 보았겠는가. 천인대 하나라면 백인대가 열 개고 십인대가 백 개인 거다.
주위 어디를 둘러보아도 사람이며, 그들이 모두 아군이다. 무수한 아군 속에 일부로 있으니 앞으로 싸우게 될 상대가 누구든 질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터 역시 답은 안 했지만 비슷한 마음이었다. 스치는 바람이 더 이상 차게 느껴지지 않았다.
말레이드의 3천 병력과 합류하던 날. 그런 마음은 정점을 찍었다.
‘장관이군.’
말레이드의 3천 정병은 그야말로 정병(精兵)이었다. 통일된 무장과 정갈한 기세는 3천이라는 무수한 숫자의 병사들이 하나인 것처럼 보이게 했다. 끝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늘어선 대병력을 보며 수보다도 그 차분함에 놀랄 정도였다.
“대단하긴 하네. 역시 중앙군이라 이건가.”
지금 합류한 3천을 포함해 말레이드에 주둔하고 있는 모든 병력은 엄밀히 말해 바크렌 군이 아니다. 그들은 황제의 군대다. 오테론 군이나 말레이드 군이나 제국군이며 제국의 주인인 황제의 군대이지만, 말레이드 군은 더 좁은 의미에서 황제의 군대다. 그들의 소속은 바크렌이 아니라 황도 리비암으로, 흔히 중앙군이라 불리는 그들은 무수한 제국군 중에서도 정예로 손꼽히는 정병 중의 정병이다.
과연 그런 이름값을 하는 것인지, 그들은 들고 있는 깃발부터 타고 있는 말, 걸친 무구들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모두 고급스러워보였다.
두 군대가 마주보고 만났을 때, 지휘관들이 앞으로 나섰다. 오테론 군에서는 자이론이 홀로, 말레이드 군에서는 3명의 지휘관이.
“디클라이 장군 휘하, 천인장 자이론입니다.”
“황제폐하의 충성스러운 칼, 카리비온 하야신이오.”
“황제폐하의 충성스러운 칼, 모그로프입니다.”
“황제폐하의 충성스러운 칼, 로탄이외다.”
자이론은 카리비온 하야신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귀한 분이셨군요.”
“그리 어렵게 대하실 필요 없소. 내 이름은 카리비온 하야신이지만, 직급은 그대와 같은 천인장일 뿐이니.”
“그렇다한들…….”
편히 대하라는 말이 그냥 하는 말이라는 것은 자이론도 알고, 카리비온도 알았다. 그저 예의상 하는 말일 뿐이다. 당장 그의 양 옆에 있는 같은 직위의 모그로프와 로탄도 은연중 카리비온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지 않은가.
귀족이란 것은 그런 것이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신분은 후천적으로 쌓아올린 모든 것에 우선했다. 물론 장군쯤 되면 다르겠지만 제국에 귀족이 아닌 장군은 없으니 의미 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게다가, 설령 카리비온이 귀족이 아니라 해도 편히 대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같은 천인장이라고 해도 중앙군의 천인장과 지방군의 천인장은 그 위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군의 지휘는 카리비안이 맡는 모양새로 이어졌다. 살마드의 병력과 합류하기 전까지 카리비안이 군의 선두를 이끌었다.
“반갑소. 이번 토벌군을 이끌게 된 울벤트 리에론이오.”
살마드의 1천 병력을 이끌고 온 자는 상당히 젊었다. 많아봐야 4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였으니 지휘관들 중 가장 젊은 셈이다. 그러나 가장 젊은 그가 바로 이번 토벌군의 총지휘관이었다.
‘리에론이라…알만 하군.’
리에론 가문은 높으신 분들의 이야기에 관심 없는 군터조차 익히 알고 있을 정도로 명망 높은 가문이었다. 바크렌의 군부를 양분하고 있는 두 명의 장군 중 한 명이 바로 리에론 가문의 수장이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또한 말로는 양분이라고 하지만 실상 또 다른 한 축인 디클라이 리고스트가 성주가 자신의 체면치레를 위해 내세운, 퇴임이 얼마 남지 않은 고령의 장군임을 고려하면 리에론 가문은 바크렌 군부의 유일한 수장이라고 봐도 좋았다.
때문에 저 울벤트 리에론이라는 자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 없었으나, 그가 5천 대병력의 총지휘를 맡게 된 사연은 대충 미루어 짐작이 갔다.
‘저 자가 유능하길 바라야겠군.’
군터는 그가 가문의 후광을 등에 업은 자라고 해도, 그의 군재가 그가 걸친 멋들어진 갑옷의 반만큼이라도 뛰어나길 바랐다. 지휘관이 무능하면 그 대가는 밑의 군졸들이 치르게 되므로.
*
울벤트는 카리비온과 나란히 말을 몰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몇 번씩이나 호쾌하게 웃곤 했는데, 그의 모습만 보면 이미 토벌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개선하는 것 같았다.
“고명하신 아란딜 페레모어 장군의 심복, 카리비온 하야신 공의 명성은 내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울벤트는 카리비온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즐거웠다. 그는 개인적으로도 숱한 전공으로 이름을 떨친 유명한 군인이었으며, 무엇보다 그 아란딜 페레모어의 심복으로 유명했다. 3명의 천인장 중 하나라지만 실상 말레이드의 3천군을 이끄는 책임자가 누구인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3천의 병력을 맡길 정도로 아란딜 페레모어에게 신임을 받고 있다. 울벤트는 카리비온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존재감이라던가 격 같은 것이 상승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번 토벌은 쉽게 끝날 것입니다. 회전 한 번이면 끝날 테지요. 놈들이 감히 회전을 시도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일전에 한 번 토벌이 실패하지 않았습니까. 만만히 볼 상대는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하! 그거야 범장과 약졸들이 만든 어처구니없는 실책이었지요. 이번에는 다릅니다. 나도 있고, 무엇보다 공이 이끄는 황군 3천이 있지 않습니까.”
“과분한 말씀입니다.”
짐짓 웃는 얼굴로 대하면서도 카리비온은 내심 혀를 찼다.
‘어리석은 자.’
적을 얕보는 태만한 마음도 그렇지만, 그 뒤의 말도 어처구니가 없다. 범장은 그렇다 쳐도 약졸은 뭐란 말인가. 바크렌에 속한 자이면서도 자신들의 군대를 약졸이라 비하하다니. 자기 얼굴에 침을 뱉어도 유분수이지, 어찌 그런 말을 입에 담는단 말인가. 설령 그런 말을 할 수 있다 해도 가문의 후광으로 지금의 자리에 오른 그가 할 말은 결코 아니었다.
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울벤트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반란군이라 하나 제대로 훈련 받은 병사는 기껏해야 삼백 남짓입니다. 나머지는 반란군에 동조한 무지렁이들이지요. 농사나 짓고 우유나 짜던 놈들이란 말입니다. 그런 놈들에게 지다니. 바크렌 군의 이름에 똥칠을 해도 유분수지. 허, 참.”
카리비온은 울벤트의 말에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어쨌거나 그는 바크렌의 군부를 이끄는 명망가의 일원이었으며, 무엇보다 이 토벌군을 이끄는 사령관이었다. 굳이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여 좋을 일은 없었다.
*
베브로스는 살마드의 동남쪽에 위치한 곳이다. 바크렌의 곡창지대라 할 수 있는 곳으로, 초원의 바람이 거의 미치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대체 언제 도착하는 거야.”
“빌어먹을. 발이 퉁퉁 불었다고.”
살마드에서도 보름 이상 걸리는 길이다. 하물며 오테론에서야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장장 1개월이 넘게 행군한 것이다. 그마저도 쉬엄쉬엄한 것이 아니라 속보에 가까울 정도로 빠르게, 지속적으로 이동했다. 피로가 거의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 군터조차도 다소 몸이 무거울 정도였으니 다른 병사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조금만 더 참아라. 곧 도착한다 했으니 그때부터는 휴식이 있겠지.”
그렇게 부하들을 다독일 때였다.
뿌우우-!
긴 뿔 나팔 소리가 귀를 울렸다. 느슨해졌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적이다! 반란군 놈들이다!”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가 소란을 부추겼다. 그러자 지휘관들이 나섰다.
“적들이 우리를 발견했을 뿐이다!”
“소란 떨지 마라! 진형을 갖춰라!”
“자이론 천인대! 움직여라!”
그 즈음하여 막시밀리언도 검을 뽑아들고 외쳤다.
“막시밀리언 백인대! 움직인다!”
자이론 천인대는 군의 후미에 있었다. 사전에 숙지했던 대로 움직이며 진형을 갖추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드디어 시작인가?”
“별 일 없겠지?”
“머릿수만 오천이다. 뭔 일이 있겠냐!”
부하들의 불안한 마음이 목소리에서 고스란히 묻어났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본격적으로 싸움이 시작될 때까지 쉬지 않고 나불댈 것 같았다.
“적이 보이지도 않는 곳에 있는데 그렇게 겁을 집어먹나. 너희가 물건 달린 사내놈들이라면 입 다물고 있어라.”
실전을 처음 겪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긴장할 틈도 없이 시작되는 것과,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는 압박감에 젖어 들어가는 것은 상당히 다른 경우였던 모양이다. 사방에서 터져나오는 고함소리를 들으며, 부산하게 움직이는 군의 대열 속에 있자니 실전을 꽤나 겪은 군터 자신조차도 색다른 느낌을 받고 있었다.
*
“쥐새끼 같은 놈들.”
울벤트는 멀어지는 적의 뒷모습을 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생각 같아서는 기병을 보내 저 쥐새끼들을 잡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가파른 언덕을 올라 이미 멀어진 놈들을 잡기도 힘들뿐더러, 그렇게 잡는다고 해도 별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뿔 나팔은 크게 울렸고, 덕분에 반란군들은 군대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탐마(探馬)들이 밥값을 못했군요.”
“언덕 지형인데다 수풀도 제법 있습니다. 그런 곳에 저렇게 몇 명 정도가 숨어 있었다면 발견하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카리비온이 두둔하자 울벤트도 더 말하지 않았다. 사실 그도 같은 생각이었다. 다만 탓할 대상이 필요했을 뿐.
“이 구릉을 넘고 진지를 펴도록 하지요.”
“좋은 생각이십니다.”
‘미리 좀 그러지 그랬나.’
이제와 군사들에게 휴식을 줘야겠다는 건가. 적과의 교전이 눈앞에 다가왔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졌나 보다. 그도 눈이 있으니 병사들의 상태를 보았을 것이다.
“오늘은 이곳에서 쉰다! 진지를 펴라!”
“진지를 펴라!”
구릉을 넘어 너른 평야가 모습을 드러내자 울벤트가 명령을 내렸다. 긴 행군에 지칠 대로 지쳤던 병사들이 밝은 얼굴로 움직였다.
*
“이랴!”
카리비온은 호위병들을 거느린 채 말을 타고 구릉의 가장 높은 곳에 올랐다.
주변 지형이 한 눈에 보였다. 널찍한 평야와, 그 너머에 보이는 산.
“흠.”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그의 부관이 물었다. 카리비온은 답하지 않고 수염을 쓸었다.
“매복을 하려면 이곳이 적소였다. 하지만 하지 않았지.”
“이전의 토벌군이 그렇게 당했다 들었습니다. 같은 방법을 다시 써먹을 생각은 하지 못했겠지요.”
“그래. 적의 지휘관은 머리를 쓸 줄 아는 자다. 그런 자가 설마하니 5천 대병을 상대로 정면으로 부딪칠 생각은 아닐 테고…….”
수염을 쓰는 손길이 느릿해졌다.
“탐마는 부지런히 돌렸다. 우리의 움직임은 조금 전에야 제대로 확인한 것일 터.”
노회한 눈이 평원 너머의 산을 향했다. 그는 아마도 그곳에 있을 적의 지휘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뿔 나팔은 제법 가까운 거리에서 울렸다. 그렇지 않은가?”
“예? 예. 그렇습니다. 소리가 크게 울렸지요. 구릉이 아니었다면 생포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래. 그렇지.”
카리비온의 손이 고삐로 옮겨갔다.
“어쩌면…생각보다 긴 밤이 되겠군.”
주름진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