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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23화 (23/1,064)

<-- 베브로스의 난 -->

이른 새벽. 일단의 기마가 오테론의 성문 앞에 멈춰 섰다.

“누군가! 소속을 밝혀라!”

성벽 위에 있던 병사가 횃불을 들며 말했다.

“살마드에서 온 급보요! 속히 문을 열어주시오!”

“살마드……?”

병사는 눈을 가늘게 좁히며 깃발을 확인했다. 날이 아직 어두워 자세히 분간은 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얼추 살마드의 깃발이 맞는 것 같았다.

“맞는 것 같군. 문 열어!”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이 서서히 들려 올라갔다.

* * *

열흘의 휴가 마지막 날이었다.

오늘도 군터는 새벽부터 홀로 나와 창을 휘두르고 있었다.

웃통을 벗고 새벽의 찬바람을 맞으며 구슬땀을 흘리던 도중, 귀를 간질거리는 느낌에 그는 잠시 훈련을 멈췄다.

‘소란스럽군.’

자세히 귀 기울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미세하지만, 군터는 성내가 묘하게 평소와 달리 소란스럽다는 것을 알아챘다.

‘뭐지?’

의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렸다. 다시금 훈련을 재개하기 무섭게 한 병사가 헐레벌떡 뛰어왔기 때문이다.

“군터 십인대장님! 막시밀리언님 대장님의 전갈입니다! 속히 댁으로…….”

“알겠다.”

즉시 벗어두었던 옷을 챙겨 입고 병사의 뒤를 따랐다. 그가 막시밀리언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반 수 정도의 십인장들이 모여 있었다. 빈자리에 앉아 조금 기다리고 있으니 나머지 반도 곧 도착했다. 하나같이 잠이 덜 깬 모습들이었다.

모두 모이자 막시밀리언이 박수를 쳐 어수선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그 역시 조금은 피로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다 왔군. 쉬는데 불러내어 미안하네. 실은 나도 조금 전에 불려가 이야기를 들은 참이거든.”

“불려갔다 하시면…….”

십인장들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백인장인 막시밀리언을 부를 수 있는 자라면, 그들이 알기로는 이 요새에 세 명 뿐이었으니까.

“자이론님이 호출하셨지. 나뿐만 아니라 휘하의 모든 백인장들을.”

“으음.”

천인대장 자이론. 그는 이 오테론에서 네 손가락 안에 드는 권력자였다. 기껏해야 말단 병사를 벗어났을 뿐인 그들로서는 감히 고개를 들어 쳐다볼 수도 없는 인사인 것. 그런 그의 이름이 나오자 자연히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얼마 전…이라고 하기는 그렇군. 한 반 년 전쯤에 베브로스에서 난이 일어났었지. 주동자는 당시 그 부근에서 복무하던 백인대장이었는데, 초기에 진압하는 데 실패하여 그 세가 점차 커졌다네. 그래서 얼마 전에 토벌군이 출병했는데…처참하게 실패했다 하네. 3천 토벌군 중 반 정도 밖에 돌아오지 못했다더군.”

“으음.”

병력의 반이 날아갔다? 그 어떤 말도 덧붙일 수도 없는 대패다. 바크렌의 정규군이 한낱 반란군에게 패배한 것이다. 그리고 더 심각한 문제는, 무려 3천이나 되는 군대가 나섰는데도 그런 처참한 패배를 당했다는 것이다.

“살마드에서는 이 사안을 심대한 위협으로 보고 있는 모양이야. 조금 전에 전령이 왔다네. 오테론에서 천 명을 보내라더군. 말레이드에서도 3천 명을 파병한다고 하네. 거기에 살마드에서 보낼 천 명을 합하면 오천이지. 근자에 유래가 없던 대군이 움직이는 것이야.”

오천.

그 숫자를 듣자마자 군터는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오천이라.’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감히 상상도 가지 않는 숫자다. 이 오테론에 주둔하고 있는 병사를 모두 합해야 3천 가량인데, 그마저도 두 개 요소에 수백 병사들이 가 있으니 실질적으로 현재 오테론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은 2천하고 300이 조금 넘는다. 그렇다면 그 숫자는, 지금 오테론에 있는 병력의 두 배가 넘는 셈인 것이다.

군터는 머릿속으로 오천의 병력이 한 자리에 도열한 광경을 떠올려 보았다. 너른 들판을 가득 매운 병사들의 모습을.

그 모습은 틀림없이 그가 이제껏 보지 못한, 엄청난 장관일 것이다.

“천 명이라면, 천인대 하나가 통째로 움직이는 것이겠군요.”

군터가 잠시 혼자만의 상념에 빠지는 와중에도 대화는 계속 되었다.

“맞아. 이제 자네들도 짐작했겠지만, 자이론 천인대가 움직이기로 되었네.”

“…….”

설마 했던 것이 사실로 굳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모두는 벙어리가 되었다.

그러자 막시밀리언은 대놓고 못마땅한 기색을 내보였다.

“왜 그런가? 설마 겁을 먹은 것은 아니겠지? 난 내 부하들을 가려 뽑았다. 내 휘하에 겁쟁이는 없다, 그렇게 믿고 있네. 설마 내 믿음이 틀렸던 것은 아니겠지?”

“아,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다만 이렇게 대규모 전투를 겪은 적이 없어 긴장했을 뿐입니다.”

부리나케 이어지는 겁쟁이들의 변명이 있고 나서야 막시밀리언은 표정을 풀었다.

“자네들의 심정을 나도 아네. 나 역시 이런 대규모 전투는 처음이야. 당연히 긴장이 되고, 조금은 두렵기도 해. 하지만 바꿔 생각해보게. 이런 큰 전투일수록 공을 세울 기회가 쉽게 생기기 마련이야. 그렇지 않나?”

“그렇습니다.”

“대장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앞다툰 동조의 말에 막시밀리언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군인에게 전장은 위기임과 동시에 기회일세. 자네들도 이번 일을 마냥 두려워하기보다 기회로 여기고 마음을 다잡았으면 좋겠군.”

그 말이 과연 얼마만큼이나 먹혀들어갔는지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겁쟁이들은 이제 그런 기색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출병은 오늘 점심. 세 번째 종이 울릴 때네. 그 전까지 각자 만반의 준비를 하고 대기할 수 있도록.”

“옛!”

* * *

군터는 부하들에게 출병 소식을 알렸다. 그리고 소식을 전해 받고서 망연해 하는 그들에게 막시밀리언이 해줬던 이야기를 똑같이 해주었다. 효과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그래, 젠장할. 어차피 도망칠 수도 없는 거 이번에 어떻게든 모가지 잘 챙겨서 돈이나 왕창 벌어보자!”

“이번에 갔다 오면 진짜 개처럼 번 돈 폼 나게 한 번 탈탈 털어 써보자! 몸에서 개기름이 좔좔 흐를 때까지 놀아주겠어!”

“개기름? 그건 지금도 철철 넘쳐흐르고 있잖아? 그 넙데데한 상판에 말이야.”

“그럴지도! 하지만 내가 암만 해도 너만 할까! 설마 너, 왜 사람들이 네 얼굴만 보면 눈을 딱 감는지 아직도 이유를 모르냐?”

“뭐야? 이 자식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즐거운 미래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현재의 두려움이나 절망이 해소가 되는 모양이었다. 그 즐거운 미래라는 것이 확실히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것임에도 말이다. 희망의 힘이란 것일까.

어쨌든, 우중충했던 분위기가 걷힌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두려움이나 기타 어두운 감정들은 전투에 있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이번에는 보급대가 따로 붙는다더군. 자잘한 것들은 버리고 무장만 충실히 해라.”

“그거 참 불행 중 다행이군요.”

부하들에게 전달 사항을 다 전하고 나서 군터도 준비를 시작했다. 준비라고 해봐야 무구들과 물주머니 같은 것을 챙기는 것뿐이었지만 그는 그 간단한 준비를 느릿하게, 여러 번 꼼꼼히 했다. 준비를 철저히 하는 것도 있었고 그런 것들을 통해 마음을 다잡는 것이기도 했다.

두려움은 없다. 하지만 묘하게 마음이 싱숭생숭 한 것도 사실이었다. 들떠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경험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색다른 감정인지. 어쨌든 평소와는 다른 상태였으므로 그것을 평소처럼 돌리는 과정이 필요했다.

“주인님.”

준비를 마치고 홀로 나와 바람을 쐬는 중이었다.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할렌이 어두운 얼굴로 있었다. 그 옆에는 유리아도 있었다.

“무슨 일인가요? 어디 가시나요?”

“전장에 나간다.”

“전장…….”

“일단 두 달은 확실하게 넘겠지만, 정확히 얼마가 걸릴지는 모른다.”

둘의 얼굴이 급격하게 더 어두워졌다.

‘그러고 보니…이 녀석들을 어떻게 한다.’

미처 생각지 못한 문제다.

한 열흘 보름도 아니고 최소 두 달 이상 자리를 비우게 되는데, 그 긴 시간 동안 이들은 주인 없이 오테론에 남게 된다. 보통의 노예라면 별 상관없겠으나 이들이 아쿼러즈라는 것이 문제다. 오테론의 사람들은 초원민족에게 상당한 적대감을 갖고 있다. 아쿼러즈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다.

그렇다고 딱히 이들을 맡겨 놓을 만한 지인도…….

‘그러고 보니 한 명 있긴 하군.’

딱 한 명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는 지인이라고 하기도 뭐할 만큼 안지 얼마 안 된 사람이다. 그나마도 딱 두 번 봤을 뿐인데…….

‘그래도 여기에 그냥 두는 것보다는 낫겠지.’

생각 난 김에 군터는 곧장 할렌과 유리아를 데리고 길을 나섰다.

* * *

“어엉?”

와그너는 한 손으로는 눈을 비비고 한 손으로는 귀를 비볐다. 어떤 놈이 아침 댓바람부터 문을 부술 듯 두들기나 싶어 두 주먹 불끈 쥐고 나왔더니만 별 희한한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이 둘은 아쿼러즈다. 제국어라고는 간단한 몇 마디 밖에 할 줄 몰라. 아쿼러즈가 이곳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는 알고 있겠지.”

“그래서? 나보고 맡아달라고? 두 달 넘게 먹여주고 재워주고 하면서?”

“일꾼으로라도 부리면 되잖나.”

“이것들을 어디다 써? 제국어는 하지도 못해, 그렇다고 잡일을 시키자니 이 녀석은 젖비린내 풀풀 나는 꼬맹이잖아.”

반응은 꽤나 부정적이었다. 먹여주고 재워주는 게 아까워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도 감정적인 문제인 것 같았다. 그 역시 오테론에서 오랫동안 복무한 군인이었으니 아쿼러즈를 좋아하지 않는 것일 테지.

“부탁 좀 하지.”

결국 군터는 미리 준비해뒀던 돈 주머니 하나를 던졌다.

“넉 달이 지나도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이 녀석들은 당신이 가져. 그 정도면 됐나? 뭣하면 문서라도 써주겠다.”

“…젠장. 그렇게까지 나오면 거절하기가 힘들잖아.”

“그럼 잘 부탁하지.”

군터는 할렌과 유리아에게 상황을 이야기해주었다. 얘기를 들은 그들은 군터가 자신들을 신경 써주었다는 것에 고마워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병영에 남아 눈칫밥을 먹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안도했다.

“그나저나 오줌 지린 건 아니겠지?”

“뭐?”

“전쟁이라고, 전쟁. 나도 안 겪어봐서 뭐라 말은 못하겠지만, 뭔가 기분이 남다르지 않아? 듣자하니 반란을 일으켰다는 놈들이 만만한 놈들도 아닌 것 같던데.”

“글쎄. 현재까지는 초소에 나가는 것과 다를 것 없는데.”

“그런가. 뭐, 아무튼 조심하라고.”

“걱정해주는 건가. 고마운데.”

“고맙기는. 자네가 죽어버리면 짐덩이들은 누가 도로 가져가나.”

“걱정 하지 마. 멀쩡히 돌아올 테니.”

“그래야지. 하여간 무운을 비네. 원신의 가호가 있기를.”

내민 주먹을 툭 하고 치며, 두 사내는 짤막한 인사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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