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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22화 (22/1,064)

<-- 새 식구 -->

“할렌! 할렌!”

“예!”

할렌은 그의 이름이 두 번째 불리고 나서야 고개를 돌렸다.

쿠르파라는 초원의 이름을 버리고 할렌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한 지 벌써 닷새 째. 아직 소년은 자신의 새로운 이름이 영 낯설었다.

“갑니다!”

본격적으로 제국인들 틈에 섞여 살기 시작하면서 할렌은 그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했다. 다른 이들이 좀 쉬엄쉬엄하라고 말할 정도였다. 물론 할렌은 그런 말들을 알아듣지 못했고,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할 뿐이었다.

사실 그것 밖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기도 했다. 주변에서 떠들어대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이따금씩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은 모두 적의로 가득 찬 것만 같았다. 그렇기에 할렌은 입을 꾹 다물고 되도록 밝은 얼굴로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 임했다.

“asjfnfjawebhwerbu! ewbnjrwieubruiwber.”

무슨 말인지는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다. 하지만 표정과 말투로 무엇을 원하는지를 추측한다. 한 번에 맞출 수도 있지만 두 번, 세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야 할 수도 있다. 한 번에 맞추면 상대는 웃을 것이고, 두 번째에 맞추면 아무 일 없을 것이며 세 번째 이후로 맞추면 조금은 짜증스런 목소리를 듣게 되리라.

초원의 바람을 맞으면서 자유분방하게 말을 달리던 소년은 며칠 사이 눈치라는 것을 배웠다. 배울 수밖에 없었다.

“쿠르…할렌. 식사 하자꾸나.”

그의 어미는 아직 아들의 새로운 이름이 입에 붙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녀 역시 유리아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부를 때 유리아, 할렌이라고 부른다.

점심 메뉴는 늘 그랬듯 거무튀튀한 빵과 우유 반잔이었다. 부족에 있을 때는 하루에도 세 잔 이상 씩 마셨던 우유지만 이곳에서는 하루에 딱 반잔뿐이었다. 그마저도 따로 마시지는 못한다. 반잔의 우유는 딱딱하게 굳은 빵을 적셔 부드럽게 만드는 용도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 돌덩이 같은 빵이 조금이라도 부드러워질 때까지 침을 적셔야 한다.

물로 적셔도 되겠지만 그건 상당한 정신적 피로를 동반하는 일이다. 우물가에 가기만 해도 주변에서 사나운 시선들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그 시선을 무시하기에는 모자의 마음이 그리 강하지 못했다.

“…….”

어미가 슬쩍 자기 몫의 우유를 밀었다. 할렌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그것을 다시 그녀 쪽으로 밀었다.

“난 별로 마시고 싶지 않단다.”

“저도 그래요. 정 마시기 싫으시면 버리시던가요.”

“…….”

결국 그녀의 뻔한 거짓말은 오늘도 실패했다.

약간은 의기소침한 어미의 모습에 기어이 할렌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 잘못 아니에요. 자꾸 그러지 좀 마세요.”

그녀는 아들의 손목에 노예의 족쇄가 채워진 것이 자신의 탓이라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죽음에서 도망쳐 남쪽으로 말을 달릴 때부터 그들의 운명은 이미 정해졌었다는 것은 생각지 못했다. 그저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뿐인 것이다. 맹목적인 모정은 무조건적인 죄책감을 낳았다.

오테론에 오기 전, 요새에서 아들의 귀를 막고 매일 밤을 지새우던 그때부터 그녀의 얼굴에는 음울함이 감돌았다. 그것은 요새를 벗어나 오테론에 온 이후로도 마찬가지였다. 심해지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나아지지도 않았다. 할렌은 그것이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익숙한 어미의 모습은 부족의 뭇 사내들에게도 밀리지 않던 당찬 여장부의 그것이었다.

“에이.”

할렌은 신경질적으로 빵을 물었다. 아직 충분히 물렁해지지 않은 빵은 돌덩이 같았다. 억지로 씹으려고 하니 이빨이 아파 빵을 물고서 침을 발랐다.

그때였다.

끼익!

오랫동안 기름칠을 안 했음에 분명한 문이 열리며 군터가 들어왔다.

“굳이 어두컴컴한 곳에 틀어박혀서는…별난 취향이군.”

모자가 벌떡 일어났다. 할렌의 표정은 방금 전과는 달리 꽤나 밝았다. 대화 상대라고는 어미 밖에 없는 이곳에서 말이 통하며, 심지어 동족인 군터는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언제든 자신과 어미의 목을 칠 수 있는 주인이고, 무뚝뚝한 사람이었지만 의외로 다정한 면이 있었다. 적어도 할렌이 느끼기엔 그랬다.

“먹어라.”

그가 들고 온 것을 건넸다. 조심스레 받아 얇은 천을 펼치니 잘 익은 닭고기와 싱싱한 야채가 드러났다.

“이거…….”

“많이 먹을 줄 알고 시켰는데 남아버려서 말이지.”

짧게 말하고서는 휙 돌아선다. 할렌은 아직도 살짝 뜨듯한 달고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무언가를 말하려 퍼뜩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군터는 이미 나가고 없었다.

* * *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무…스 마아리지 몰겠…슴니다.”

발음은 이상하고 목소리는 어눌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느리다. 자신감이 없다는 뜻이다.

“틀려도 좋으니까 크고 빠르게 말해라. 말실수 한다고 해서 누가 칼질을 하지는 않는다.”

“예, 옙!”

“다시.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무스 마린지 모르게슴니다.”

“저는 군터 십인장의 노예입니다.”

“저느 군터 시빈자으 노애임니다.”

엊그제부터 군터는 할렌에게 말을 가르치고 있었다.

첫날에는 모자를 같이 가르쳤었다. 하지만 유리아는 익히는 것이 더뎠다. 할렌에 비하면 절반 정도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할렌이 말을 세 마디 정도 익힐 때 그녀는 한 마디도 간당간당 했다. 하여 군터는 다음날부터 할렌만을 가르쳤다. 굳이 유리아까지 가르치며 더 수고해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시간이 넘쳐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를 가르치는 것은 할렌이 해도 된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할렌은 배우고 익히는 것이 빨랐다. 군터 자신도 어렸을 적 제국어를 한 마디도 하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기 때문이다. 할렌을 보고 있자면 과거의 자신과 겹쳐 보였다. 물론 할렌의 처지는 그때의 그보다 사정이 안 좋았다. 적어도 그는 노예가 아니었고, 끼니를 돌 같은 빵과 한 모금의 우유로 때우지는 않았었으니까.

그래서 자꾸만 마음을 쓰게 되는 것이다. 약간의 귀찮음마저 감수할 만큼.

“오늘은 이쯤 하지.”

“예. 감사합니다.”

그나마 배우는 것이 빨라 가르치는 재미는 있었다. 어쩌면 할렌이 배우는 것이 빨랐기 때문에 유리아에게 못마땅함을 느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비교가 될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매일 내 침대 밑에 먹을 것을 숨겨 놓겠다.”

“예?”

“아무도 없을 때 네 어미와 먹도록 해라. 단, 숙소에서 나가지 말고 문을 닫고 먹도록 해. 남의 눈에 띄지 말라는 말이다. 알겠나.”

“어…….”

할렌이 말을 흐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군터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나가라며 손짓했다. 그러자 할렌은 입을 뻥긋거리다 꾸벅 고개를 숙이고 숙소를 나섰다.

할렌이 나가고 나서 잠시 후에 병사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어우. 어떻게, 꼬맹이는 잘 알아먹습니까?”

“나보다는 낫더군.”

“확실히 머리 좋은 건 모르겠는데 눈치는 빠르더군요.”

군터 십인대의 병사들은 그럭저럭 노예 모자, 특히 할렌에게 호의적인 편이었다. 일단 아직 귀여운 맛이 남아있는 어린 아이인데다 눈치도 빠르고, 눈에 보일 정도로 성실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은 모두 바크렌 중부, 혹은 남부 출신이라 초원민족에게 크게 원한을 가진 이들도 없었다.

그리고 사실 불만이 있다 하더라도 누가 감히 그것을 드러내겠는가. 다들 내색은 안 하지만 군터가 노예 모자에 신경 쓰는 이유는 다 알았다.

같은 아쿼러즈끼리의 동질감.

지금은 어엿한 제국군이지만 아무래도 아쿼러즈라는 출신성분이 떳떳한 것은 아닌 만큼, 그에 관련한 것에 대해서는 다들 쉬쉬하고 있었다.

* * *

제법 큼직한 방.

방 중앙에 있는 기다란 테이블에는 양쪽에 각 다섯 명씩, 총 열 명의 십인장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상석에는 막시밀리언이 자리하고 있었다.

“자, 다들 들지.”

막시밀리언이 먼저 잔을 들었다. 십인장들이 뒤따라 잔을 들었다.

“어떻게 보면 첫 실전이었는데 너무 늦게 자리를 마련한 것 같아서 미안하군. 나도 나름대로 정신이 없어서 말이지. 이해들 해주게나.”

“아닙니다.”

“아닙니다!”

어설픈 연극을 보는 느낌이었다. 물론 군터는 연극 관람이라는 권력 있고 돈 있는 자들의 취미활동을 가진 적이 없었다. 하지만 가장 앞의 왼쪽 자리에 앉아 선창하는 코르넬과,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서로 경쟁하듯 같은 말을 외쳐대는 나머지 십인장들을 보고 있노라면 우스워서 자꾸 입가가 씰룩거렸다.

‘저 녀석이 카잘. 저 녀석은…펜스리였던가?’

같은 백인대 소속의 동료이지만 군터는 아직 그 동료들의 이름조차 제대로 외우지 못했다. 아마 그건 저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같은 백인대 소속이라고는 하지만 코르넬을 제외하면 함께 싸워본 적은 전무했다. 동료이기는 하나 전우는 아닌 것이다. 동료로서의 유대감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더군다나, 그런 자들이 아쿼러즈라고 은근히 경시하는 시선을 보내기까지 한다면 가까이 지낼 마음 따위는 생기지 않는다.

“물론입니다!”

“모두 대장님 덕분이지요.”

저 모습들을 보라. 매끈한 혀로 앞 다투어 충성경쟁을 하고 있다. 누군가 재치 있게 한 발 앞서가면 다른 이들은 그를 못마땅하게 흘겨본다. 저 아름다운 모습에서 동료애는 전혀 엿보이지 않는다.

“그만들 하게나. 거 사람 참 부끄럽게 하는군. 하하하.”

막시밀리언은 그런 그들을 일일이 상대하며 웃음을 아끼지 않았다. 얼핏 보면 그저 아부에 기분이 좋아진 것으로 보이지만…….

군터는 보았다. 그렇게 웃다가도 이따금씩, 아주 순간적으로 서늘해지는 막시밀리언의 눈빛을. 그건 그가 짓는 웃음이 가식이라는 것의 증명이었다.

‘역시.’

군터는 처음 막시밀리언의 서늘한 눈빛을 발견하자마자 조금은 느슨해졌던 자세를 바로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의 자리는 가장 끄트머리였다. 사람들의 관심에서 조금은 벗어난 자리였기에 그는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지 않을 수 있었다. 다른 십인장들은 물론이고, 막시밀리언도 특별히 그에게 말을 걸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가끔씩, 잠깐 동안 막시밀리언의 시선이 머물기는 했다. 그럴 때면 군터는 담담히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피곤하군.’

노고를 치하하는 자리에서 마련했다 하나 그에게 있어서는 여러모로 피곤한 자리였다. 우스꽝스러운 동료들도, 왜인지 모르게 긴장하게 되는 상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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