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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21화 (21/1,064)

<-- 새 식구 -->

공짜 술이어서 그런지 유난히 술이 달달하게 느껴졌다.

“사우딧사. 내가 파는 술이지만 정말 좋은 술이야. 이런 촌구석에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훌륭한 놈이지. 이놈 하나면 이 초원의 지랄 맞은 추위도 문제없어.”

주인장은 오늘 장사는 접기로 했는지 아예 의자 하나를 가져와 합석하고 있었다. 그는 원래부터 군터 십인대의 일원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일행에 어우러졌다.

“평범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응? 어딜 봐도 평범한 사람 같지 않은가?”

술이 들어가서 그런지, 아니면 어느 정도 안면 텄다 이건지 주인장은 군터와 병사들에게 말을 편하게 하고 있었다. 누구도 그걸 가지고 뭐라 하지 않았다. 사실, 겉으로 보이는 나이만 보자면 그는 거의 군터의 아버지뻘이었던 것이다.

“거 주인장. 거울 안 보고 사쇼? 애들이 보면 오줌을 콸콸 지릴 얼굴이에요 아주.”

“자네를 보고 있자니 소싯적 내 모습을 보는 것 같구만.”

“커! 설마?”

“진짜야. 잘 봐두게. 지금 내 얼굴이 십 년 후 쯤 자네 얼굴이니까.”

와그너는 생긴 것 답지 않게 입담도 상당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술자리의 분위기를 주도했다. 군터가 이제껏 봐 온 이들 중 이런 일에 능한 것은 로크가 유일했는데 와그너는 그런 로크보다도 더 나아보였다.

“몰랐나 보군. 보통 소개 받아서 오는 놈들은 다 알고 있던데.”

“소개 받아서 온 줄은 어떻게 알았소?”

“소개가 아니면 이런 허름한 곳까지 올 일이 없지 않겠나. 가려면 이런 누린내 나는, 다 무너져가는 허름한 술집 대신 더 때깔 좋은 곳을 찾겠지.”

오테론에는 군인들이 찾을 만한 유흥가가 제법 그럴듯하게 나 있다. 굳이 즐길 거리도 부족한 이곳에 올 이유는 없다. 물론 이곳처럼 허름한 곳은 허름한 만큼 값이 싸고, 번듯한 곳은 번듯한 만큼 값이 비싸다. 하지만 돈 아낄 생각이 있는 자들이 흥청망청 술을 마시겠는가. 어차피 술이라는 것은 비싸든 싸든 마시다 보면 돈이 쭉쭉 빠져나가게 되어 있다.

그러나 하루하루 칼날위에 살아가는 처지에 미래를 생각하는 사치를 부릴 이가 얼마나 될까. 하루의 고단함은 하루의 쾌락으로 풀어내는 자들이 많다. 초원의 바람을 맞는 삶이란 그만큼 힘겹기 때문이다. 적절한 위로 없이 가만히 서서 바람을 맞다 보면 얇은 나뭇가지처럼 뚝! 하고 꺾여버리기 마련이다.

“알고 지내던 놈들. 그놈들한테 소개 받아서 온 놈들 중에 단골이 된 놈들. 이런 놈들이 매상을 내주고 있지. 뭐, 좀 더 그럴듯하게 좀 꾸며보라는 놈들도 있기는 한데, 그러고 싶지는 않거든. 딱히 파리 날린다고 해서 굶어 죽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자랑 좀 하자면, 현역일 때 돈 꽤나 모아뒀거든. 당장 가게를 때려 쳐도 먹고 사는데 아무 지장 없다 이거야.”

“현역?”

“아아. 이래 보여도 한때는 백인장이었다고.”

“에엥?!”

말을 나누던 건 군터였는데 반응은 옆에서 나왔다. 저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왕년에 백인대장이었다는 와그너를 바라본다. 와그너는 그런 시선이 익숙한지 어깨를 으쓱하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탁!

“뭔지는 알아보겠지?”

얼핏 보면 자그마한 쇳덩이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제국군의 문양이 음각되어 있다. 거기에 반쯤 벗겨지기는 했지만 테두리를 감싼 것은 분명히 금이었다. 틀림없는 백인대장의 휘장이다.

“와……”

“왜들 그러나. 편하게 해. 예전에야 백인장이었지, 지금은 그냥 술집 주인일 뿐이야.”

그러면서 슬쩍 바지 한 쪽을 걷어 보이는 와그너.

“아…….”

조금 전이 감탄이었다면 이번은 탄식이다. 살과 뼈가 있어야 할 그의 한 쪽 다리에는 웬 나무가 대신 달려 있었다. 투박하게 만들어진 의족.

“화살을 맞았지. 그런데 그 화살이 하필이면 독화살이었나 봐. 맞은 곳은 종아리였는데 순식간에 무릎까지 가더군. 의사를 데려올 시간이 없었어. 그렇다고 그대로 두면 하반신 전체가 썩어버릴 것 같아서 그냥 잘라냈지.”

“재수가…없었군요.”

와그너가 말한 병사를 봤다. 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오히려 그 전까지 재수가 좋았던 거지. 내가 열여섯부터 군 생활을 시작했어. 다리 자르고 나올 때가 마흔 넷이었으니 꼬박 28년 넘게 군인으로 있었던 거지. 그 긴 시간 동안 그럭저럭 먹고 살면서 돈도 모았지. 그 대가로 다리 한 짝이면 싸게 먹힌 거 아닌가?”

그러면서 그는 한 잔 가득 담겨 있는 사우딧사를 단번에 기울였다.

“크으! 날 동정하지 말게나 애송이들. 나 정도면 여기 있는 놈들 열에 아홉보다 잘 풀린 셈이야. 이십 년 후에 나보다 잘 풀릴 녀석이 얼마나 있을 것 같나. 응? 백에 하나도 안 될 거고, 한 오백 명 중에 하나는 있을까? 저주하는 건 아니지만 당장 1년 뒤에 자네들 중에 빈자리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그가 빈 잔을 들어올렸다.

“정신 차려. 언제 훅 갈지 몰라. 신께서 허락한 마지막 날이 내일일지, 모레일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그러니까…….”

“오늘 원 없이 마셔라?”

군터가 그의 말을 자르고 들어갔다. 와그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알았지?”

“술집 주인이라면 그렇게 말 할 것 같았지.”

“하하하하하! 맞아. 죽도록 마셔. 내일이 올지 안 올지는 신만이 아실 테니까 말이야.”

“진짜? 우리야 아무래도 상관없지마는, 후회하지 마쇼?”

공짜 술의 위력은 대단했다. 전직 백인대장의 눈치를 보느라 소심하게 홀짝이던 이들은 주인장의 적극적인 부추김에 힘입어 술을 물처럼 들이마셨다. 군터 역시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간만에 기분 좋게 잔을 꺾었다.

* * *

요새와 초소를 오가며 눈에 불을 켰던 것은 한 달여였다. 정확히는 스물 하고 여섯 날.

그 짧다 하면 짧고 길다 하면 긴 날들 동안 긴장을 풀지 않고 지냈다. 잘 때도 머리맡에 병장기를 놓고 잤고 볼 일을 보러 갈 때도 손에 쥐고 다녔다.

그러다가 든든한 성벽이 지켜주는 성 안에서 침대에 누워 자니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온 몸이 물 먹은 솜처럼 축축 쳐지는 것을 느꼈다. 몇몇 병사들은 몸살 비슷한 증상을 호소하며 침대 위에서 늘어졌다.

“으으…죽겠다.”

장시간의 긴장과 함께 누적된 피로가 전날의 과음과 만나 환상적인 결과물을 낳았다. 평소보다는 조금 늦은 아침 훈련을 하고 돌아온 군터는 아직까지도 벌레처럼 꿈틀대는 부하들을 한심하게 깔아보았다.

“아니 대장님은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평소보다 몸이 무겁기는 하군.”

“…그게 전부?”

“뭐가 더 있길 바라나.”

“하아.”

부하들에게서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이 이제는 익숙하다. 반면 부하들은 자신에게 아직 덜 익숙해진 듯했다.

“오늘 훈련은 진형 훈련만 하기로 하지.”

“오! 어쩐 일이십니까?”

“지금 네 녀석들을 데리고 훈련을 해봐야 뭐가 될 것 같지도 않으니까. 오히려 어디 한 군데 부러지기라도 하면 골치 아프지.”

“우와아앗!”

“워후!”

슬쩍 툴툴대며 한 말에 관짝에 놓인 시체처럼 누워 있던 부하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오늘 점심은 근사한 곳에서 먹는 게 어떠냐. 내가 사지.”

“어어? 진짜 왜 그러십니까? 적응 안 되게.”

일전에 부하들이 사고를 치고 그에 대해 처벌했을 때, 답답한 속을 풀려 만났던 로크가 도리어 그를 비판했던 일이 있었다. 그러면서 로크는 자신도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했다고 열변을 토했었다.

그때, 말은 안 했지만 군터는 굉장히 충격을 받았었다. 부하를 둔 상관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처럼 간단한 직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혹자는 군대를 병기에 비유한다. 그래서 군대에는 강한 규율이 필요하다. 마치 병장기의 날이 날카롭게 서야 더 적을 베기 쉬워지는 것처럼.

하지만 한편으로, 사람은 쇠붙이가 아니다. 한낱 칼 한 자루를 다룰 때도 녹이 슬지 않게 닦아주고 갈아주는데 사람을 대할 때는 그저 필요한 때마다 마구잡이로 부리고 명령을 내리겠는가.

“후회하지 마십쇼.”

“오늘 대장 돈 주머니가 아주 홀쭉해질 겁니다.”

그리하여 군터 십인대는 늦은 아침에 간단히 진형 훈련을 마치고 기분 좋게 성내의 번듯한 식당으로 향했다.

그들은 느긋하게 식사를 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눴다. 평소보다 한껏 늘어진 마음에 보통 때는 하지 못했던, 혹은 하지 않았던 말들도 거리낌 없이 오갔다. 그야말로 저마다 흉금을 터놓는 시간이었다.

“우리 아버지가 날 낳기 전부터 거기서 농사를 지었다고. 그런데 새로 주인 된 새끼가 어느 날 갑자기 소작료를 세 배로 늘린다는 거야.”

“개새끼구만.”

“그렇지! 그것도 본격적으로 추수기가 오기 한 달 전쯤에 갑자기 그 지랄을 하잖아!”

“흔치 않은 개새끼구만.”

“모아둔 돈도 없는데 어떻게 갑자기 소작료를 세배씩이나 내나? 어쩔 수 없이 아버지가 성으로 가서 관리에게 이야기를 했지. 그랬는데 어떻게 됐는지 알아? 주인이 자기 마음대로 땅값을 받겠다는 걸 왜 자기한테 와서 난리를 치냐는 거야. 그게 관리라는 새끼가 할 말이야?”

“아니지.”

“절대 아니지.”

“나중에야 알았지. 주인 새끼하고 그 관리새끼하고 짝짜꿍해서 지랄한 거였다는 걸. 나한테 누이가 하나 있었는데 지주 새끼가 누이를 노리고 있었던 거야. 정실은 아니고 첩실로 들이려 했던 모양인데 우리 아버지가 호락호락하지 않으니까 그딴 식으로 수작을 부린 거지.”

“세상에 보기 드문 개새끼네.”

“그런 말은 개한테 실례야. 개만도 못한 새끼들이라고 해야지. 그런 새끼들은 아주 요절을 내버려야 돼.”

누군가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고 했던가.

군터 십인대의 병사들은 대장인 그를 제외하면 모두 수인 출신이다. 죄를 짓고 감옥에 갇힌 이들이란 말이다. 그런 만큼 그들을 직접 방면하여 부하로 삼은 군터조차도 어느 정도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가만히 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저마다 사연 없는 녀석이 없었다. 각자가 인생에서 나름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삶 자체가 그들이 저지른 죄에 대한 변이나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그가 듣기에는 그랬다.

‘기구한 놈들.’

그들의 삶이 참 기구하다. 하지만 그들이 특이한 것이냐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바크렌에 이런 이들은 널리고 널렸다. 도처에서 도적떼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과연 그놈들이 썩을 놈들이라서일까? 결코 아니다. 모르긴 몰라도, 칼 든 도적놈들 열을 붙잡아 심문하면 그 중 못해도 반 이상에게서 지금 부하 놈들이 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가 흘러나올 것이다.

‘세상 참 더럽군.’

세상이 더러운 것인지, 더러운 게 세상인 것인지. 머리 아픈 이야기는 딱 질색이지만 이렇게 배부른 채로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평소에는 해본 적도 없는 생각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들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우습지.’

지주가 소작인을 핍박한다. 관리가 백성을 수탈한다…….

말은 다르지만 실은 다 같은 이야기다.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뜯어먹는 거다. 이는 사자가 양의 살코기를 씹듯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당하지 않으려면 힘을 가져야 한다. 힘이 없으니까 당하는 것이다.

이 지저분한 세상에서 무엇을 하려고 하든, 결국에 답은 한 가지다.

출세.

그 외에는 없다. 더러워 욕이 나와도 어떻게든 기어 올라가는 수밖에는 없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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