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 식구 -->
오테론 성으로 돌아온 군터는 그의 소유가 된 치예와 쿠르파의 일부터 처리하기 위해 대장간으로 향했다.
“다 됐습니다. 그나저나 너그러우시군요. 보통은 그냥 낙인을 박는 경우가 많은데요.”
대장장이가 거뭇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의 말처럼, 제국에서는 노예의 살가죽에 주인의 이름과 노예의 문양을 화인으로 새기는 경우가 보통이다. 지금 군터처럼 쇠고리를 채우는 것에 비해 드는 비용도 저렴하고 간단하기 때문이다. 물론 성노의 경우에는 주인의 취향에 따라 화인을 꺼려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 외의 용도로 쓰이는 노예들은 열에 아홉이 화인으로 지지는 것을 선호했다. 가장 대표적인 부위가 이마나 볼인데, 누구의 노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복 받았구나 꼬마야. 이런 자비로운 분은 좀처럼 만나기 쉽지 않단다.”
당연히 쿠르파는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다만 어조에서 불쾌함을 느꼈는지 도끼눈을 뜨고 대장장이를 노려보았다. 그 시선이 제법 매서워 대장장이의 입매가 불퉁하게 일그러졌다.
“수고했소.”
“어이구. 별 말씀을. 살펴 가십시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배웅한다. 쇠를 두들기는 대장장이는 성격이 우직하다는 편견도 그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타고난 장사치처럼 보였다.
“왜 이런 것을 차고 있어야 하나요?”
돌아오는 길에 쿠르파가 물었다. 양 손목에 찬 묵직한 쇳덩이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하긴, 불편하기도 하고, 무겁기도 할 것이다. 답답하기도 할 테고.
“그 쇠고리에는 네가 내 노예라는 글이 쓰여 있다. 그게 있는 한 너와 네 어미는 핍박받지 않을 거다. 그건 나에 대한 모욕이기 때문이지.”
모르긴 몰라도 이 성에 가족 잃은 자들이 천 명은 넘게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 잃었느냐는 궁금해 할 가치도 없다. 초원인에 대한 분노는 성 전체에 깔려 있다. 제국어 한 마디 못하는 아쿼러즈 모자가 길을 돌아다니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시체로 나뒹굴 것이다.
하지만 노예라면 다르다. 노예에 대한 핍박은 그 주인에 대한 핍박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 성에서 제국군 십인장의 노예를 어찌 해보려는 이들은 없다. 이 성에서 살고자 한다면 제국군을 존중해야 하니까.
“…….”
쿠르파는 고개를 숙였다. 그의 입에서 나온 노예라는 단어에 새삼 자신의 처지를 절감한 것이다. 치예가 아들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여인이지만 어머니인 그녀는 이 비극적인 현실에도 의지를 잃지 않았다.
“저희는 무슨 일을 하면 되나요?”
“잡일.”
제국어 한 마디도 할 줄 모르는 그들은 할 수 있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러니 그들에게 시킬 일은 단순 노동이 될 수밖에 없었다.
* * *
“아이고. 잘 있었냐?”
성에서 떠날 때만 해도 이 냄새나는 딱딱한 나무 침대가 그리워질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음습한 냉기가 솟아오르는 돌바닥에서 벌레처럼 웅크리고 잘 때마다 이 초라한 침대를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윽! 냄새!”
하지만 그리움이 낳은 환상이 현실에 뭉개지는 데는 콧구멍이 두 번 벌름거리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퀴퀴한 악취가 코끝을 찌르자 나른한 얼굴로 침대에 엎어졌던 이들이 몸을 튕기며 일어났다. 손으로 코를 싸쥔 것은 물론이었다.
“뭐야 이거? 우리가 떠나고 아예 손도 안 댄 것 같은데?”
“당연하지. 그럼 누가 와서 친절하게 청소라도 해주길 바랐냐?”
“아니, 아무리 그래도…….”
공짜로 병영 내의 숙소를 제공하는 대신 관리는 병사들이 스스로 해야 했다. 그것이 규칙이고 이미 알고는 있던 사실이지만, 이렇게 썩은 내가 풍겨대면 도저히 잘 수가 없지 않은가.
병사들이 툴툴대며 널브러진 옷가지며 이불 같은 것을 정리하려 할 때 군터가 들어섰다.
“너희가 할 일이다. 앞으로 우리 십인대의 숙소는 너희가 관리한다.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도록 하고, 배급되는 식사도 너희가 가져다 나른다.”
“예.”
“뭐라고 하신 겁니까?”
초원어를 모르는 병사들이 의아해 했다. 그 사이 치예와 쿠르파가 바삐 움직이며 병사들이 수거하려 했던 지저분한 것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숙소 청소는 저 둘이 알아서 할 거다.”
“오오! 그래도 되는 겁니까?”
“내 노예니까. 가만히 놀릴 수는 없지. 다 청소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테니 한 명만 남고 나가지.”
“한 명은 남습니까?”
“저 둘은 제국어를 한 마디도 할 줄 몰라. 혹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한 명은 남아서 지켜봐야지 않겠나. 남을 한 명은 알아서 정하도록.”
병사들이 남을 사람을 정하는 사이 군터는 치예와 쿠르파를 불렀다.
“내 부하 한 명이 남는다. 대화는 통하지 않겠지만 혹시라도 곤란한 일이 생기면 도와줄 거다.”
“예. 감사합니다.”
치예가 고개를 숙였다. 확실히 그녀는 눈치가 있었다. 어떤 말을 하면 그 말이 무슨 뜻인가를 헤아릴 줄 안다. 군터는 그녀가 생각도다도 더 현명하다고 여겼다.
“손목에 찬 쇠고리가 있으니 뭐라고 하는 녀석은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곳에서 너희를 좋게 보는 사람은 없다. 행동에 조심하도록.”
“예.”
숙소에 남을 한 명이 정해지자 군터는 부하들을 데리고 병영 밖으로 나섰다. 간만에 시원하게 입가심 한 번 할 참이었다.
“대장님이 쏘시는 겁니까?”
“나나 네놈들이나 받는 봉급은 별 차이 안 난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의 관점에서다. 말단 병사였을 때보다 족히 네 배는 더 받지만, 그의 기준에서는 그거나 그거나였다. 어차피 백날 모아봐야 집한 채 마련하기 빠듯한 것은 똑같으니까.
“에이! 고생한 부하들한테 한 턱 쏘는 게 그리 아까우십니까?”
프레드릭이 분위기를 잡자 다른 부하들도 우우! 하면서 야유를 보냈다. 이 같잖은 하극상에 군터는 헛웃음을 지었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지.”
“예?”
“너희 중 누구라도 내게 팔씨름으로 이기면 오늘 술값은 내가 내지. 하지만 이기지 못한다면 내 술값은 너희들이 각출해서 부담하도록. 당연하지만 거기에 너희 각자 술값은 알아서 계산해야 한다.”
“으음…….”
그의 제안에 병사들이 고민에 빠졌다.
군터의 힘이 사람을 살짝 벗어난 수준이라는 것은 그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러니 대표 한 명을 뽑아서 겨루자 했다면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방방 뛰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든지 이기면 된다? 이 말인즉.
“번갈아가면서 도전해도 된다는 겁니까?”
“물론.”
차륜전이 허용 된다는 것이다. 아홉 명이 돌아가며 계속 붙어서 어떻게든 힘을 뺀다면 누구 하나는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조, 좋아요! 까짓 거 한 번 해봅시다.”
군터 일행은 파드라스 백인대의 병사에게 추천 받은, 값 싸고 술맛 괜찮다는 술집으로 들어갔다.
“주인장! 여기 ‘사우딧사’ 인원수대로 맞춰서 주시오!”
널찍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군터 일행은 자리에 앉자마자 대결 구도로 접어들었다.
“자, 그럼 한 판 붙어볼까요!”
프레드릭이 콧김을 뿜으며 테이블 위에 팔을 올렸다.
“호오. 네가 첫 번째로 나서는 거냐? 처음에는 힘 조절이 제대로 안 될지도 모른다.”
“흐흐. 너무 물로 보지 마시죠. 의외로 제가 이길지도 모르는 거 아니겠습니까?”
물론 빈 말이었다. 프레드릭은 그것을 손을 맞잡은 그 다음 순간 바로 증명해보였다.
쾅!
테이블이 부러지진 않을까 걱정스러울 만치 우렁찬 소리를 내며 내리꽂히는 손등.
“끄으윽!”
프레드릭은 대번에 손을 빼내며 새빨개진 얼굴로 끙끙 거렸다. 뒤에서 순서를 기다리던 다른 병사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다음.”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싸한 분위기가 흘렀다.
쿵!
쿵!
콰앙!
손을 맞잡는 족족 넘겨버리는 군터. 패배한 병사들은 저마다 개성 있는 신음소리를 뱉으며 욱신거리는 손목을 감싸 쥐었다.
“야. 이거 아무래도……”
“아무 말도 하지 마쇼. 나도 지금 후회 중이니까.”
프레드릭은 우울한 귓속말을 끊으며 손목을 어루만졌다. 또 한 번의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평온한, 그러면서도 묘하게 즐거운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벌써 다 돌았군. 그럼 다시 너부터냐, 프레드릭?”
“으윽!”
벌써 아홉 명이 꺾였단 말인가. 프레드릭은 고통이 조금도 가시지 않은 손목을 연신 주무르며 눈알을 굴렸다. 하지만 허약한 그의 동료들 중에는 용기 있게 다시 한 번 도전할 만한 자가 보이지 않았다. 모두 그의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호오.”
바로 그때,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원자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의외의 사내였다. 큼지막한 쟁반을 한 손으로 받치고 다가온 그는 바로 이 술집의 주인장이었던 것이다.
떡 벌어진 체구에 보통 사람 두 명을 나란히 세운 것 같은 널찍한 어깨. 통나무 같은 두 다리와 자그마한 돌덩이가 들어 있는 것 같은 우락부락한 팔 근육. 거기에 얼굴에는 자잘한 흉터들이 빼곡하니, 이건 밖에서 봤다면 누가 봐도 도적떼 두목으로 착각할 만한 전투적인 외모였다.
“흥미로운 놀이구만. 혹시 술값 내기를 하시는 거요?”
“그렇소만.”
“재밌구만. 실례가 안 된다면 나도 한 번 끼어도 되겠소?”
“호오.”
느닷없는 제의. 하지만 군터 역시 그의 전사다운 몸에 흥미를 느끼던 차였다. 본디 힘에 자신 있는 수컷이라면 흥미로운 상대에 대해 꺾고 싶은 욕구가 치밀기 마련.
“끼워주는 거야 어렵지 않지. 하지만 무슨 내기를?”
“형씨들 중 누구라도 날 이긴다면 오늘 형씨들이 먹고 마시는 술값은 받지 않겠소. 하지만 이기지 못한다면…….”
그 순간, 군터의 입매가 씰룩였다.
터억!
주인장의 말을 끊고, 테이블 위로 묵직한 주머니 하나가 올라왔다. 군터가 주인장의 동그랗게 뜬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이 돈을 여기서 다 쓰고 가도록 하지.”
이번에는 주인장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형씨는…꽤 힘에 자신이 있으신가 보군.”
“자랑은 아니지만, 힘으로는 한 번도 져본 적이 없지.”
“그거 우연이군. 나도 마찬가지인데 말이오.”
“재밌군. 그럼 한 번 붙어보지.”
“괜찮겠소? 방금 전까지 힘 좀 뺀 것 같은데.”
“그 정도 가지고 힘을 뺐다고 하면 안 되지 않겠나.”
“…그렇다면 좋아. 한 번 해보십시다.”
“오오!”
병사들이 일어나 자리를 만들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군터와 주인장이 마주 앉았다.
턱!
그리고 두 사내의 손이 얽혔다.
“으음!”
주인장의 얼굴이 서서히 달아올랐다. 꾹 다물렸던 군터의 입술도 슬쩍 움직였다.
꾸구국!
“오오오오!”
형세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두 손은 서로를 꾹 붙든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끄으윽!”
주인장의 얼굴이 이제는 완전히 붉게 변했다. 그의 팔이 파르르 떨렸다. 군터도 이제 이빨을 보인 채 사나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으으으음!”
군터의 팔 근육이 한층 더 부풀어 올랐다. 이마에서는 땀방울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 즈음부터 서서히, 아주 서서히 팽팽하던 균형이 기울기 시작했다. 동시에 주인장의 터질듯이 붉어진 얼굴이 붉은 수준을 넘어 아예 거무튀튀하게 변해갔다.
“으으으으윽!”
주인장이 아등바등하며 분위기를 반전시켜보려 했지만 한 번 기운 형세는 뒤집어지지 않았다. 군터가 끝내겠다는 듯 다시 한 번 기합을 질렀다.
쿠웅!
“허억!”
마침내 승패가 갈리고, 주인장이 억눌렀던 호흡을 뱉으며 손목을 움켜쥐었다.
“미, 믿기지 않는군. 내가…….”
“이렇게까지 힘들었던 건 처음이군. 대단한 힘이오.”
“으음.”
승자의 여유로운 웃음 앞에 패자가 할 말이 있을 리 없다. 주인장은 몇 번 입술을 씹더니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믿기지 않지만 진 건 진 거지. 약속대로 오늘 형씨들이 먹고 마시는 건 모두 무료요.”
“와우!”
“휘이익!”
피 튀기는 살육전보다도 더 긴장감 넘쳤던 한 판 승부였다. 그동안 숨죽이며 관전하던 병사들이 무료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휘파람을 불어대며 환호했다.
“정말 대단했소. 설마 내가 힘에서 지는 날이 올 줄은.”
주인장이 악수를 청했다. 군터는 기분 좋게 그 손을 맞잡았다.
“와그너요. 형씨는?”
“군터.”
========== 작품 후기 ==========
글은 계속 쓸 겁니다. 연재 주기는 약속드리기 어렵지만요. 제가 글 쓰는 속도가 많이 느려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