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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19화 (19/1,064)

<-- 새 식구 -->

“이번에는 운이 좋군.”

어느 병사의 말처럼 요새에서 복무하는 300명의 병사들에게 있어서 이번 근무는 시작부터 운이 좋았다. 전투를 치른 것에 대해서는 각자 생각이 다를 수 있겠지만 열 네 명의 여인을 포로로 잡은 것에 대해서는 누구나 다 재수가 좋았다고 할 것이다. 물론 이는 병사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그렇다는 것이다. 붙잡힌 열 네 명의 여인들, 그리고 일곱 명의 소년 소녀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불운한 일이다. 불운하다는 말만으로는 그 불운함을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

여인들은 눈에 초점이 없었다. 표정도 없었다. 규칙적으로 새어나오는 숨이 아니었다면 시체로 여길 만큼, 그들에게서는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허무와 슬픔. 그리고 절망감.

‘기분 참 더럽군.’

절로 미간이 좁혀진다.

그녀들은 아마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는 당장의 현실보다도 더 두려웠을 테니. 그들은 어쩌면 부족이 멸망할 때 죽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포로로 잡힌 어제의 일도 그랬겠지만, 앞으로 그녀들 앞에 펼쳐질 미래 역시 우울할 것이다.

그들 중 유일하게, 군터의 몫으로 떨어진 여인과 그녀의 어린 아들만이 잠을 제대로 잤는지 제법 멀쩡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군터를 보자 고개 숙여 인사했다. 군터도 눈짓으로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들도 지금쯤 자신들의 처지가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깨닫고 있으리라. 그러니 어두운 얼굴에서도 감사의 기색이 비치는 것이겠지.

히히힝!

밖에서 말울음 소리가 들렸다. 가서 보니 두툼하게 차려 입은 병사 세 명이 말에 올라 있었다.

프레드릭이 다가와 말했다.

“바람도 쐬고 숨도 돌리고…부럽구만요.”

전령인 만큼 농땡이를 피우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긴장이 가득한 곳을 떠나 도시 공기 좀 맡을 수 있다는 게 어딘가. 프레드릭의 얼굴엔 부러움이 가득했다.

“말을 탈 줄 안다는 게 이럴 때 크군요.”

“크지.”

“대장은 말 탈 줄 아십니까? 어렸을 때 건너왔다고는 해도 아쿼러즈잖습니까.”

군터는 말 대신 코웃음으로 답했다. 말해 무엇 하겠는가. 땅 위보다 말 위에서 더 편안한 수준이다. 군터가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말 타는 재주였다.

“언제 한 번 알려주십쇼. 저도 멋들어지게 말 타고 싶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 * *

잠잠하던 요새에 일이 터진 것은 전령들이 떠난 다음날 새벽이었다.

“꺄아악!”

뾰족한 비명소리가 요새를 울렸다. 경계 근무를 서던 병사들과 곤히 잠들어 있던 병사들이 모두 깜짝 놀라 비명 소리가 들린 곳으로 향했다. 군터는 그중에서도 가장 빠르게 반응한 이들 중 하나였다.

“뭐야! 무슨 일이야!”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한 군터는 눈에 보이는 참상에 미간을 좁혔다.

구석에서 얼굴을 부여잡고 있는 한 여인과, 그 여인을 노려보며 씩씩대고 있는 소년.

손으로 가린 여인의 얼굴에서는 핏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고, 소년의 입가에는 피가 묻어있었다. 섬뜩함을 넘어 귀기가 어린 소년의 얼굴은 전날 어미의 등에 숨어 있던 겁 많던 소년을 떠올릴 수 없게 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나직한 말에 소년이 고개를 돌렸다. 소년의 얼굴에 서렸던 귀기는 그를 보자마자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다. 대신 그 거기에 두려움과 오기, 당당함이 자리했다.

“저는 어머니를 지켰어요. 당신이 말했던 대로 했다구요.”

군터의 시선이 소년의 뒤쪽으로 옮겨갔다.

소년의 어미가 울고 있었다. 누구한테 두들겨 맞기라도 했는지 얼굴은 온통 멍과 피범벅이었다.

“하여간 계집들이란.”

“계집인 거하곤 상관없지.”

“그래. 아니 말이야 바른 말로, 지들은 이제 곧 어디로 팔려나가서 어떻게 고생을 하게 될지 모르는데 어느 년은 아들까지 데리고 태평하게 앉아 있으니 당연히 열이 받지 않았겠어? 물론 그렇다고 해도 달려든 건 좀 과했지만…….”

“그나저나 저 형씨는 뭐 저렇게 심각해?”

“글쎄. 이제는 자기 노예니까 아무래도 신경 쓰이겠지.”

“자기 것은 어지간히도 알뜰히 챙기는 모양이군. 그럴 거면 아예 옆에 끼고 다니던가.”

자기들 딴에는 멀찍이 떨어져서 이야기하니 안 들릴 거라 생각했는지 온갖 소리들을 다 해댔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달려가 혓바닥을 뽑아주고 싶었지만 심호흡까지 하며 꾹 참았다.

소년, 쿠르파는 다행히 벌을 면했다. 먼저 시비를 건 것이 상대 쪽이기도 했고, 주인인 군터를 봐서 조용히 넘기기로 한 것이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쿠르파의 어미, 치예가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녀는 현명한 여인이었다. 아들이 누구 덕에 무사했는지는 굳이 생각해볼 필요도 없었다.

“됐다. 좋은 아들을 뒀군.”

군터는 쿠르파를 탓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쿠르파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잘 했다고 칭찬해주었다.

사내라면 여인을 지킬 줄 알아야 한다. 특히 어미를 지키기 위해 남의 볼 살을 뜯어 물 줄 아는 용기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네가 나보다 낫다.”

“예?”

얼굴이 빨개진 채 고개 숙이고 있던 쿠르파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군터는 소년의 꾀죄죄한 머리칼을 쓰다듬어주었다. 소년의 자그마한 머리는 큼지막한 그의 손에 한 번에 들어왔다.

“난 너처럼 하지 못했거든.”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할 터였다.

하지만 쿠르파는 그가 쓰다듬기를 멈출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크고 강한 손은 힘 한 번 주는 것으로 소년의 머리를 으깰 수 있었으나 소년은 그런 그의 손길에서 오히려 안정을 느꼈다.

* * *

파들파들 떨리는 몸뚱이를 발로 지그시 눌러 밟았다. 그리고 창날을 더 깊숙이 박아 넣었다. 뾰족한 날 끝이 몸뚱이를 뚫고 땅에 박혀 들어갔다.

“커윽!”

아직 끊이지 않은 모진 목숨이 마지막 신음을 토했다. 그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군터는 옆의 바위에 걸쳐 앉았다.

“악취미 아닙니까?”

프레드릭이 혀를 내둘렀다. 창에 복부를 관통당한 약탈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조금씩 얼굴에 핏기가 가시고 있었다. 더 소름끼치는 것은, 그러면서도 바닥에는 피 한 방울 흘러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나?”

“전혀요.”

그렇게 이상한가? 군터는 피를 흡수하고 있는 검창에 시선을 주었다. 첫날 괴인과의 교전 이후 몇 명의 피를 먹였지만 크게 변한 것은 없었다. 피의 문양 역시 더 진해지거나 하는 것 없이 지지부진하고, 날의 예기도 별반 달라진 것 같지 않았다.

‘급할 것은 없다.’

수십 년간 피를 본 전사들도 온전한 문양을 완성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첫 실전에서부터 흐릿하게나마 문양을 띄운 자신이 오히려 특이한 경우다.

“끄…허어억!”

간당간당하던 숨이 끊겼다. 얼굴은 핏기가 완전히 사라져 창백하게 굳어졌다. 군터는 그 즈음해서 창검을 뽑아들었다. 날에는 핏물 한 방울 묻어있지 않았다.

“가뜩이나 시절도 수상한데 별 잡것들이 다 설치네요.”

약탈자.

흔히 일컫는 도적과 비슷하면서도 약간 다르다. 도적보다 더 자잘한 부류라고 할까. 도적이라고 하는 것들이 수십 명씩 몰려다니는 데 비해 이것들은 대중이 없다. 근거지 없이 돌아다니며 내키는 대로 구는 떠돌이라고 할 수 있다.

상부에서 약탈자들에 대한 즉결처형 명령이 내려진 것은 꽤 오래 된 일이다.

다만 즉결처형이라고 해도 음성으로는 포로로 잡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노예로 팔아먹으면 꽤 짭짤한 벌이가 되니까 말이다. 물론 임무 중에 포로로 잡는다고 해도 먹일 식량은 알아서 조달해야 하기 때문에 시기가 잘 맞아야 했다. 그리고 지금 군터 십인대의 경우는 그 시기가 맞지 않아 목을 따고 있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들개들이 1년만 안 죽고 복무하면 싸구려 집 한 채 씩은 장만한다더니, 왜 그런지 이제야 알겠네.”

“그러니까 말이야. 이놈들을 다 노예로 팔았으면 꽤 짭짤했을 텐데.”

아직은 다른 부대의 부대원들에게 애송이들이라고 놀림 받는 처지지만, 점차 초원의 바람을 맞아가며 그 티를 벗어던지고 있는 군터 십인대의 병사들이었다.

피를 보는 것에 익숙해지는 만큼 그들은 전선에서의 암묵적인 규율을 몸으로 깨달아 갔다.

선을 지키는 것.

쉬운 것 같지만 실은 가장 어려운 것에 대해서도 서서히 알아가고 있었다.

* * *

“드디어 가는구만!”

“어우! 이번엔 진짜 길었다. 길었어.”

“잡생각이 많아서 그래. 몸뚱이가 편해서.”

귀성(歸城)의 날이 밝았다. 병사들은 저마다 들뜬 얼굴이었다. 특히 막시밀리언 백인대 병사들의 얼굴이 그랬다.

아무리 태연한 척을 해도 하루하루 마음 졸이는 나날이었다. 특히 초소 근무를 할 때면 더 그랬다. 첫날 군터 십인대와 교전했던 괴인에 대한 소문은 이미 요새의 병사들 중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으니까. 소문으로 퍼진 괴인은 팔이 여섯 개에 머리는 세 개, 들소의 뿔이 달린 악마 같은 형상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무리 그게 아니라고 설명해도 은근히 겁이 많은 병사들은 저마다의 악마를 상상했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 끝인 것이다. 적어도 당분간은.

“고생했소.”

“고생은 무슨. 수고 하시오. 원신(源神)의 가호가 있기를.”

교대할 세 개 백인대가 당도하자 본격적인 귀성길에 올랐다.

들뜬 마음을 하늘도 아는 것인지 날은 맑았고 바람도 심하게 불지 않았다. 초원에서 이런 날은 일 년에 몇 번 있을까 말까 한 귀한 날이었다.

“돌아가면 열흘 동안은 발 뻗고 잘 수 있겠구만요.”

임무에서 돌아온 부대에게는 10일간의 휴일이 주어졌다. 10일 간은 요새에서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뭘 하든 자유였다.

“대장은 돌아가면 뭐부터 하실 겁니까?”

“글쎄. 특별히 생각한 건 없는데.”

“그럼 가자마자 한 잔. 어떠십니까?”

입 앞에 대고 손목을 꺾는다. 익살스런 표정에는 세상 근심 걱정을 다 덜어낸 자의 후련함이 있었다.

군터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지. 그러고 보니 술을 마신지도 꽤 됐군.”

살마드에서 로크와 송별주를 마셨던 것이 마지막이었으니…거의 두 달이 다 됐다.

‘그 녀석, 잘 지내고 있으려나.’

로크야 어디에다 던져놔도 넉살 좋게 잘 살 녀석이지만, 그래도 궁금하긴 했다.

“어! 뭐야?”

“눈이잖아? 젠장.”

하늘을 보니 새하얀 가루들이 너풀너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첫눈. 본격적인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전령이다.

“아…왜 하필 지금.”

여기저기서 볼멘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며칠 간 계속 걸어서 돌아가야 하는 상황에서 눈이 달가울 리가 없다.

하지만 군터는 이 욕만 바가지로 먹는 불청객이 썩 반가웠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 것인지, 바람도 없이 흘러내린 눈 한 송이가 그의 콧잔등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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