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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18화 (18/1,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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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밀리언이 물었다.

“궁금한가?”

“예.”

묵묵히 뒤따르던 코르넬이 답했다.

그는 정말 궁금했다. 전투가 끝난 이후 지금까지 막시밀리언이 보인 모든 모습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막시밀리언은 명석했다. 본래 그의 부친은 그를 군인이 아닌 관리로 키우고자 했었다. 막시밀리언 본인의 뜻이 군문에 있지 않았더라면 그는 분명 글을 쓰는 관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제국의 모든 방언을 할 수 있으며, 초원어에도 능했다. 초원인과 대화를 하는데 통역이 필요 없는 그였다. 그럼에도 그는 파드라스 앞에서 초원어를 못 하는 척 했고 굳이 군터를 시켜 통역하게 했다. 그리고 거기에 굳이 쓸데없는 주문까지 더했다.

코르넬은 그런 막시밀리언의 의중을 전혀 짐작 할 수 없었다.

“시험해 보고자 한 것이네.”

“어떤 시험 말입니까.”

“나를 따를 수 있는 자인지, 그럴 수 없는 자인지에 대한 시험.”

“예?”

막시밀리언은 뒷짐 진 채 멈춰 섰다. 초원에 부는 선선한 바람은 아직 그에게는 너무 찼다.

“내가 본 바로, 군터는 올곧은 녀석이네. 순진하다고 해야 할까? 뭐 아무튼, 남한테 거짓말 할 성격은 못 된다는 거지.”

상인의 자식으로 태어나고 자란 막시밀리언은 자만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사람 보는 눈 하나 만큼은 스스로도 쓸 만하다 자평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두 달이 넘는 시간 동안 꾸준히 살펴본 결과다.

“녀석은 좋은 군인이야. 어떤 상황에서도 용감하고 훌륭하게 싸우겠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물론 용감한 부하로만 남는 것도 좋지만, 녀석은 그것만으로는 좀 아쉬워.”

“녀석을 크게 보고 계시는군요.”

처음 토프락에게 돈을 주어 그를 살 때는 명령 잘 듣고 잘 싸울 수 있는 부하면 족하다 여겼다. 하지만 계속 보다보니 그것만으로는 아쉬운 인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욕심이 난 거다.

“그래서 시험해 보신 결과는 어떻습니까. 합격입니까?”

“일단은.”

올곧은 자는 뻣뻣하기 쉽다. 뻣뻣한 자는 굽히지 못한다. 그래서는 중히 쓰기가 어렵다.

하지만 다행히 군터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욕심이 있었다. 욕심이 있는 자는 다루기가 쉽다. 바라는 것을 주기만 하면 되니까. 그런 자는 믿을 수 있다.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여인과 아이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군터는 멋쩍게 턱을 긁었다.

그는 그에게 주어진 보상으로 그들 모자를 택했다. 덕분에 그들은 노예상인에게 팔려가는 비참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딱히 이성적으로 끌려서는 아니다. 그녀는 평범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고, 아무리 좋게 봐도 아름다움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그랬기에 그가 이 여인을 택했을 때 주변에서 묘한 시선을 받았다. 특이한 취향이라면서 말이다.

미의 관점이 남다른 것도 아니고, 몇몇 이들이 농담처럼 던져대는 말처럼 유부녀 취향인 것도 아니었다. 거듭 말하지만, 애당초 단순한 욕심으로 그들 모자를 택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저…어째서 저희를.”

여인은 아직 불안감이 가시지 않은 기색이었다. 그녀가 꼭 붙든 아이도 어미의 불안을 알았는지 표정이 좋지 않다.

“…….”

군터는 말없이 물끄러미 모자를 보았다.

젊은 어미와 아이. 우연히도 아이는 사내아이였다. 이제 갓 열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의문이 드는 것이 당연하다. 이득을 챙기려면 이런 어디다 써야 할지 모를 모자 대신 노예가 아니라 차라리 돈으로 받는 것이 나았으리라. 그럼에도 군터가 그들을 택한 까닭. 그것은.

“초원에서 도망쳐 나올 때, 내 어머니는 나를 앞에 태우셨지.”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초원을 벗어나서도 한참 동안 말을 달렸다. 더 이상 달리지 못하게 됐을 때 말에서 내렸는데, 어머니의 등에 화살이 네 대나 꽂혀 있더군.”

군터는 몸을 일으켰다. 욱신거리는 몸은 좀 더 편히 앉아 있으라고 투덜댔지만 어쩐지 그는 이 자리에 계속 있기가 불편했다.

“지금은 네 어미가 너를 지켜주겠지만, 머지않았다.”

군터는 어미 뒤에 숨은 소년을 보고 말했다.

“네가 조금 더 크면, 그때부터는 네가 네 어미를 지켜야 해. 알겠느냐.”

“…네.”

소년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알았을까? 아니면 그저 분위기에 동조한 것일까. 어쨌든 소년의 눈에는 힘이 있었다.

“흠. 벌써 끝냈나?”

초소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 널찍한 바위에 앉아 바람을 쐬는데 막시밀리언이 다가왔다. 그는 일어나려는 군터를 제지하고 그 옆에 앉았다.

“어찌 벌써 여기 와 있나? 몸 상태가 안 좋아서 그런가?”

막시밀리언이 짓궂은 농담을 던졌다. 군터는 쓰게 웃었다.

“그럴 생각으로 데려간 것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면? 아이 앞에서 범해질 어미가 불쌍해서 그랬나?”

“그런 것도 있지요.”

“의외로 상냥한 면이 있군.”

“…….”

“포로들은 결국 오테론에서 다 노예로 팔릴 걸세.”

“예.”

이미 예상한 바였기에 놀라는 일은 없었다. 그들은 오테론에서 다시 한 번 간단한 심문을 받은 후에 노예 상인에게 팔릴 것이다. 그 값은 세 백인대가 알아서 나눠 가질 테고. 이런 식의 부수입은 전방에서 근무하는 들개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 같은 것이었다.

“자네가 원하는 대로, 데려간 모자는 자네 몫으로 주어질 걸세. 그리고 얼마 되지는 않겠지만 포상금도 주어질 것이야.”

“예? 하지만 저는.”

“파드라스 백인장에게는 미리 말해 뒀네. 자네 공이 컸던 것도 있고, 그 모자는 팔아봐야 별로 값도 못 받을 테니까 말이야.”

“으음.”

“흐흐. 혹여 내키지 않는다면 말하게.”

“아니,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그럼 됐군. 내 작은 성의표시라고 생각하게.”

“…감사합니다.”

특별히 바란 것은 아니었으나 거절할 이유도 없다. 군터는 방금 전에도 보았던 모자를 떠올렸다. 아무래도 그들은 10여 년 전의 자신과 어미보다는 처지가 조금 더 나으려는 모양이다.

*

“바람이나 쐬고 싶다고 해서 보내줬건만 이게 무슨 꼴이냐. 야녹.”

“…….”

전사, 야녹은 눈을 꾹 감은 채 침묵했다.

그 말처럼 간단히 바람이나 쐴 마음으로 가볍게 나선 길이었다. 그런 주제에 부하들을 열 셋이나 잃고 본인 스스로도 중상을 입은 채 도망쳐왔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무슨 할 말이 있으랴. 그저 입을 다물고 눈을 감은 채 내려질 처분을 기다리는 것 외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축복까지 사용했다면서? 네가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겠지?”

상석에 앉은 덩치 큰 사내가 골치 아프다는 듯 머리를 짚었다. 야녹은 더욱 고개를 숙였다.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지. 어차피 언제까지고 숨길 수도 없는 것이었으니. 하지만 잘못에 대한 책임은 분명하게 져야 할 것이다.”

“예. 책임은 분명히 지겠습니다. 어떠한 벌이든 달게 받지요.”

“일단은 가서 쉬어라. 서 있기도 힘들어 보이는군.”

“…예.”

야녹이 물러가고, 상석의 사내는 다시 한 번 머리를 짚었다. 머리가 지끈 거렸다. 이 두통은 야녹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었다. 물론, 멍청한 부하 놈 때문에 조금 더 심해진 감이 있는 것 같기는 하다만.

“지금 당장 부족으로 가라. 가서 대족장께 전해. 정리는 끝냈다고.”

“예.”

“그리고…어린 전사 하나가 노출 됐다고도 전해라.”

“알겠습니다.”

뒤편에 서 있던 부하가 사라졌다. 그제야 온전히 막사 안에 남게 된 그는 의자의 팔걸이를 움켜 잡았다.

손에 한 번 힘이 들어가는가 싶더니 뿌드득! 하는 소리를 내며 팔걸이가 으스러졌다. 나무가루가 손아귀 사이로 흘러내렸다.

“크으으! 정말 참기가 힘들구만.”

악 다문 이빨은 맹수의 그것처럼 뾰족했다. 등불 하나가 간신히 밝히는 어둠 속에서 샛노란 안광이 등불보다 밝게 빛났다.

*

군터는 파드라스 백인대와 함께 요새로 귀환했다. 본래대로라면 교대까지는 더 근무해야 했지만 전투를 치루고 부상까지 입은 마당에 교대 시간을 따지는 이는 없었다. 군터 십인대는 나흘 간 초소 근무에서 열외되는 것으로 이야기가 됐다.

“거 좀 적당히 좀 꼼지락 거리지?”

“자리를 바꿔주던가. 여긴 완전 얼음장이야.”

“빌어먹을 엄살은…….”

조약한 숙소에서 잠을 청하는데 여기저기서 희미하게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병사 중 하나가 뒤척거리며 툴툴댔다. 그러자 옆에 누워 있던 또 다른 병사가 끌끌 웃으며 핀잔을 주었다.

“깊게 베이지도 않았잖아? 진짜 제대로 한 번 다치면 아예 드러눕겠구만.”

“지는 달랐던 줄 아나.”

“거 새끼들 입 좀 닥쳐라.”

시시껄렁한 말장난들이 끝도없이 이어지자 프레드릭이 말을 끊었다. 그러면서 그는 그의 옆에 시체처럼 누워 있는 군터를 흘깃 살폈다. 혹여 그가 불쾌하지는 않을지 걱정하면서.

하지만 군터는 못 들은 것처럼 아무 반응이 없었다. 분명 아직 잠든 것은 아니었는데 말이다.

“이 새끼들 이거…힘이 남아 도냐? 싸울 때 얼마나 농땡이를 부린 거야? 아주 그냥 빠져가지고…….”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닥쳐. 닥치고 잠이나 쳐 자.”

병사들 중에는 프레드릭보다 나이가 많은 이도 있었다. 하지만 두 달 넘는 시간 동안 군터 십인대로 지내면서 프레드릭은 2인자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했다. 거기에는 그의 타고난 독기가 크게 한 몫 했다. 군터는 모르고 있었지만, 군터 십인대의 병사들 중 프레드릭에게 한 번씩 두들겨 맞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였다. 수컷들의 서열 경쟁에서 프레드릭은 당당히 승리를 거머 쥐었다. 그 뒤로 그의 말은 십인대 내에서 힘을 가졌다.

“알았다. 알았어.”

“잠이나 자자고. 잠을 푹 자야 상처도 빨리 아물지.”

그렇게 수다가 끊겼다.

하지만 병사들은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끊이지 않을 것처럼 계속 이어지는 신음소리도 신음소리지만, 전투에서 입은 자잘한 상처들이 차가운 바닥의 공기와 만나며 고통을 주었기 때문이다. 농담처럼 이야기했지만 그들이 전투에서 입은 부상은 말로 이야기한 것처럼 가볍지만은 않았다.

간신히 잠에 들어서도 그들은 계속 끙끙대며 몸을 뒤틀었다. 그러면서 몇 번씩 잠에서 깼다.

프레드릭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어깨에서 느껴지는 격통에 눈을 떴다.

“하.”

‘잘도 주무시는구만.’

그는 옆에서 고른 숨소리를 내며, 처음 누웠던 자세 그대로 곤히 잠들어 있는 군터를 보고 헛웃음을 머금었다.

부상을 입어도 가장 크게 부상을 입은 이가 바로 그일 텐데, 잠은 또 그가 제일 잘 자고 있으니 뭔가 잘못 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하여간 대단한 양반이라니까.’

그답다고 생각하며 다시 잠을 청했다. 하지만 한 번 달아난 잠은 좀처럼 쉽게 다시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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