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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드라스와 막시밀리언은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이곳에서 복무한 지 벌써 4년째지만 그런 괴물은 처음 봤네. 어떻게서든 잡았어야 했는데.”
파드라스가 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의 안타까움은 괴인의 정체나 능력에 대한 의문에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었다. 괴인에 대한 정보는 필시 중요한 정보가 될 터인 만큼, 괴인을 생포했다면 그 공이 결코 작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아직 다 날아간 건 아니었다.
“데려왔습니다.”
병사들이 포박한 이들을 데려왔다. 조금 전 전투에서 생포한 초원전사들은 아니었다. 다수의 여인들, 그리고 몇몇 아직 솜털도 안 가신 어린아이들로 이루어진 구성이었다.
그들은 잔뜩 긴장한 기색이었으나 두려워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나이 먹은 어른부터 어린 아이들까지 모두 당당했다. 파드라스와 막시밀리언은 그 의연함에 내심 감탄했다.
“너희는 누구냐?”파드라스가 물었다.
“aeuiwenrqweoinrw. riwnerbniwue…sennuhwae.”
“tltldho! akshdkelsk! solak kaelu!”
여인들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말을 쏟아냈다. 하지만 그 말은 제국어가 아니었다. 완전히 낯선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 초원어였다.
“…이것들이 뭐라는 거야? 제국 말 할 줄 아는 사람 없나!”
“eorkwhquwemdk.”
파드라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자네 혹시 초원어 할 줄 아나?”
“아니요. 초원어는…….”
“쯧! 내 부하 놈들 중에는 아쿼러즈나 초원어를 할 줄 아는 놈이 없는데.”
“파드라스님.”
“음?”
“다행히도, 제 수하 중 하나가 아쿼러즈입니다.”
“오! 그래? 다행이군. 그럼 불러오게.”
막시밀리언이 슬쩍 난색을 표했다.
“다만 지금 바로는 조금 힘들 것 같습니다.”
“응?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실은 그 수하가 조금 전까지 괴물과 사투를 벌였던지라. 상태가 많이 좋지 않습니다. 도저히 통역 같은 것을 할 상태가 아니라 일단은 치료가 필요할 듯싶습니다.”
“으음…그런가.”
그렇게 파드라스에게 양해를 구한 막시밀리언은 자리를 빠져나와 군터에게 향했다. 군터는 여전히 초소의 돌담에 기대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막시밀리언은 그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눈 뜬 군터에게 그대로 있으라고 손짓 했다.
“상태는 좀 어떤가?”
“멀쩡합니다. 무슨 시키실 일이라도.”
“음. 실은 지금 포로라고 해야 할까. 초원인들을 데리고 있다네.”
“초원인이요?”
“그래. 여인과 아이들인데…….”
거기까지만 듣고도 군터는 누구를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추적자들에게 쫓기던 그들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습니까.”
“그래. 그래서 그들에게 여러 가지 정보를 좀 얻어내려 하는데, 여기 있는 이들 중에는 초원어를 할 줄 아는 이가 없다네.”
“아아. 통역을 하라는 말씀입니까.”
고개를 끄덕인 군터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막시밀리언이 제지했다.
“아니, 아직 앉아 있게.”
“예?”
“아직 할 이야기가 남았네.”
막시밀리언이 슬쩍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aeuiwenrqweoinrw. riwnerbniwue…sennuhwae.”
“음?”
“이게 무슨 뜻인가?”
“우리가 가진 모든 걸 내놓겠다. 그러니 우리와 우리 아이들은 무사히 보내다오…라는 뜻입니다.”
“그래? 그럼 tltldho. akshdkelsk. solak kaelu. 이건 무슨 뜻인가?”
“그건…죽여라. 망할 남부인들. 정령의 저주나 받아라. 라는 뜻입니다.”
“흐음. 좀 심하군.”
“그런데 대장님께서는 어디서 이 말을?”
“아아. 방금 이야기한 포로들이 한 말이네.”
“…기억력이 좋으시군요.”
“고맙네. 아무튼 이렇게 하세.”
막시밀리언이 더 목소리를 낮췄다. 이제는 숫제 속삭이는 수준이었다.
“자네는 그 포로들이 한 이야기를 통역하되, 그중 일부만을 전하게.”
“예?”
“다 말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네. 물론 중요한 부분은 전해야겠지만 중간 중간 자네가 판단하여 필수적이지 않지만 쓸 만하다 싶은 것은 전하지 말라는 말일세.”
그제야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깨달았다. 그러니까 그의 말은 다른 주머니를 차고 싶다는 뜻이었다.
“으음…그래도 괜찮겠습니까?”
“괜찮지 않을 건 또 뭔가. 말했지 않나. 중요한 부분은 전하고, 곁가지들만 잘라내라고.”
“…알겠습니다. 최대한 머리를 굴려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일단은 계속 쉬고 있게. 파드라스 백인장에게 자네의 몸이 좋지 못하다 말해놨으니 조금은 시간이 있네.”
“예.”
막시밀리언이 돌아가고, 군터는 다시 눈을 감았다.
“…….”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파드라스 백인대는 원군으로서 자신들을 돕기 위해 와 주었다. 그게 그들이 해야 할 의무라고는 해도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자신의 목이 붙어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그런데 그들을 얄팍한 수작질로 속인다? 내키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하지 않겠다고 하면 아마 막시밀리언은 실망할 것이다. 아마 그에게 찍힐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를 꺼내던 그의 눈은 욕심으로 번들거리고 있었으니.
뭐, 상관에게 찍히는 것이야 익숙하다. 하지만 기껏 초원까지 와서 상관에게 밉보일 짓을 한다면 앞으로가 아주 고달파질 것이다. 무슨 핑계를 대어 다른 부대로 전출시킬지도 모르고, 계속 이곳에 남는다한들 출세의 기회는 없어질 것이다. 막시밀리언이 약속했던 미래도 없었던 일이 되겠지.
‘어설프게 착한 척 해봐야 소용없다.’
누구도 빵을 남과 나누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먼저 손을 뻗어 쥐는 놈이 빵의 주인인 것이다.
‘거기다 중요한 것은 그대로 전하고 곁가지만 잘라내라 했으니.’
그렇게 합리화하니 불편하던 마음도 조금 가라앉았다.
잠시 후 병사가 부르러 왔을 때, 군터는 말없이 몸을 일으켰다.
포로들은 모두 손이 뒤로 묶인 채 무릎 꿇려져 있었다. 그 주변을 병사들이 지키고 섰으며 정면에는 파드라스와 막시밀리언이 서 있었다.
“오. 용감한 군인이로군. 몸은 괜찮은가?”
파드라스가 물었다.
“예.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섭섭한 말을. 몸이 좋지 않은 자네에게는 미안하지만 통역을 좀 해주어야겠네. 이 포로들을 심문하려 하거든.”
왜 굳이 이 찬바람을 맞으며 급히 심문하는지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그럼 시작하지. 내가 묻는 말을 그대로 전하고, 그 답을 통역해주면 되네.”
“예.”
군터는 여인들 앞에 가서 섰다. 그리고 여인들 중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이 커졌지만 그는 못 본 척 했다.
“그럼 먼저…….”
*
“너희들은 누군가.”
“…….”
“묻는 말에 답해라. 성실하게 답한다면 살 확률이 조금은 높아질 테니.”
여인들 중 한 명이 번쩍 고개를 들며 외쳤다.
“도망자인가!”
“그래.”
“초원의 자식이 남부 놈들의 앞잡이가 되었는가! 부끄러운 줄 알아라!”
“그런 식이라면 살 수 없다. 너도, 네 아이도. 네 아이가 저 중에 있다면 말이지만.”
“흥!”
“죽는 건 자유지만 말하기 싫다면 입 닥치고 있어라. 시끄럽게 굴면 먼저 네 혓바닥부터 뽑아줄 테니.”
“으윽!”
군터는 서늘한 눈을 한 채 여인을 노려보았다. 원래부터 남다른 기세를 지닌 그였다. 거기에 막 전투를 마친 터라 그의 시선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아무리 억세다 한들 일개 여인이 그 시선 앞에 당당하게 굴 수는 없었다.
“그럼 다시 묻지. 너희는 누군가.”
“…말하면 우리를 살려주는 겁니까?”
말을 한 것은 방금 전, 처음 눈을 마주쳤던 여인이었다. 또한 추적자들에게 쫓길 때 가장 선두에서 말을 몰던 여인이기도 했다.
“모른다. 하지만 입 다물고 있는 것보다는 살 확률이 더 높겠지.”
“우리는 아빈샤의 생존자들입니다.”
“너희 부족은 이미 멸망했다는 건가?”
“예.”
“어느 부족에게?”
“반카누라즈.”
“반카누라즈?”
군터는 그 이름을 곱씹었다. 그러나 역시 들어본 적 없는 부족명이었다. 사실 아빈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상한 일도 아니다. 어렸던 그가 광대한 초원의 부족들을 알면 얼마나 알았겠는가.
“전쟁이었나?”
“아니. 일방적인 습격이었어요. 그들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들이닥쳤고, 우리 부족은 하루아침에 멸망했죠.”
“사이가 안 좋던 부족인가?”
“가끔씩 가벼운 다툼이 있긴 했지만 전쟁까지 갈 정도는 결코 아니었어요. 그들도 우리도, 서로를 존중했죠.”
존중한다는 것은 서로를 조심했다는 뜻이다. 이는 부족 간 힘의 격차가 크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추적자들도 반카누라즈의 전사들인가?”
“맞아요.”
“추적자들의 대장에 대해서 알고 있나?”
“그들의 대장이요?”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해 보였다. 군터는 그들의 대장이 괴물로 변신했던 것을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서야 원하는 대답이 나왔다.
“그 자에 대해서는 몰라요. 하지만.”
“하지만?”
여인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꾹 다물린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그녀뿐 아니라 가만히 있던 다른 이들까지도 비슷하게 변했다. 포박당한 신세임에도 꿋꿋하게 있던 아이들은 눈물까지 보이며 떨었다. 진한 공포가 퍼졌다.
“그런 자들에 대해서는 알고 있어요. 그자들에게 부족이 멸망당했으니까요.”
억눌린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
군터는 통역 일을 끝내고 다시 막시밀리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고 많았네.”
“아닙니다.”
“그래. 뭘 챙겼나?”
“…요 근래에 여러 부족들의 소식이 끊겼었다고 합니다.”
“소식이 끊겼다 함은…….”
“초원의 부족은 이동할 시기가 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습니다.”
시기가 되지 않았음에도 소식이 끊겼다는 것. 그것은 곧.
“같은 자들의 소행이라고 보는가?”
“모르겠습니다.”
“으음. 좋아. 또 있나?”
“예. 그 전사…그러니까 저희가 놓친 그 자는 모르는 얼굴이었다고 합니다.”
“으음?”
“아빈샤 부족과 반카누라즈 부족은 본래 교류가 있던 사이라고 합니다. 양쪽 모두 그리 크지 않은 부족이었으니 당연히 서로의 면면도 알고 있었을 겁니다. 특히 한 무리의 지휘관 정도 되는 전사라면 모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그 자가 외부인이라는 말인가?”
“그렇게 생각 됩니다.”
“흥미롭군. 흥미로워.”
막시밀리언은 팔짱을 낀 채 무언가를 생각하듯 잠시 침묵했다.
“음. 좋아. 아주 좋았네. 군터. 좋은 정보였어. 자네는 또 한 번 공을 세우는군.”
치하하듯 가볍게 어깨를 다독인 그가 몸을 돌렸다.
“알고 있겠지만, 이에 대해서는 함구하도록 하게.”
“예. 저…….”
“음?”
“저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군터가 바라본 곳은 포로들이 있는 곳이었다. 심문이 끝난 뒤에도 그들은 같은 자리에 묶여 있었다.
“일단은 요새로 데리고 가야지. 그 뒤로 어떻게 할지는…뭐 사실 뻔할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일단 세 백인장이 다 모여 논의해 봐야겠지 않겠나.”
“…….”
“왜? 신경이 쓰이는가? 동족이라서?”
“특별히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어쩔 수 없는 부분이네. 이런 고된 일을 하면서 보상이라도 두둑하지 않다면 누가 목숨을 걸고 싸우려 하겠나?”
“모두 팔려가는 겁니까?”
“아마도 그렇겠지.”
산 자들은 모두 노예로 팔려갈 것이다. 그리고 그 값은 적당하게 병졸들에게도 분배가 될 터. 몸이 고단한 와중에도 병사들의 표정이 그리 어둡지 않은 까닭은 승전에 대한 기쁨도 기쁨이고, 한 몫 챙길 수 있다는 기대가 크기 때문이다.
“혹 따로 챙기고픈 녀석들이 있다면 늦지 않게 말하게. 이번 싸움에서는 자네의 공이 컸어. 가만히 있어도 어느 정도는 돌아갈 테지만, 내 따로 말해서 최대한 받을 수 있는 만큼은 받도록 해주겠네.”
“마음 써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