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전 -->
“뭉쳐! 그대로 있어! 앞으로 나가지 마!”
적들은 밀집한 병사들을 피해 흩어졌다. 병사들은 그 뒤를 쫓지 못했다. 말을 몰며 거리를 벌리는 와중에도 활을 쏘아대는 통에 한 걸음도 뗄 수 없었다. 멀어지는 적들의 뒤꽁무니를 보는 병사들에게 프레드릭이 뭉칠 것을 외쳤다.
“그럼 뭐 어쩌자고! 여기서 그냥 목 내밀고 있어?!”
병사 중 한 명이 악을 질렀다. 프레드릭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대가리를 달고 있으면 생각 좀 해! 저놈들이 언제까지 계속 쏴댈 수 있을 것 같아! 화살은 떨어져! 버티기만 하면 된다고! 투트니 개새끼들한테 배운 거 기억 안 나!”
군에서 지급받은 무구들 중 가장 질 좋은 것이 방패다. 만들기 쉬워서 그랬을까? 아니다.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그런 거다. 적과의 전투에서 그만큼 중요하게 많이 쓰이기 때문에 그런 거다. 초원인들과의 전투에서 방패의 역할은 창칼보다 더 크다.
“일단 막아! 저놈들 화살이 다 떨어질 때까지 버텨!”
프레드릭의 호령에 병사들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진형을 유지했다. 치가 떨렸던 한 달 간의 훈련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끝까지 버틸 수 있을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프레드릭은 생각했다.
그의 인생에 지금처럼 진득한 불길함을 느낀 적은 없었다. 목 끝에 칼이 닿아있는 것 같은 죽음의 감각이 발목을 붙들었다.
콰앙!
굉음. 그것은 창칼이 맞부딪치며 났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강렬한 소리였다.
‘막았어?’
군터는 손끝에서부터 느껴지는 저릿함에 내심 놀랐다. 한 방에 목을 칠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건만, 목을 치기는커녕 날에 피 한 방울 묻히지 못할 줄이야. 게다가 이 반동은 또 뭐란 말인가? 보통 사람이었다면 그대로 무기를 놓쳐버렸을 정도의 충격이다.
게다가 기습이었다. 방패로 정확히 시야를 가리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이 정도의 반응.
‘보통 놈이 아니군.’
대장으로 보이는 놈의 목을 따고 시작하려 했다. 하지만 의외로 쉽지 않은 상대인 듯했다. 아주 오랜만에 긴장감이라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뭐하는 놈이냐!”
충격을 받은 것은 군터만이 아니었다. 그의 공격을 막은 적 역시 낙마하여 땅에 발을 디디고 섰다.
“예의가 없군. 제국군에게 말을 할 때는 제국어를 써라.”
“초원어를 쓰는군. 도망자냐?”
도망자.
초원의 사람들이 초원을 떠난 이들을 일컬을 때 쓰는 말이다. 듣기 좋은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또 아주 틀린 말도 아니다. 어쨌거나 초원을 떠난 이들은 어떤 이유에서건 도망친 이들이 맞으니까.
군터는 굳이 그 말에 맞장구치지 않았다. 무어라 반박하겠는가. 어렸을 적이라고는 해도, 그가 초원에서 도망쳐 나온 것은 사실이다. 제국인으로서 아쿼러즈라는 말이 그런 것처럼, 초원인들에게 듣는 고향을 등진 도망자라는 말은 지울 수 없는 낙인과도 같다. 때문에 그는 도망자라는 말을 듣자마자 진한 수치심과 불쾌감을 느꼈다.
“술사(術士)인가?”
칼을 늘어뜨린 전사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노랗게 빛이 났다. 마치 짐승의 그것처럼. 인간의 눈이라고 보기에는 사뭇 괴이하다.
“술사?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그가 허리춤에서 칼 한 자루를 더 뽑았다. 양손에 하나씩 쥔 월도가 아래로 향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군터가 땅을 박찼다.
두 자루 칼과 한 자루 창검이 맞부딪쳤다.
군터는 이제 창검을 쓰는 것에 꽤 익숙해져 있었다. 그간 없는 시간을 쪼개어 가면서라도 연습에 연습을 거듭한 성과였다.
카앙!
불똥이 튀며 노란 눈의 전사가 뒤로 튕겨져 나갔다.
몇 발자국이나 뒷걸음질 치던 그는 다소 질린 기색이었다.
“믿기 힘들군.”
양손에 들린 칼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최대한 충격을 피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더라면 진즉에 날이 부러졌을 것이다.
“네 녀석, 그냥 평범한 잡졸이 아니로군.”
“입 발린 말을 해도 소용 없다.”
군터는 속이 탔다.
그들의 싸움만을 놓고 보면 여유로웠다. 하지만 시선을 노란 눈의 전사에게 고정해 두면서도 그의 귀는 병사들의 악에 받친 고함소리를 듣고 있었다.
본래라면 이 눈앞의 적을 빠르게 목 베고 병사들과 합류하여 그들을 이끌어야 했다. 하지만 전혀 예상치도 못하게 발이 묶인 상황.
‘오만했군.’
입맛이 썼다. 군터는 다시금 다리에 힘을 주었다. 어쨌거나 이렇게 되어버린 이상, 할 수 있는 한 빠르게 마무리를 짓고 합류하는 수밖에는 없다.
다시금 칼날이 부딪쳤다. 노란 눈의 전사는 날렵하게 움직이며 쌍칼을 휘둘렀다. 그에 맞서는 군터는 최소한으로 움직이며 힘을 실어 공격했다.
‘시간을 벌려는 수작인가.’
두 개의 칼이 요란하게 움직이기는 하지만 적극적인 공세는 없다. 다만 그런 척을 하고 있을 뿐. 시간을 끌겠다는 의도가 빤히 보였다.
당연한 수법이다. 군터 역시 시간을 끌면 자신이 불리해지리라 생각했다. 애당초 한 달 훈련 받은 보병 10명이 능숙한 초원의 전사들 스물 여를 당해낼 수 있을 리 없다. 사냥감이 사냥꾼들에게 사냥당하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그저 시간문제일 뿐.
하지만.
“멍청한 놈!”
방어를 도외시하고 크게 휘두른 한 방에 칼날이 부러졌다. 사방으로 튄 파편이 가슴팍을 찌르고 팔뚝에 박혀 들어갔다. 노란 눈의 전사 역시 피를 뿌리며 튕겨 나갔다.
군터는 지체 않고 달려들었다. 당장에 적의 목을 취할 생각이었다.
퍼억!
“큭!”
하지만 쓰러진 전사에게 다가갔을 때, 군터는 달려간 것보다 빠르게 반대 방향으로 나가 떨어졌다. 쓰러졌던 전사가 그를 걷어찬 것이다.
‘길어졌다?’
군터는 욱신거리는 가슴팍의 통증을 참으며 몸을 일으켰다. 헝클어진 머릿속을 진정시키며 냉정을 유지했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전사를 주시했다. 피를 뚝뚝 흘리며 일어서는 그의 몸짓은 상황에 맞지 않게 여유로웠다. 직접 보지 않았다면 거짓이라 여길 만큼.
“너…인간이 아니군.”
조금 전 전사가 그에게 물었던 것과 같은 물음을 돌려주었다.
“글쎄. 잘 모르겠군.”
덩치가 더 커졌다. 착각이 아니었다. 얇은 가죽 갑옷이 터져나갈 듯 부풀었다. 심지어 튼튼하게 묶었던 갑옷의 끈이 끊겼는지 풀렸는지 바람에 너풀거리며 휘날리고 있었다.
거기에 그저 색만 그러했던 눈동자가 마치 정말 사자의 것처럼 세로로 변했다. 명백히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외형이었다.
“나는 인간인가? 확실히 껍데기만 보면 난 여전히 인간이다. 하지만 보통 인간은 아니지. 평범한 인간은 이런 힘을 가지지 못하니까. 나는…신에게 선택받은 특별한 인간이다. 그래……. 신인(神人)이라고 해도 좋겠지.”
무언가에 흠뻑 도취라도 된 것처럼, 그는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을 혼자서 중얼거렸다.
“으음……!”
전사가 몇 발자국 다가왔을 때 군터는 억눌렀던 침음을 흘렸다.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던 그의 자세한 모습이 거리가 가까워지며 선명히 보였기 때문이다.
얼굴을 비롯해 살이 드러난 부분에 칙칙한 색의 갑각이 있었다. 마르고 갈라진 땅처럼 생긴 그 갑각은 마치 갑옷처럼 몸을 감싸고 있었다. 갑옷과 옷 등으로 가려진 아래의 피부 역시 그러하리라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주술인가?’
술사, 혹은 주술사라고 부르는 이들은 보통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신비한 힘을 다룬다. 그런 이들은 극히 소수이며, 그런 만큼 그들의 힘이라는 것도 직접 목격한 이는 드물고 이리 저리 와전이 되며 마치 신의 행사처럼 허무맹랑하게 부풀려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실상 주술사들의 힘은 그리 크지 않다. 부족의 무녀였던 외조모를 둔 군터이기에 그를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부족에서는 무녀가 곧 유일한 술사였다. 하지만 그녀가 부릴 수 있는 주술이라고 해봐야 피먹이 천에 념과 곁가지 술수 몇 가지를 불어넣는 정도였다. 저렇게 인간의 신체에 직접 작용할 수 있는 주술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물론 그가 듣지 못했다고 하여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있다 해도 절대로 흔할 리는 없었다.
그런데 전사가, 그것도 대장이라고는 해도 추격조에나 편성되는 일개 전사가 그 정도의 술수를 부린다?
‘술사가 각인을 한 건가.’
그럴 수도 있다. 주술을 쓴다고 해서 꼭 본인이 술사일 필요는 없다. 당장 자신만 해도 외조모가 피먹이 천을 만들어 준 것을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 저 전사 역시 술사에게 어떤 식으로든 주술을 각인 받은 것일 수도 있었다.
‘까다롭군.’
군터는 팔뚝과 가슴에 박힌 쇳조각을 뽑아내고 침착하게 상대를 살폈다.
몸집이 커진 것을 보아하니 힘이 늘었을 테고, 피부에 파충류처럼 갑각이 생긴 것으로 보아 방어력이 높아졌을 가능성이 있다. 눈동자도 사자나 표범 같이 변했다. 그것이 무슨 능력의 변화로 나타날지는 미지수다. 그리고 그 외에 무언가가 또 있을 것인가.
결국은 부딪쳐보는 수밖에 없다.
“이런 모습이 되는 것은 좋아하지 않아. 추한 것은 둘째 치고 며칠 동안을 고생해야 하거든. 하지만 넌 강하군. 이기지는 못해도 시간 벌이 정도는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마저도 못했어. 비루한 도망자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한 사람의 전사로서 네게 경의를 표한다. 그 경의의 표현으로, 이제부터는 피하지 않고 맞붙어 싸워주마.”
“혓바닥이 길어. 전사답지 않군.”
군터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마도 이 괴물은 겉모습과는 달리 허영심이 많은 놈인 듯했다.
“이 상황에서 도발이라니. 대단해. 뭐, 좋아. 이제 말은 집어치우지.”
전사는 그 말을 한 직후 움직였다. 부러진 칼들은 바닥에 버려둔 채 살짝 몸을 낮추고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그 움직임이 실로 표홀하고 지금까지의 움직임과는 너무도 달랐다.
그러나 군터 역시 온 신경을 그에게 집중하고 있던 터였다. 그 역시 늦지 않게 움직여 창검을 찔렀다.
“흠!”
전사가 팔을 휘둘렀다. 그의 손과 창검의 날이 부딪쳤다.
카앙!
손과 팔이 부딪쳤는데 금속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에 당황할 새도 없었다. 날을 후려치는 강렬한 힘에 몸이 뒤틀린 군터는 황급히 창이 튕기는 방향으로 몸을 돌리며 재차 창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바닥을 쓸듯 하며 다리를 노렸다. 그러자 전사가 앞으로 나아가는 중에 가볍게 몸을 띄우며 재차 손을 휘둘렀다.
촤악!
핏물이 튀었다. 두터운 가죽 갑옷이 예리하게 파이고 피가 솟았다. 그제야 군터는 정확하게 볼 수 있었다.
‘손톱?’
아니, 차라리 발톱이라고 해야 할까. 전사의 손끝은 어느새 맹금류의 발톱처럼 변해 있었다. 날카롭고 커다란 발톱.
“하앗!”
하지만 충격은 충격이고, 군터 역시 그저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가슴팍에서 피를 뿌린 대신 그는 몸을 휘돌리며 발을 높이 휘둘러 전사의 옆머리를 후려 찼다. 묵직한 반동이 발뒤꿈치를 울렸다. 하지만 그 타격은 어느 정도 유효해서, 창검의 날을 피해 몸을 띄우고 있던 전사가 짤막한 비명을 뱉으며 나가 떨어졌다.
군터는 전사가 몸을 일으키기 전에 재차 달렸다. 상대의 정체가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그런 것 따위는 싸움을 이긴 후에 적을 무력화시키고 알아봐도 된다. 생사가 걸린 싸움에 상념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이기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한다. 그 과정에서 상대를 죽여도 상관없었다. 호기심보다는 승리와 목숨이 더 중요하니까.
“크허엉!”
전사가 몸을 튕기듯 일으켰다. 방금 전에 머리를 차이며 느낀 고통이 상당했는지 이성이 있던 눈에 이제는 흉포함만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