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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마드에서 보냈던 시간처럼, 오테론에서의 한 달도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다.
투트니 백인대에게 철저히 시달린 한 달 동안 막시밀리언 백인대는 어벙한 신병의 티를 조금이나마 벗어내는 데 성공했다. 한 달 간 훈련 과정에서 줄기차게 이어진 살기 어린 폭언, 폭력 등은 뭣 모르는 신병들을 극한까지 몰아붙였다. 그러한 혹독함 속에서 막시밀리언 백인대는 실력은 몰라도 독기 하나 만큼은 남 부럽지 않게 기를 수 있었다.
“선두 출발!”
그리고 지금. 마침내 막시밀리언 백인대는 다른 두 백인대와 함께 성을 나섰다. 목적지는 오테론 성 북동쪽의 구릉지에 자리한 자그마한 요새였다.
“후우.”
성에서 출발한 그들이 요새에 도착한 것은 사흘 하고도 반나절이 지나서였다.
요새에 도착하자 진한 피로가 가득한 한숨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긴장을 늦추지 않고 사흘 동안이나 행군하는 것은 만만찮은 피로감을 선사했다.
하지만 도착했다고 해서 마냥 퍼져 있을 수는 없었다. 병사들은 각 십인장들의 지휘 하에 장비를 점검하는 한편 요새 이곳저곳을 살폈다.
그 사이, 백인대장들끼리의 짤막한 인수인계가 끝났다.
“자, 자. 움직인다. 사전에 초소의 위치는 다들 숙지했겠지?”
요새 주변으로 일정 거리마다 초소가 하나씩 배치되어 있었다. 총 11곳으로, 각기 한 개 십인대가 주둔하며 지켰다. 기존에 머물던 세 개 백인대가 돌아가게 되었으니 그 자리도 새로 온 세 백인대가 나누어 지켜야 했다.
“사흘 동안이나 행군을 하고서 바로 찬바람 맞게 해서 미안하네만, 수고들 해주게.”
막시밀리언 백인대에서도 두 개 십인대가 움직였다. 얄궂게도 그 중에는 군터의 십인대도 속해 있어 막시밀리언이 직접 위로를 했다.
“별 말씀을. 그럼 가보겠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군터 십인대가 맡게 된 초소는 요새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날이 어둑해지기 전에 초소에 도착한 그들은 초소에서 대기 중이던 십인대와 교대를 한 후 자그마한 초소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이 좁아터진 곳에서 하루를 보내야 한다는 말이군.”
엄폐를 위해 돌로 쌓은 작은 담벼락 안은 사람 열이 들어가면 빡빡할 만큼 협소했다. 당연히 눕는 것은 생각도 못할 정도였다. 그 뒤로도 공간이 있기는 했으나 바람에 고스란히 노출되는 자리였으므로 몸을 뉘였다간 다음날 일어나지 못할 것으로 보였다.
이제 이곳에서 꼬박 하루를 나야 한다. 군터는 구석에 짐을 던져놓고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움직일 때는 무조건 2인 1조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효시를 쏘도록.”
“예!”
“봉화는 절대 젖지 않게 잘 관리해야 한다.”
군터는 사전에 들은 대로 봉화를 잘 관리할 것을 당부했다. 그 역시 봉화대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이 불 피우는 장치가 그들의 목숨보다 소중하다는 것은 몇 번이나 반복해 들은 얘기를 통해 잘 알고 있었다.
역시 들은 바에 따르면 초소의 존재 이유, 그 자체인 이 봉화는 일정 거리마다 설치된 초소에 하나씩 있었다. 한 곳에서 봉화가 올라오면 다른 초소들에서도 즉각 봉화를 올려 요새에 신호를 주는 구조였다.
“번은 내가 먼저 서지.”
시범 겸 모범을 보이기 위해 군터는 봉화 쪽으로 가 풀이 젖지 않았는지 살폈다. 그의 뒤를 프레드릭이 곧장 따라왔다.
“쉬지 그러나.”
“무조건 2인 1조라고 하시지 않았소.”
“너희 같은 허약한 것들에게는 그렇지. 나는 예외다.”
“됐습니다. 같이 섭시다. 말동무라도 있으면 덜 심심하지 않습니까.”
군터는 더 말하지 않았다. 꼬질꼬질한 얼굴에 피로가 덕지덕지 묻어 있으면서도 굳이 따라나서는 그 마음 씀씀이가 고맙지 않은가.
“이놈의 바람은 정말 미칠듯이 차구만. 점점 더 추워지겠죠? 비도 슬슬 내리기 시작할 것이고.”
“그러고 나면 눈도 내리겠지. 다른 백인대들을 보니까 갑옷에 모피를 덧댔더군.”
“솔직히 실용적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얼어 죽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다음번에 성으로 돌아가면 갑옷에 덧댈 가죽부터 살 생각입니다.”
“좋은 생각이다. 허약한 놈들은 그렇게라도 해야지.”
“…거 말끝마다 허약하다 하시는데, 대장이 괴물이고 우리가 정상이라는 생각은 안 하시오?”
안쪽에 옷을 두 겹 껴입은 프레드릭에 비해 군터는 얇은 옷 한 벌에 갑옷만 덜렁 걸친 채였다. 하지만 추워서 벌벌 떠는 것은 오히려 프레드릭이었다. 군터는 한낮의 산들바람을 쐬듯 태연했다.
“난 이 초원에서 태어났으니까. 본격적으로 겨울이 시작되면 모를까,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다.”
“거 참. 분명 똑같이 살점 붙어 있고 피 흐르는 사람일 텐데 어찌 이리 다를까.”
“다르지 않아.”
“예?”
“똑같아. 다만 다르게 자랄 뿐이지. 두 발로 뛰어다닐 수 있을 무렵부터 말을 타는 법을 배우고, 활과 칼을 쓰는 법을 배워. 열다섯이 되면 그때부터는 성인식을 치르고 한 사람의 전사가 되지.”
아쿼러즈는 괴물이 아니다. 바크렌의 제국인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도 적지 않은 것 같지만, 그들의 생각이야 어쨌건 아쿼러즈 역시 제국인들과 똑같은 사람일 뿐이다. 단지 사는 환경이 다르고, 그 환경에서 제국인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남았을 뿐.
“왜 그렇게까지 합니까?”
“살기 위해서. 그러지 않으면 죽거든. 쓸모없는 놈에게 돌아갈 물과 고기는 없으니까.”
프레드릭은 턱 말문이 막혔다. 군터는 날카로운 눈으로 이제 막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초원을 살폈다.
*
“아이고. 일어나면 허리가 안 움직이는 거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번을 서고 교대까지 마친 군터와 프레드릭은 담벼락 안으로 들어와 벽에 기대어 앉았다.
다리도 다 펴지 못하고 접어야 할 만큼 협소한 공간은 하룻밤을 나기엔 좁아도 너무 좁았다. 하지만 그마저도 지금은 감지덕지였다. 기대고 앉자마자 며칠 동안 쌓인 피로가 몸을 덮쳤다. 프레드릭은 곧 고개를 떨어뜨리고 곯아떨어졌다. 군터 역시 창검을 옆에 비스듬하게 세우고 눈을 감았다.
“…….”
그렇게 얼마나 눈을 붙였을까.
“대장님! 전방에 신원미상의 무리가 접근 해오고 있습니다!”
군터는 다급한 고함소리에 번쩍 눈을 떴다. 단숨에 땅을 박차고 일어선 그는 검창을 움켜쥐고 담벼락 밖으로 뛰쳐나갔다. 번을 서며 봉화를 지키던 병사 중 하나가 달려오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봉화를 올립니까?!”
“입 다물고 침착해라!”
군터는 눈을 좁혀 뜨고 병사가 가리킨 방향을 보았다. 확실히 저 멀리서 일단의 무리가 초소 쪽으로 접근해 오고 있었다.
‘기습? 아냐.’
기습이라기에는 너무 대놓고 움직이고 있었다. 선두부터 후미까지 모두 전속력으로 말을 몰고 있는 것 같았다. 만약 기습이었다면 기척을 죽인 채 최대한 가까이까지 접근한 뒤 덮쳤을 터.
그렇다면 그냥 공격인가?
“으음.”
“적인가?!”
“젠장! 첫날부터 신고식 화려하게 하는구만!”
병사들이 하나둘 뛰쳐나왔다. 그 와중에도 눈을 비비는 놈, 어질어질한지 걸음이 꼬이는 놈 등 별별 추태를 다 보였다. 말하자면, 오합지졸의 티가 팍팍 났다. 하지만 그 꼴을 보고 한숨을 쉴 틈은 없었다.
“적입니까?”
‘애매하군.’
부하의 말에 답할 겨를도 없었다. 군터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기마를 보며 미간을 구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들이 조금 더 가까워져 그의 시야에 온전히 들어왔을 때, 군터는 단숨에 상황을 파악했다.
“쫓기고 있다.”
“옛?”
한 무리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분명 선두에서 말을 달리는 이들은, 그들로부터 조금 떨어진 이들에게서 도망치고 있었다.
“선두의 열댓 명은 여인과 아이들이다. 전사들이 그 뒤를 쫓고 있군.”
“그렇다면 어찌 할까요? 그래도 봉화를 피우긴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봉화를 피워라. 추적자들의 수도 스물이 안 되는 것 같으니 푸른색이면 족하다.”
“예!”
곧 봉화에서 푸른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러자 멀찍한 곳에서도 뒤따라 푸른 연기가 솟았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요새에서도 상황을 파악하고 지원 병력을 보낼 것이다. 이제 이쪽에서 할 일은 초소를 사수하며 버티는 것뿐이었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
군터는 곧바로 명령을 내리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일단 겉으로 보이는 모양새만 봐서는 도망자들과 추적자들이다. 그들이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면 그냥 모른 채 놔두면 되지만, 정확히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함정일 수도 있다.’
정말 쫓기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선두는 보내고 뒤쪽의 추적자들만 상대하면 된다.
하지만 함정이라면? 선두의 여인과 아이들이 그대로 스쳐지나간 뒤에 곧장 선회한다면 앞뒤에서 적을 맞게 된다.
어찌할 것인가? 그들은 이 순간에도 점점 가까워져 오고 있었고, 선택의 순간은 그보다 더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군터가 결단을 내렸다.
“앞 열은 그냥 보낸다! 뒤따라오는 적들을 상대한다! 전투 준비를 갖추고 내 신호에 맞춰 움직여라! 투창 준비!”
“투창 준비!”
원형 방패를 앞으로 내세우고 창을 준비했다. 다닥다닥 붙은 병사들은 몸을 낮추고 다가오는 적들을 기다렸다.
두두두!
희미한 잔향처럼 들리던 말발굽소리가 이제는 제법 큼직하게 들려왔다.
선두에서 말을 몰던 한 여인과 군터의 시선이 마주쳤다. 군터가 힘껏 외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뛰어넘어라!”
알아들었을까? 군터는 선두의 여인이 일행들에게 외치는 것을 보며 부하들에게도 명령을 내렸다.
“숙여!”
히히힝!
군터와 병사들이 몸을 숙였다. 십여 마리의 말들이 그 위를 뛰어 넘어갔다.
“일어나! 투창 대기!”
“투창 대기!”
병사들이 일제히 일어나 창을 쥔 손을 뒤로 뺐다. 추적자들은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당도해 있었다.
“투창!”
슝슝슝!
열 한 개의 창이 날아들었다. 그러자 뭉쳐 있던 추적자들이 일제히 흩어졌다. 명중한 것은 단 하나 뿐이었다. 그마저도 사람은 맞추지 못하고 말을 맞춘 것이었다.
“뭉쳐라! 창 들어!”
두두두!
거친 말발굽 소리가 가슴을 짓눌렀다. 병사들의 긴장이 그대로 전해져 뒤통수를 간질였다.
“방패!”
후드득!
마치 비 오는 소리 같았다. 방패를 두들기는 육중한 충격들. 군터는 방패로 화살을 막는 와중에도 적들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좌로 틀어! 거창 준비!”
“좌로 틀어! 거창 준비!”
세 갈래 네 갈래로 흩어졌던 적들이 어느새 한 덩어리가 되어 좌로 돌아오고 있었다. 군터의 호령에 병사들이 복명하며 방향을 틀었다. 한 달간의 고된 훈련이 그래도 헛되지 않아 대응은 그럴듯했다.
“온다! 거창 준비!”
“거창 준비!”
두두두!
말발굽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들려왔다. 서로 어깨를 맞대고 창을 든 병사들이 곧 있을 충돌을 기다리며 숨을 죽였다.
“거창!”
목청껏 고함을 지르며, 군터는 선두의 적을 향해 방패를 전방으로 힘껏 집어 던지며 창검을 고쳐 쥐었다. 그리고 전력을 다해 도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