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연 -->
군터는 십인대의 대원들을 직접 꾸리기로 했다.
백인장은 십인장들을 통솔하고 십인장들은 병사들을 통솔한다. 실전에 들어가면 병사들을 움직이는 것은 십인장들이었으므로, 백인장과 십인장들의 관계 이상으로 십인장과 병사들의 관계는 중요했다. 특히 군터는 십인장으로서 병사들과의 관계가 최악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어그러졌던 경험이 있었기에 병사들을 꾸릴 권한을 주겠다는 막시밀리언의 말에 크게 혹할 수밖에 없었다.
군터는 그날부터 그의 새로운 십인대를 꾸리기 위해 생각에 잠겼다.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첫 번째는 사는 거다, 산다는 표현이 너무 천박해 보일 수 있지만 사실 있는 그대로 표현하자면 그 이상 어울리는 것이 없다. 막시밀리언만 해도 그를 빼오기 위해 토프락에게 돈을 주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마지막 날 웃으며 그를 보내준 토프락의 얼굴이 설명되지 않는다. 자세한 액수까지는 모르지만 군터는 그 지저분한 포트락으로 하여금 자연스런 웃음을 짓게 만들 정도로 섭섭지 않은 금액을 받았으리라 짐작했다.
하여간 이처럼 병사들을 돈을 주고 사오는 거다. 당사자의 동의도 필요하겠고 해당 부대의 장들에게 성의 표시도 해야 하는 등의 애로사항이 있지만 그래도 현역병을 빼온다는 점에서 고려해볼 법 하다.
그리고 두 번째는 병사가 아닌 이들을 징발하거나 모집하는 것이다. 막시밀리언은 이 방법으로 병사들을 채우고 있었다. 민간인, 용병, 그 밖에 모든 이들이 이런 방법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막시밀리언의 가문은 돈이 많으니 대우도 섭섭지 않게 해줄 수 있어 그럭저럭 실력 있는 자들이 모이고 있었다. 전력만 놓고 본다면 이 방법이야말로 쓸 만한 부대를 만들기 위한 최고의 방법이다.
하지만 군터는 그 방법은 원치 않았다. 돈으로 산 자는 오래 쓸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돈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면 더욱 꺼림칙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디서, 어떻게 사람을 구해야 하는가.
고심하던 군터는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그가 향한 곳은 외성의 지하 감옥이었다. 사전에 막시밀리언이 이야기를 해두었던 터라 옥졸들은 금방 문을 열어주었다. 심지어 한 명이 장부를 가지고 옆에 따라붙으며 군터에게 이것저것을 알려주기까지 했다. 주로 군터가 옥에 갇힌 죄인을 가리키면 그의 이름과 나이, 죄명 등을 말해주는 식이었다.
“저 녀석은?”
“바렉. 32살. 죄명은 강도. 폭행. 살인입니다.”
“살인?”
“강도질을 하다가 저항하는 피해자를 살…….”
바로 넘겼다. 눈빛이 살아있다 싶어서 뭐하는 놈인가 했는데 저 또렷하게 뜬 눈을 후벼 파버려야 할 놈이 아닌가.
“저 놈은?”
“에…프레드릭. 27세. 죄명은 강도…그리고 폭행이군요.”
이번에는 그래도 좀 낫다. 강도와 폭행뿐이라면 이전 놈과는 달리 한 번 사연을 들어볼 가치가 있다.
군터는 창살 쪽으로 걸어갔다.
“왜 그랬나?”
프레드릭이라는 이름의 죄수가 고개를 들었다. 흐릿한 눈이 몇 번 껌뻑였다.
“그런 건 왜 묻지? 당신 누구야?”
“널 여기서 꺼내줄 수도 있는 사람. 다시 묻지. 강도와 폭행? 왜 그랬지?”
“시간이 부족했던 바람에 마무리를 짓지 못했지. 죽였어야 했는데 말이야.”
“반성의 기미가 없군.”
“그 개새끼가 먼저 우리 가족을 거덜냈으니까. 난 우리 가족이 빼앗긴 걸 되찾으려 한 것뿐이야.”
군터가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더 가까이 고개를 들이밀고 프레드릭과 눈을 마주쳤다. 형형한 눈빛이 칼날처럼 내리꽂혔다.
“거짓부렁은 질색이다.”
“말을 해도 못 처 알아듣는 귀머거리도 질색인데.”
프레드릭은 강렬한 눈빛을 받아 눈매를 파르르 떨면서도 끝끝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잠시 동안 그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군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곧 초원으로 간다. 내 밑에서 3 년간 병사로 복무하겠다면 여기서 빼주마.”
“…….”
“지금 바로 말해라. 할지, 말지.”
“하겠소! 젠장!”
“일단 이 녀석 한 명.”
“저…그게.”
옥졸이 말끝을 흐렸다. 얼굴에는 난처한 기색이 가득했다.
“뭐지?”
“그…이 녀석은 좀. 다른 녀석으로 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미 다 이야기가 되어 있던 걸로 아는데?”
“으음. 그렇기는 합니다만…….”
딱 봐도 뭔가 깊은 사정이 있어 보였다. 그것도 남에게 알리기에는 다소 추잡스러운 사정말이다. 하지만 이쪽이 그런 것까지 신경써줘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럼 문제없지 않나. 이 녀석을 데려가겠다.”
“…알겠습니다.”
그 뒤로 군터는 9명을 더 골랐다. 체격이 좋고 눈이 살아있는 이들. 죄를 지음에 나름의 사연이 있는 이들이었다. 물론 그 사연이라는 것이 본인들 입으로 말한 것이기에 모두 믿을 수는 없겠으나, 군터는 자신의 감을 믿었다. 그리고 그들 중 몇이 자신을 기만한 것이라 해도 상관은 없었다. 쓰레기라면 언제가 되었든 진면목을 드러낼 것이고, 그러면 그때 처리하면 그만이니까 말이다.
“말한 대로, 너희를 옥에서 빼내주었다.”
열 명의 사내들이 느슨하게 서서 그의 말을 들었다. 각기 다른 얼굴에는 똑같은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긴장감.
이제 막 감옥에서 나온, 조금 전까지 죄수였던 이들의 앞에서 군터는 살벌한 기세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향할 때마다 거칠다 할 수 있는 사내들이 몸을 떨거나 고개를 숙였다.
“이제부터 너희는 죄수가 아니다. 군인이다. 군인은 상관의 명령을 따른다. 즉, 지금 이 순간부터 너희는 내 명령을 따른다. 그에 대해 불만이 있는 놈은 지금 말해라. 지금 말한다면 멀쩡하게 감옥으로 돌려보내주겠다.”
“…….”
“좋아. 그럼 불만 없는 것으로 알겠다. 이 이후 명령에 따르지 않거나 다른 소리를 하는 놈은 즉각 목을 베겠다. 알겠나?”
무거운 적막이 흘렀다. 군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대답 안 하나.”
“옛!”
바짝 날 선 대답이 일제히 터져 나왔다.
*
“정말 괜찮겠나?”
“문제없습니다. 믿어주십시오.”
“그래. 내 자네를 믿지.”
군복을 입은 어제까지의 죄수들을 보고 막시밀리언은 딱 한 마디를 했다. 그리고 자신감을 보이는 군터에게 믿는다 말하며 넘어갔다. 하지만 코르넬은 그렇지 않았다.
“저 어중이떠중이들이 문제를 일으킨다면, 그 책임은 네가 져야 할 거다.”
“당연한 말을 하는군. 남의 부대 일에는 신경 끄고 그쪽 앞가림이나 잘 하지.”
“뭐라?”
코르넬의 냉철하던 얼굴에 금이 가고 노기가 서렸다.
군터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부하들을 다잡을 때보다 더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이거 하나는 확실히 하고 가지. 당신은 내 상관이 아니야. 당신이 멋대로 입을 놀리는 게 당신 자유인 것처럼, 그 혓바닥을 뽑아버리는 것은 내 자유란 소리지. 칼부림을 하고 싶다면 말해. 언제든지 받아줄 테니.”
“이 무뢰한 같은 놈이……!”
코르넬은 잡아먹을 듯이 이를 박박 갈면서도 거기서 더 나가지는 않았다. 그는 몇 번이고 뽑을 듯이 움찔댔지만 끝내 검을 뽑지는 않았다.
‘어울리지 않게 인내심은 또 강하군.’
군터는 알 수 있었다. 코르넬이 이를 박박 갈면서도 끝내 돌아선 것은 자신과 싸우는 것을 꺼려해서가 아니다. 그가 꺼려하는 것은 그가 모시는 막시밀리언이다. 그는 전날 상관에게 주었던 실망감을 잊지 않고 있음에 분명했다. 만약 그가 자신에게 검을 뽑는다면, 그것은 막시밀리언의 허락이 떨어진 후일 것이다.
‘싱겁군.’
사실 이럴 것이라고 예상은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쉬웠다. 내심 군터는 저 짜증나는 사내와 결판을 내고 싶었다. 대가 세 보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한 번 꾹 눌러주면 지금처럼은 입을 못 놀려댈 테니까 말이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군터는 본격적으로 새로운 부하들의 훈련을 시작했다.
아직 초원으로 떠나기까지는 시간이 남아있었다. 그 동안 이 오합지졸들을 최대한 군인답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옆 사람과 어깨를 붙이란 말이다! 틈이 벌어지면 죽는다고 생각해라!”
“발이 느리면 죽는다! 멈추면 죽는단 말이다 이 멍청한 놈들아!”
“그렇게 해서 닭 한 마리나 제대로 잡겠나!”
군터는 부하들을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굴렸다. 모두 체격 좋은 건장한 사내들이라고는 하지만 군사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는 이들이니만큼 완전히 기초부터 다져야 했다. 기본적인 무술과 진형에 관한 것들까지.
또한 그는 막시밀리언 백인대에게 할당된 군영지에서 병사들을 훈련시키며 그들과 매일 함께 생활했다. 전에 로크에게 들었던 충고를 몸에 새긴 그였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그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병사들의 훈련은 혹독하게 했다. 병사들의 입에서 기합 대신 비명이 나올 정도로 다그치기도 했다. 대신 군터는 그렇게 병사들을 훈련시키면서 본인은 그 이상으로 고된 훈련을 자처했다.
그러다 보니 그의 가혹한 훈련에 혀를 빼문 병사들은 자신들보다 더 힘든 훈련을 하는 군터를 보며 감히 불만을 품지 못했다.
“인간이 아니잖아.”
“아쿼러즈라서 그런가?”
“바보자식. 아쿼러즈도 똑같은 인간이야. 땀도 흘리고 피도 흘려. 저건 그냥 저 인간이 이상한 거라고.”
죄수였다가 갑작스레 군인이 된 데에서 오는 불안과 혼란, 거기에 상관이 된 자가 아쿼러즈라는 것까지. 어느 하나 평범한 것이 없는 상황에 힘겨워하던 그들은 점차 맞닥뜨린 현실에 익숙해져 갔다. 그저 두렵기만 하던 아쿼러즈 상관도 같은 막사에서 자고, 같은 식사를 하는 날들이 계속 이어지면서 썩 괜찮은 자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보름 넘는 날이 흘러갔다.
마침내 신생 막시밀리언 백인대는 살마드를 떠나 초원으로 향하는 길에 올랐다.
“오테론까지 가는 스무날 동안 별 일 없었으면 좋겠군.”
목적지는 오테론. 막시밀리언 백인대의 상위 부대인 자이론 천인대를 비롯, 네 개의 천인대가 주둔하고 있는 지역이었다.
“한 번쯤 일이 생기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응?”
막시밀리언은 말을 타고 선두에서 가고 있었다. 그 뒤를 코르넬 십인대가 곧장 따랐다.
“급조한 백인대입니다. 손발이 안 맞는 것은 물론이고, 십인대별로도 남처럼 어색하지요. 서로 익숙해지고 한 대 묶이기 위해서는 실전이 필요합니다. 물론 초원으로 가면 어련히 겪게 되겠지만…그때 가서 겪는다면 피해를 크게 입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도 그렇군. 가려 뽑는다고는 했지만 백인대로서는 오합지졸이라는 건가.”
자칫 불쾌할 수도 있는 이야기였으나 막시밀리언은 선선히 인정했다. 코르넬의 말마따나, 아무런 실전경험 없는 급조된 백인대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별 일 있기를 바라야겠군. 하하.”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오테론으로 향하는 스무날 동안 그들이 이야기한 별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것이 갈색초원…….”
누군가 한 명이 탄성을 내질렀다. 다른 이들 역시 소리만 내지 않았을 뿐, 저마다 입을 벌리거나 눈을 크게 뜨고 시선을 떼지 못한다거나 하는 각자만의 방식으로 지금 그들의 앞에 펼쳐진 광활함에 감탄을 표시하고 있었다.
눈에 비치는 거의 모든 것이 갈색이었다. 하늘에 떠오른 태양의 빛을 받고 있는 초원은 금빛 물결이 일렁이는 것처럼 보였다.
“…….”
군터 역시, 움직임 없이 서서 그 물결을 눈에 담고 있었다.
다만 그는 다른 이들처럼 경이와 감탄에 차 있지는 않았다. 그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다소 복잡했다. 그리움, 반가움, 그리고 다른 감정들이 뒤섞여 묘한 기분이었다.
‘어쨌든 돌아왔군.’
십 수 년 만에 다시 찾은 고향 앞에 섰다.
순간 황금빛 물결이 크게 역동했다. 세찬 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쳤다. 살마드에서 불어오는 바람과는 그 세기를 달리하는, 시원하다는 표현보다는 날카롭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바람이.
이 드넓은 초원이 자신에게 인사하는 것 같다 느꼈다.
고향에 다시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