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연 -->
다음날.
군터가 평소보다 조금은 늦게 일어나 아침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삐걱 거리는 소리가 나며 여관의 문이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두 명의 사내였다. 한 명은 전날 저녁에 보았던 날카로운 눈매의 사내였고, 또 한 명은 스물 중반에서 후반 정도 되었을까 싶은 젊은 사내였다.
보통의 키와 체구. 잘 먹고 자란 것인지 혈색이 좋은 그의 얼굴에서는 가진 자 특유의 여유로움이 묻어났다.
“반갑군 군터 십인장. 자이론 천인대 소속 백인대장 막시밀리언이네.”
군터는 그의 이름을 다 듣기 전, 백인장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벌떡 일어나 정자세로 섰다.
“됐네. 부담스럽군. 편하게 있게나.”
한순간에 석상처럼 변한 그에게 막시밀리언이 가볍게 손짓했다. 그제야 군터는 편히 자세를 풀었다.
“백부장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사칭이라는 의심은 하지 않았다. 아직은 이르다는 생각이 드는, 목을 감싸고 허리춤 아래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모피에 가렸던 가슴팍의 계급장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불러도 오지 않으니 내가 와야지. 어쩔 수 있나?”
“백부장께서 부르시는 줄 알았더라면 제가 찾아갔을 겁니다.”
“흠. 코르넬이 제대로 이야기를 안 했던 모양이군.”
“송구합니다.”
날카로운 눈매의 사내, 코르넬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됐네. 뭐, 잘 됐어. 사실 용건이 있는 쪽이 움직이는 것이 맞지. 직접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더 그림이 좋기도 하고. 군터 십인장. 불편하게 있지 말고 편히 앉게나.”
“예.”
넓지 않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군터와 막시밀리안이 마주 앉았다. 군터는 다소 굳은 자세로 이 젊은 백인대장을 보았다.
‘많아봐야 서른이 안 되겠군.’
이 정도면 젊은 것을 넘어 어린 수준이다. 통상적으로 백인대장이라고 하는 이들이 적어도 30대 중후반에서 많으면 40대 중후반까지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 막시밀리언이라는 백인대장이 얼마나 어린 것인지 알 수 있다. 이런 경우는 정말 운이 좋고 실력이 좋아 대공(大功)을 세운 것이 아니라면 딱 하나의 경우밖에 없다. 집안이 좋은 거다. 권력이 있든, 돈이 있든 둘 중에 하나가 있어서 샛길로 백인대장이 되는 경우다. 그 외에는 없다.
‘귀하신 도련님이 내게 무슨 용무지.’
다소 심사가 불편했다. 말단 병사 때부터 시작해서 이제껏 직접 벤 목만 수십이 넘는 그로서는 손에 피 한 방울도 안 묻혔을 확률이 열에 아홉일 터인 샌님 백인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깔보는 마음 때문이기도 했지만, 실은 얄팍한 시기심 때문이었다.
십인대장과 백인대장은 단순히 직급만 놓고 본다면 한 계단 내지 두 계단 차이일 뿐이다. 하지만 실상 두 직급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십인장이라고 해봐야 결국에는 졸에 가까운 반면 백인대장은 하급이라 하더라도 엄연한 장교이니까 말이다.
“근자에 자네의 소문을 들었네. 강직한 십인장에 대한 이야기. 호기심이 들더군. 그래서 자네에 대해 좀 알아봤지. 어린 나이에 맨몸으로 군문에 든 아쿼러즈 청년의 이야기. 아! 오해는 말게.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하지. 맹세컨대 불순한 의도는 없었네. 정말 단순한 호기심이었어. 아무튼.”
잠시 목이 말랐는지 그가 잠시 말을 멈추고 탁자 위의 물을 마셨다. 눈치 빠른 주인장이 미리 떠 놓은 물 한 잔이었다.
“자네에 대해 좀 알아보다 보니까 말이야. 어느 정도 확신이 들더군.”
“어떤 확신 말씀이십니까.”
“조만간 나와 내 부대는 초원으로 떠난다네. 물론 놀러가는 건 아니야. 전선으로 떠나는 거지.”“…….”
“그러나 자네도 알겠지만 초원은 만만치 않아. 그렇기 때문에 난 자네와 같은 부하가 필요해. 용감하고 실력 있는 군인 말이야. 젊다는 것도 좋아. 나보다 나이가 많은 부하들은 가끔씩 다루기 어려울 때가 있거든.”
그러면서 그의 시선이 슬쩍 옆으로 돌아갔다. 코르넬이 고개를 푹 숙였다. 일말의 반감 없이 그의 표정에서 드러나는 감정은 부끄러움 하나였다.
“코르넬은 우리 집안의 사람이네. 어렸을 적 내 무술 스승이기도 했고. 고맙게도 나를 따라 군문에 들어와 주기까지 했지.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그만큼 아끼는 사람이네만 사람이 다소 고집이 있어서 가끔씩 이렇게 나를 곤란하게 만들기도 해. 그래도 꼬인 사람은 아니니 혹여 어젯밤 그가 결례를 범했다면 이해해주기 바라네.”
“아닙니다.”
“난 백인대장의 직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네. 공석이 된 자리로 들어왔지.”
“공석이라면?”
“전에 있던 백인대가 전멸을 당했어. 대장부터 병사 하나까지 전부 다.”
“…….”
“자네도 알겠지만 백인대 정도의 규모가 전멸 당하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라네. 바꿔 말하면 지금의 초원이 그토록 위험하다는 이야기지.”
“그렇습니까.”
“그래. 하지만 기회라는 녀석은 위험 속에 숨어있는 경우가 많아.”
그제까지 남 이야기를 건너 듣는 듯 덤덤하던 군터의 표정에 변화가 일었다. 막시밀리언은 그런 군터를 물끄러미 보았다. 속을 파헤치는 듯 깊은 눈에 군터는 내심 긴장을 삼켰다.
“당사자를 앞에 두고 이런 말을 하기는 좀 뭐하지만, 이 바크렌에서 아쿼러즈들에 대한 취급은 썩 좋지 않지. 무슨 일을 해도 선입견을 갖고 보는 건 기본이고, 그저 길만 걷고 있어도 노려보는 눈초리가 따라붙기 일쑤라더군. 그저 농사를 짓거나 말을 기르며 사는 이들도 그런 취급을 받는데, 군문이라면 말할 것도 없겠지?”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도 자네가 굳이 군인으로 남은 이유, 나는 잘 알 것 같군. 어떤가 군터. 우리 솔직해지세. 출세하고 싶지 않은가?”
“…….”
“나는 자네에게 길을 열어줄 수 있네. 비록 그 길이라는 것이 뻥 뚫리고 꽃이 깔린 대로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지금 자네에게 있어서는 좋은 선택지가 될 거라고 확신한다네.”
담담하던 군터의 눈빛이 작게 흔들렸다. 줄곧 그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막시밀리언은 그 흔들림을 놓치지 않았다.
“초원에서 돌아왔을 때, 난 더 높은 자리에 않게 될 걸세. 그리고 자네는 지금의 내 자리에 올라 있겠지.”
“…….”
“어떤가?”
굳게 다물려 있던 군터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
군터는 로크를 불러 일전에 술을 기울였던 그 주점에서 만났다.
“이게 뭔 일이야? 군터 대장님께서 먼저 술 얘기를 다 하시고.”
로크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흰소리는 그만하고 앉아.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엉?”
군터는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막시밀리언이라는 백인대장이 찾아와 건넸던 모든 이야기들을.
장난스러웠던 로크의 표정이 삽시간에 진지해졌다. 그는 한동안 생각에 잠긴 채 조용히 있었다.
“막시밀리언이라…그래. 분명히 들어본 적 있어. 이번에 백인대장이 됐다는 양반이지. 듣기로는 상인의 아들이었던가.”
“상인의 아들?”
“그래. 잘은 모르겠지만 얼핏 듣자하니 상당한 거부라던데. 하긴 뭐, 그러지 않고서야 자기 아들을 냅다 백인장 자리에 앉힐 수는 없었을 테지.”
“그런 건 됐고, 본인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특별한 건 없었던 것 같은데. 말했다시피 군인이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인간이고 하니까. 뭔 소문이 돌기에는 이르지. 우리 대장님께서 재수 없다고 몇 번 씹어대는 소리는 들었다만.”
“쯧!”
깔끔하게 허탕이다. 그래도 내심 자잘한 것이라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너무 큰 기대였던 모양이다.
“설마 가려는 건 아니지?”
설마 하는 표정이다. 아니길 바라면서도 혹시나 하는 표정.
“안 될 것 없잖아.”
“장난하는 거 아니다. 요즘 초원 쪽에서 들리는 소문이 흉흉해. 추수기가 아닌데도 약탈자들이 들끓는다더라.”
“기회라는 녀석은 위험 속에 숨어있다더군.”
“멋진 개소리네. 누가 한 말이야?”
퉁명스런 답에 군터는 피식 웃었다. 참 한결같은 녀석이다. 사람 사귀는 것 좋아하고 남 부탁 잘 거절 못하는 호인이지만 그러면서도 이럴 때는 은근히 보신주의자 기질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 모습이야말로 로크의 본모습이다. 그렇다고 그를 겁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겁쟁이는 해야 할 때조차 하지 않는 이들이다. 로크는 해야 할 때는 한다. 다만 하지 않아도 될 때는 하지 않을 뿐이다. 그 둘의 차이는 매우 크다.
“아무튼 난 갈 거다.”
“야 자식아.”
“말려도 소용없다는 거 알지?”
로크가 입을 다물었다.
왜 모르겠는가. 한 번 마음을 정한 군터는 그 누가 뭐라 해도 고집을 꺾지 않는다. 줄곧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처음 군인이 되었을 때부터, 언젠가 내 깃발을 갖고야 말겠다고 마음먹었었지. 어차피 여기서 뭉그적거리면서 가끔씩 잡스런 도적놈들이나 상대해봐야 남는 건 아무것도 없어. 게다가 토프락은 이제 날 눈엣가시처럼 여길 텐데, 지금까지보다 더 고단하기만 하겠지.”
“그걸 알면서도 그렇게 조져놨냐?”
“그 이야기는 됐어. 그 일에 대해서는 후회 안 한다.”
로크가 쏘아붙였던 그날의 이야기는 적어도 그날 하루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했다. 확실히 자신에게도 일정부분 잘못이 있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한들 어쩔 것인가. 자신도, 그들도 지은 죄에 대한 벌을 받았다. 단지 그뿐이다.
찝찝한 주제는 거기서 끝났다. 로크는 초원에서 들려오는 여러 흉흉한 소문들에 대해 계속 이야기했다. 어떻게든 친구의 마음을 바꾸려는 노력이었다.
하지만 설득도 듣는 쪽이 듣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맛이 나는 법이다. 군터가 계속 들은 채 만 채 하며 안주와 술에만 신경을 쏟자 로크도 포기하고 길게 한숨 쉬었다.
“내가 뭐라고 한다고 마음 바꿀 놈이 아닌 거 알아. 그래도 잘 생각해봐. 장난이 아니라고. 이건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일이야. 그 젊은 백인장에 대해서도 잘 알아보고. 나도 한 번 자세히 알아볼게.”
“그래. 고맙다.”
“그래. 뭐 그건 그렇고. 그…뭐냐. 소속 부대가 달라지는 거잖아. 전입이라고 하던가, 이런 걸? 그건 어떻게 되는 건데?”
“뭐 그거야 꼬드긴 인간이 알아서 해주겠지.”
“그 백인장?”
“어.”
“에휴. 그럼 이건 송별주냐?”
“네가 사려고?”
“송별회는 다음에 한 번 더 하자. 더 싼 데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둘은 웃었다.
*
이틀 후. 막시밀리언은 다시 찾아왔다.
“어떤가. 결정했나?”
“예. 따르지요.”
막시밀리언이 환히 웃었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와 군터의 손을 쥐었다.
“잘 생각했네. 약속하지. 내 자네와 고락을 함께 하겠네.”
단순히 입에 발린 말 같지는 않았다. 그의 행동. 표정이나 눈빛은 진실로 기뻐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기분이 좋았다. 누군가에게 인정받는다는 것, 그것도 자신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이에게 인정받는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그럼 언제 출발하는 겁니까?”
“아직 시일은 여유가 있네. 그 전 백인대가 전멸해버리는 바람에 인원을 처음부터 보충해야 하니까. 물론 단순히 머릿수만 채우는 거라면 하루 이틀에 끝낼 수 있을 테지만 난 그러고 싶지 않거든. 난 단 백 명일지라도 정예로 꾸리고 싶네.”
좋은 생각이다. 십인장으로 있으면서 부하들에 대한 불만을 나날이 느껴왔던 군터로서는 바라마지 않는 일이었다.
“군터 자네는 어떻게 하고 싶은가? 원하는 대로 하게. 자네가 직접 십인대를 꾸리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괜찮아. 필요한 것이 있으면 내 도와주지.”
“그래도 되겠습니까?”
“물론. 내 백인대의 병사들이기도 하지만 자네의 지시를 받을 자네의 부하들이기도 하지. 자네 손으로 직접 벌했던 녀석들처럼 손발이 안 맞으면 곤란하지 않겠나.”
“…….”
“말했듯 시일은 넉넉히 있으니 한 번 생각해보게. 그리고 내가 머무는 곳을 알려주지. 생각이 서면 찾아오게나.”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