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연 -->
곡괭이가 힘차게 땅을 찍었다. 딱딱한 땅이 물에 젖은 빵처럼 푹푹 파이며 흙이 튀었다. 군터는 능숙하게 땅을 갈았다. 솔직히 말하면 그다지 기술적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투박했다. 그는 그저 우악스럽게 힘으로 일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군터는 다른 어떤 병사들보다 빠르게 일을 해나갔다. 남들이 한 번 찍고 쉴 때 그는 쉬지 않고 두 번, 세 번을 더 움직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이곳저곳을 기웃대던 로스버가 그를 보고 감탄했다.
“대단하군. 지치지도 않나?”
“그다지.”
군터는 곡괭이를 놓고 그늘에 앉았다. 할당된 구역은 다 갈아엎었으니 이제부터는 쉬던 자들이 일을 할 차례다.
“여유롭군.”
부지런히 움직여서 일을 마치고 쉬는 그와 달리, 로스버는 항시 여유로웠다. 그가 하는 일이라곤 설렁설렁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자기가 쉬고 싶을 때 엉덩이를 붙여 앉고, 걷고 싶을 때 걸었다. 그 뿐만 아니라 소렌 백인대의 모든 십인장들이 그러했다. 심지어 그 밑에서 일을 하는 병사들조차도 다른 백인대의 병사들에 비하면 일의 강도가 훨씬 덜했다. 다른 백인대 병사들이 10의 일을 한다면 소렌 백인대의 병사들은 고작해야 3, 4를 하는 정도였다.
군터가 그에 대해 묻자 로스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그거야 당연하지. 저 녀석들은 이곳에 일 하러 온 거지만 우리는…음, 뭐랄까. 일도 일이지만, 어쨌거나 쉬러 온 거거든.”
“쉬러 와?”
“그래. 우리 소렌 백인대는 바자마 천인대 소속이고, 바자마 천인대는 디클라이 장군의 지휘를 받지.”
그제야 군터는 소렌 백인대의 태만함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로스버가 언급한 디클라이 장군은 바크렌의 군부를 이끄는 두 명의 장군 중 한 사람으로, 갈색 초원의 접경지대의 주둔군을 총지휘 하고 있었다. 즉, 소렌 백인대는 도적 같은 잡스러운 놈들이 아니라 갈색초원의, 혹은 그 너머의 위험한 적들과 부딪치는 최정예 부대라는 것.
그들은 열심히 일하지 않았다. 조금 일하고 많이 쉬었다. 다른 백인대의 병사들은 그런 그들을 그저 부러운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심지어 둔전지의 상황을 감독하는 관리들마저 소렌 백인대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다시피 했다. 그들이 뭘 하건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거다. 로스버의 말대로 이곳에서의 일은 그들에게 있어 일이 아닌 휴식이었다. 몸과 마음에 잔뜩 밴 피 냄새를 덜어내기 위한.
‘들개들이라.’
들개.
국경지대. 더 정확히 말하면 갈색초원과 닿은 외각지대에서 복무하는 군인들을 이르는 말이다. 누가 그 별명을 지었는지는 모르지만, 참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냄새.
눅눅하고 비릿한 냄새가 난다. 뭘까 생각했었는데, 들개들의 누린내였던가.
“어디서 근무했지?”
로스버가 대답 대신 슬쩍 웃었다. 말하면 네가 알겠냐는 듯이.
“모코즈.”
“시원한 데서 있었군. 천둥수리 봉우리는 가봤나?”
로스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떻게 알지?”
“어렸을 때 몇 번 가 봤으니까.”
“어렸을 때라고? 아!”
“초원에서 태어나고 자랐지.”
“그래. 맞아. 아쿼러즈니까. 그래서 모코즈에 대해 알고 있었군. 그 부근에서 살았었나 보지?”
“근처는 아니고, 몇 번 가보긴 했지. 초원인들에게 정해진 거주지 따위는 없으니까.”
그저 풀이 자라는 시기에, 자라는 곳을 찾아 떠날 뿐이다. 한 자리에서는 결코 열흘 이상 머물지 않으며 정처 없이 떠도는 삶. 그것이 초원인들의 삶이다. 한평생을 그렇게 살다가 죽는다. 만약 그의 부족에 찾아온 비극적인 최후가 아니었더라면 군터 역시 그의 선조들이 살았던 삶을 그대로 이어받았을 것이다.
“그렇군.”
로스버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런데 그 얘기, 다른 녀석들에게는 하지 말게. 특히 저 녀석하고 저 녀석. 모코즈에 있으면서 부하들 여럿을 보냈거든.”
아쿼러즈는 제국에서 초원인을 부르는 명칭임과 동시에 전향자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같은 의미라기보다는 분간이 없다고 하는 것이 옳다. 제국인이 된 아쿼러즈는 그저 제국인임에도 아쿼러즈라 불린다. 아쿼러즈라는 명칭 자체가 멸칭인 셈이다. 그러나 다들 그렇게 부르며, 불리는 이들도 불쾌해하지만 삭인다. 아무리 제국인이 되었다한들, 결국 그들은 이방인에 불과하기에.
“이해한다.”
하지만 이들, 들개들의 증오는 이해해줄만 하다. 이들은 초원과 맞닿은 곳에서 초원인들과 창칼을 부딪치는 이들이 아닌가. 로스버도 말하지 않았나, 저기 십인장들이 부하들 여럿을 보냈다고.
“떠벌리고 다닐 생각은 없다. 하지만 꼬랑지 내리고 슬슬 피해 다닐 생각도 없어. 내가 저치들 부하를 죽인 것도 아니잖나.”
“뭐, 그건 그렇지만. 거 참, 자네도 어지간히 대가 세군. 으스대려는 건 아닌데, 다른 녀석들은 우리 눈치를 설설 보거든.”
실제로 다른 백인대들은 소렌 백인대 근처로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특별히 누군가 그러라고 명령한 것도 아니었고, 특별히 소렌 백인대가 날을 세우고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본능적으로 느낀 거다. 소렌 백인대가 자신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풀을 뜯는 짐승은 고기를 뜯는 짐승 곁에 다가가지 않는다. 으르렁대고 있지 않더라도, 살기등등하게 노려보고 있지 않더라도 몸에서 풍기는 위협적인 체취만으로도 그들을 두렵게 하고 경계하게 한다.
“눈치 볼 이유가 없으니까.”
하지만 군터는 그들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 두렵기는커녕 오히려 친숙하게 느껴졌다. 또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뭐라도 되는 것처럼 으스대는 그들이 가소롭고 우습게도 보였다.
“그것보다…이야기나 좀 해보지.”
“음? 무슨 이야기?”
“모코즈에서의 이야기. 간만에 고향의 이야기가 듣고 싶군.”
“어이, 어이. 너 내가 무슨 재담꾼이라도 되는 것 같나? 그리고 모코즈 출신도 아니라며?”
“초원이 내 고향이다. 아무튼 부탁하지. 정중하게.”
“허! 거 참.”
로스버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러나 그는 곧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실은 그도 심심했던 것이다. 부하들 일하는 걸 둘러보거나 산보를 하는 것도 한 두 번이고, 동료 십인장들과 수다 떠는 것도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그보다는 차라리 이 흥미로운 젊은이에게 무용담이나 늘어놓는 것이 더 낫다고 여겼다.
“자네도 알겠지만, 초원의 바람은 아주 지랄 맞지. 툭하면 깃대가 부러지고, 순찰을 나가거나 초소에서 근무할 때는 칼바람에 눈이 파이고 뼈가 삭는 느낌이 들어.”
그래서 그는 몇 번 헛기침을 내뱉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거의 대부분이 소렌 백인대와 로스버 십인대, 그리고 십인장 로스버의 무용담이었다. 무슨 약탈자 무리와 교전했다느니, 초소에서 근무하다가 얼굴이 얼어서 입을 열 수가 없었다느니 하는 것들.
그런 쓸 데 없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지만 군터는 묵묵히 들었다. 그의 자랑 속, 으스댐 속에 비치는 초원의 모습을 그렸다.
고향을 그리워한 적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이야기를 접하니 그래도 고향은 고향인 것인지 사뭇 아련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는 정말 죽는 줄 알았지. 여기 보라고. 그때 베인 상처야. 전투가 한창일 때는 신경도 못 쓰고 싸웠는데, 나중에 끝나고 보니까 뼈가 다 보이더라고.”
소매를 걷고 팔뚝의 큼직한 흉터를 내보이는 로스버.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돌린 군터는 흉터의 모양을 보고 눈을 빛냈다.
“월도(月刀)에 긁혔군.”
“역시 아는군. 맞아. 그렇게 부른다고 했어.”
월도라는 것은 초원민족이 사용하는 칼의 한 종류다. 날이 완만하게 휘어 있으며, 그 모양이 막 차기 시작하는 달과 비슷하다하여 그리 이름이 붙었다.
“모코즈에서 복무했다고 하지 않았나?”
“응? 맞아. 몇 번이고 말했지 않나.”
“흠.”
월도가 초원민족이 사용하는 무기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초원의 모두가 월도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반적인 칼이나 창에 비하면 월도를 쓰는 이들은 특정한 부족의 몇몇 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특정한 몇몇 부족의 영역은 모두 모코즈와는 제법 거리가 있었다. 물론 그가 초원의 모든 부족에 대해 아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크게 이상하게 여길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월도의 상흔에 특별히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러지?”
군터는 답 대신 옷을 걷어 올렸다. 로스버처럼 소매를 걷는 것이 아니라 상의를 들추어 벗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하면서도 기죽게 하는 우람한 근육질의 몸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채 아물지 않은 상처들이 수두룩한 가운데, 그는 옆구리에서 등을 타고 올라가는 기다란 흉터를 가리켰다.
로스버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건…….”
“비슷하지 않나?”
예리한 발톱으로 그은 것 같은 흉터. 그것은 로스버의 팔뚝에 남은 것과 똑 닮아 있었다.
“그 정도 상처면 거의 죽다 살았겠는데?”
“죽다 살았지. 뭐 그건 그렇고, 그때 싸웠다는 그놈들 말인데…혹시 허리에 털 달린 가죽 허리띠를 차고 있지 않던가?”
“글쎄…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사실 그때는 너무 상황이 급박해서 말이야. 교전을 한 후에 제대로 수습도 못하고 성으로 돌아갔었거든. 게다가 그것도 벌써 5년 전 이야기라고. 그놈들 허리에 뭐가 달려 있었는지까지 기억하기는 힘들어.”
“그런가.”
그럴 만도 하다. 강렬한 경험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내 목 앞까지 치고 들어왔던 시퍼런 칼날이지 그 밑 허리춤에 뭐가 달렸는지에 대한 것은 아닐 테니까. 당장 눈앞에 칼이 왔다 갔다 하는데 허리춤까지 살필 여유가 있었겠는가.
“왜? 자네 몸에 칼자국 낸 놈들하고 같은 놈들인 것 같은가?”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겠지.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뭐…하여튼 우연이군 그래. 하핫.”
비슷한 상처로 생긴 동질감 때문일까. 둘의 대화는 전보다 더 부드러워졌고, 대화의 내용도 더 사소한 것까지 이어졌다.
“난 곧 전역할 생각이야.”
“아직 그럴 나이는 아니지 않나?”
“그렇긴 한데, 몸이 좀 상했는지 예전 한창 좋았던 때처럼 움직이지가 않아. 무거운 몸으로 버티다가 목이라도 날아가면 손해 아닌가. 그만두려면 사지 멀쩡할 때 그만 둬야지.”
“그렇군.”
그만둬야 할 때를 알고 그만둘 수 있는 이는 극히 소수다. 그런 의미에서 로스버는 현명하다 할 수 있다. 10년 정도 복무했다고 했으니 전역할 때 돈도 꽤 나올 테고, 그 정도면 얼마 정도의 농지를 사 농사지으면서 살기에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피 냄새는 이제 질려. 그리고 무엇보다 장가도 좀 가야지. 애도 낳고.”
“……”
“근사한 삶 아닌가?”
“그래. 근사하군.”
숱하게 피를 봤을 터인 사내의 눈이 아이의 그것처럼 반짝인다. 그와 같은 십인장인데도 로스버는 모든 것을 가진 듯 행복해보였다. 군터는 그런 그가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
군터는 둔전지에서 이틀을 머무르며 일했다. 그리고 귀성하는 병사들에 섞여 살마드로 돌아왔다.
그리고 어스름한 그날 저녁. 숙소로 돌아간 군터는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낯선 인물과 조우했다.
“군터 십인장?”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적인 사내였다. 굳이 허리춤에 찬 검을 보지 않아도 당당한 체구와 눈매만큼이나 날카로운 분위기로 그가 칼밥 먹는 인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누구지? 처음 보는 얼굴인 것 같은데.”
그는 기억력이 좋은 편은 아니나 이 정도로 인상적인 자라면 한 번 봤어도 기억했을 것이다. 그런데 전혀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드디어 만나는군. 잠깐 가지. 보고 싶어 하는 분이 계시네.”
“미친놈.”
대뜸 속마음이 툭 튀어나왔다.
“뭐?”
사내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갑자기 미친놈이라고 욕을 먹으면 누구든 기분이 나쁘겠지. 하지만 이쪽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다. 밖에서 밭 갈고 씨 뿌리다가 며칠 만에 돌아왔다. 그래서 이제 좀 쉬려는데 생전 처음 보는 놈이 어디 좀 가자고 한다. 고운 말이 나가겠는가?
“보고 싶은 놈이 찾아오라고 해라.”
“…….”
사내의 눈매가 사납게 변하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손을 움찔거리는 것이 여차하면 칼을 뽑기라도 할 모양새. 분위기가 험악해진 것을 느꼈는지 여관 주인은 슬그머니 주방 쪽으로 사라졌다.
“더 할 말 있나? 없으면 좀 비키지.”
“상당히 버릇이 없군.”
“느닷없이 들이닥쳐서 자기소개도 안 하고 개소리나 늘어놓는 놈한테 들을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사내가 이를 갈며 손을 허리춤으로 옮겼다. 군터 역시 등에 맨 창대에 손을 가져갔다.
일촉즉발의 상황.
살벌한 눈싸움 끝에 사내가 먼저 손을 뗐다. 그리곤 신경질적으로 문을 열어젖히고 나갔다.
‘싱거운 놈이군.’
주인장이 헐레벌떡 뛰어와 무슨 일이냐고 캐물었다. 대충 별 거 아니라고 답해주었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약속까지 해주었다. 주인장의 표정으로 보아 여차하면 돈을 돌려주며 방을 빼달라고 할 기세였기 때문이다.
‘딱히 시비를 걸려고 온 것 같지는 않았는데.’
내용이야 황당하기 그지없었지만 처음의 말투는 그래도 나름 예의를 갖춘 것이었다.
‘뭐, 정 볼 일이 있으면 다시 찾아오겠지.’
더 이상의 생각을 접고 물기가 다 안 마른 머리를 베개에 뉘였다. 딱딱한 침대가 양털처럼 부드럽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