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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9화 (9/1,064)

<-- 인연 -->

다음날 아침. 군터는 전날의 폭음은 없던 일인 것처럼 말짱한 정신으로 길을 나섰다. 서문대로의 대장간으로 간 그는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늙은 대장장이에게서 물건을 건네받았다.

보통 사람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장신인 그보다도 더 긴, 장창이라고 하기에도 부족함이 없는 길이. 그 길이의 3분지 1내지 반절은 검신이다. 무게는 드는 순간 묵직하다고 느낄 만하며, 칼날의 예리함은 여느 검과 다를 바 없다.

“괜찮군.”

“젊은 사람이 꽤나 인색하구만.”

“딱 주문한대로 나왔으니까. 이보다 나았다면 칭찬이라도 해줬을 거요.”

“나는 돈 값은 한다고 자부하지만 명장은 아닐세. 명장을 찾는 거였다면 저기 내성(內城)으로 갔어야지.”

“그럴 형편이 안 되니 이곳에 온 것이 아니겠소.”

군터는 약속한 잔금을 넘겼다. 이로서 정말 그는 빈털터리가 된 셈이었다. 지금 머물고 있는 숙소에서 나와 돼지우리로 돌아가지 않으려면 당분간은 한 끼 식사를 고를 때도 신중해져야 하리라.

“또 오시게.”

묵직한 돈주머니에 기분이 좋아진 늙은 대장장이는 기분이라며 검창에 말 누더기도 내주었다. 그리고 그의 대장간 앞까지 배웅을 나왔다.

“등은 좀 괜찮은가?”

“…소문 참 빠르군.”

“항상 그렇지.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하면 하루 만에 살마드 사람의 반이 알게 돼. 그리고 그 다음날 나머지 반이 알게 되지. 자네의 이름은 몰라도, 기골이 장대한 아쿼러즈 십인장에 대한 소문은 이미 이 거리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라네. 뭐, 며칠 정도 지나면 다시 묻히긴 하겠지만.”

“부디 그랬으면 좋겠군.”

“흐흐. 살펴가게.”

군터는 대장간을 나오자마자 곧장 숙소로 향했다. 그리고 자신의 방문을 닫고 들어가 검창을 둘러싼 누더기를 걷어내고 단검 허리춤에 찬 단검을 뽑았다.

서걱!

날카로운 칼날이 팔뚝을 부드럽게 베었다. 상처가 위로 향하게 팔을 돌리니 핏물이 조금씩 번져 나왔다.

“…….”

군터는 그 상처에 붉은 천을 가져다 댔다. 외조모에게 받은 피먹이 천. 서서히 살을 타고 바닥으로 내려가려던 핏줄기가 피먹이 천에 스며들었다. 아래로 떨어져가던 피가 거꾸로 살을 타고 올라 천에 스며드는 광경은 꽤나 기괴했다.

피가 어느 정도 멎을 때까지 군터는 피먹이 천을 붕대처럼 감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에야 천을 떼어 검창의 창두 아래 부분에 한 번 묶었다.

스윽

손을 뗀 순간, 천이 움직였다. 매듭을 짓고 남은 자락이 뱀처럼 창대를 휘감았다. 그리고는 믿을 수 없게도, 마치 물처럼 그대로 창에 스며들었다. 끝자락에서부터 시작된 그 현상은 끝내 군터가 직접 묶은 매듭까지 이어졌다. 숨을 너덧 번 정도 내쉬자 피먹이 천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 대신 아무 것도 없던 밋밋한 창대에 아주 희미하게, 불그스름한 문양이 생겼다. 실처럼 가느다란 그것은 창대에 스며들기 전의 피먹이 천과 닮아 있었다.

‘이것은 홀로 선 전사로서의 증명. 그리고 상징.’

뿌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담감이 들었다.

군터는 붉은 선이 장식한 창대를 강하게 움켜잡았다.

*

군터의 상관인 백인대장 토프락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얼굴이 상당히 붉어진 그는 당장 노발대발해도 이상하지 않아 보였다. 그는 한 마디 한 마디를 하며 숨을 골랐다. 종종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그래도 길게 끌지는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그는 하고 싶은 말은 많은 것 같았지만 바로 이전에 군터가 가져온 전공 덕분에 꾹꾹 눌러 참는 듯했다. 그는 군터를 탓하는 말은 별로 하지 않았고, 대신 소속 병사들이 죄다 반병신이 되거나 그에 가깝게 상함으로써 임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된 군터 십인대의 상황을 늘어놓았다.

“심하게도 했더군. 아직은 좀 봐야 하겠지만 앞으로 병신 신세를 면키 힘들 거라는 녀석들만 해도 벌써 넷이야. 남자구실 못하게 된 녀석들은 여섯이고.”

“…….”

실상 군터 십인대는 와해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도 십인장이 직접, 자기 손으로 와해시킨 거다. 물론 명분이야 있었다지만 저자에 떠돌아다니는 소문 이상으로 살마드의 군인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당분간은 부대가 제 기능을 못하게 되어버렸으니, 자네는 당분간 밭에 가 있게.”

살마드는 바크렌의 주성이면서 동시에 제국 국경의 최북단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인구에 비해 많은 군사가 주둔하고 있는데 그 수가 상비군만 해도 5만에 달한다. 다달이 녹봉을 받아가는 군인의 수만 5만 명이 넘는다는 것은 주 전체를 놓고 보아도 경제적으로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5만의 군대 중 중앙군 1만 외의 4만 명의 병사들은 전선에 배치된 이들을 제외하고 매년 일정기간 동안은 둔전(屯田)을 비롯해 노동력이 필요한 곳에 차출되어 노역을 해야 했다.

본래 군터는 아직 그쪽으로 빠질 이유가 없었다. 토프락 백인대가 순번이 돌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토프락의 말마따나 십인대가 제 기능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하릴없이 놀고먹을 수는 없지 않은가?

“예.”

그리하여 군터는 살마드 남동쪽으로 반나절 거리에 있는 둔전지로 향하게 되었다. 졸지에 군인에서 농민이 되어버린 것이다.

“날씨 한 번 좋구만.”

축 처진 군터의 기분과는 정반대로 날은 맑았다. 구름은 드물었고 해는 하늘 가운데에 걸려 짱짱하게 빛났다.

“아이고. 이 길은 매번 지랄 맞네.”

“그러게나 말이야. 에이!”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던 수레가 주춤했다. 수레를 끌던 소는 힘에 부치는지 연신 씩씩대며 콧김을 뿜고 있지만 제자리걸음만 반복할 뿐이었다. 하는 수없이 병사들이 수레 뒤쪽에 붙어 밀었다.

“어어!”

하지만 조금 밀리나 싶던 순간. 갑작스레 수레가 도리어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이놈아! 힘 좀 더 써라!”

위쪽에 있던 병사가 당황하며 소를 다그쳐 보았지만 소는 힘이 다했는지 전처럼 콧김도 뿜지 않고 설설 뒷걸음질 쳤다.

“나와라.”

그때 옆에 떨어져 지켜보던 군터가 나섰다. 그는 소의 목에 걸린 나무틀을 붙들고 힘껏 잡아당겼다. 그러자 점점 빠르게 밑으로 밀려가던 수레가 거침없이 질질 끌려왔다. 틀에 목이 매여 있던 소가 목이 턱하고 막히자 기겁을 하며 앞으로 걸었다.

“어어? 올라간다!”

“입 닥치고 밀기나 해!”

그러나 그들이 붙어서 뭘 해보기도 전에 수레는 알아서 움직였다. 일반 사람의 보폭만큼 쑥쑥 올라가던 수레는 언덕길이 끝날 때쯤이 되어서야 멈췄다.

“무, 뭐…….”

병사는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군터는 별 것 아니라는 듯 손을 털었다.

“약은 놈 같으니.”

“예?”

병사가 멍청한 얼굴로 되물었다. 군터가 턱짓으로 소를 가리켰다. 소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헐떡대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힘이 빠져서 탈진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놈. 일부러 힘을 뺐다. 요령을 피운 거지.”

“그럴 리가. 이렇게 숨을 헐떡거리는데요?”

“모양만 내는 거지.”

소는 힘이 세다. 다 큰 소 한 마리가 이 정도 수레도 못 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거기에 군터는 중간 중간 놈의 눈알이 슬쩍 돌아가는 것을 확실히 보았다. 이만하면 우직한 소라는 말은 개나 줘야 한다. 물론 이놈이 유난히 약은 것이겠지만.

쿵!

군터가 소의 머리통을 쥐어박았다. 힘을 빼고 친 것이었으나 그래도 놈은 골이 울렸는지 구슬피 울며 휘청거렸다.

“또 요령을 피우면 그때는 더 세게 때려주마.”

음머-!

소가 사람의 말을 알아들었을 리는 만무하다. 그래도 분위기는 제대로 느낀 것인지 그 뒤로 놈은 둔전지에 도착할 때까지 한 번도 퍼지지 않고 제대로 수레를 끌었다.

“장관이군.”

둔전지에 도착한 군터는 멈춰 서서 탄성을 토했다.

“이 둔전지는 10년이 넘게 살마드에서 운영해온 곳이니까요.”

기어 다니는 뱀처럼 여기저기 울긋불긋한 언덕들이 불규칙하게 늘어져 있었다. 서늘한 바람이 언덕의 골을 스치며 소리를 냈다. 그 무질서해 보이는 자연의 지형에 인간이 만든 밭이 통일성을 부여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곳이 다 밭이었다. 여기저기서 병사들이 씨를 뿌리고 쟁기 단 소를 몰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수가 족히 수백은 되어 보였다.

“드디어 온 건가?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는 줄 알았잖아.”

한 사내가 다가왔다. 일반적으로 병사들이 입는 가죽갑옷이 아니라 사슬갑옷을 입고 있었다. 굳이 가슴팍에 달린 계급장을 보지 않더라도 그것으로 그가 백인대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군터는 즉각 군례를 올렸다. 백인대장은 그를 보고 멈칫했다.

“귀관은 누구지?”

“토프락 백인대 소속 십인대장 군터입니다.”

“반갑군. 백인대장 소렌이다. 그런데 토프락의 부하가 여긴 어쩐 일로?”

“명령서입니다.”

군터가 품에서 토프락의 명령서를 꺼내 소렌에게 건넸다.

“으음…….”

명령서를 읽어가는 소렌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마지막에 명령서를 접었을 때 그의 표정에 드러난 감정은 난처함 반, 흥미로움 반이었다.

“재미있군.”

“…….”

“뭐 어쨌든 좋아. 이쪽 일은 해본 적 있나? 아쿼러즈들이 농사는 안 짓는 걸로 알고 있는데.”

“경험은 있습니다. 이쪽 둔전지에서는 처음입니다만.”

“그거 다행이군. 뭐, 이쪽이라고 해서 딱히 별 다를 건 없어. 원래라면 십인장들은 병사들 감독이지만…자네 같은 경우는 직접 일을 해야 할 텐데, 괜찮겠지?”

지휘할 병사가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애초에 토프락은 이것을 의도하고 군터를 이곳에 보낸 것이었다. 나름의 벌인 셈이다.

“예.”

말단 병사로 직접 일을 했던 것이 고작 작년의 일이다. 오히려 십인장으로 병사들을 감독하라 했다면 더 낯설게 느꼈을 것이다.

“이리 오게. 부하들을 소개시켜주지.”

소렌은 군터를 데리고 그의 백인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는 휘하의 십인장들을 불러 모았다.

“이쪽은 토프락 백인대의 십인장 군터다. 사정이 있어서 당분간 우리와 함께 일을 하기로 했으니까 그런 줄 알고 있도록. 이 친구는 병사들과 섞여 일을 할 테지만, 특별히 자네들이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알아서 하게 놔두라는 뜻이야.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소렌 백인대의 십인장들이 저마다 묘한 표정을 지은 채 군터를 흘깃거렸다.

“반갑네. 군터 십인장. 소문의 그 유명 인사를 이렇게 금방 만나게 될 줄이야.”

움직이는 길에 한 십인장이 다가왔다. 적당히 호인 같은 인상에 실실 웃는 것이 붙임성이 좋아 보였다.

“날 알고 있소?”

“몰랐었는데, 이번에 알게 됐지. 자네는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유명해. 잔혹한 아쿼러즈 십인장에 대한 이야기가 도시에서 제법 화제거든.”

“…….”

“난 자네가 옳았다고 생각하네. 물론 좀 과했다고 하는 이들도 많지만, 과한 것으로 치면 패악질을 부린 놈들이 훨씬 과했지. 안 그런가?”

“그 말대로요. 난 그렇게 생각했지.”

군터가 짤막하게 답했다. 길게 늘어지는 수다쟁이 십인장의 말을 자르면서.

그의 말은 듣기 좋은 데가 있었다. 가려운 부분을 살살 긁어주는 화법은 시원하면서도 달콤했다.

그랬기에 군터는 그에게 거부감을 느꼈다.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처음 본 이 자가 왜 자신에게 달라붙어 듣기 좋은 말을 해주는가. 물론 사람의 호의에 꼭 이유가 있을 필요는 없겠지만, 아쿼러즈로서 받은 차별과 이유 없는 증오가 익숙한 군터로서는 의심이 먼저 드니 친밀함보다는 경계심이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까칠하게 굴 것 없네. 난 그냥 자네에게 호감이 있어서 친해지고 싶을 뿐이야.”

“내게 호감? 재미있는 농담이군.”

절로 냉소가 흘러나온다. 그래도 사내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멋지잖은가. 보통은 그런 일이 일어나면 대충 뭉개고 말지, 자네처럼 대놓고 부하들을 문책하지는 않아. 자기체면 깎아 먹기일뿐더러, 무엇보다 윗분들이 일 생기는 걸 안 좋아하거든.”

“…….”

“하지만 자네는 그냥 들이받았지. 솔직히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미친놈인가 했었는데, 지금 보니까 딱 알겠더라고. 사내는 사내를 알아보는 법이거든. 자네는 이곳에는 벌을 받아서 온 게 아닌가? 그런데도 당당하더군. 진짜 사내가 아니고서는 그럴 수 없어.”

그가 손을 내밀었다.

“로스버라고 하네.”

군터는 잠시간 로스버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 보다 피식 웃으며 맞잡았다.

“군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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