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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8화 (8/1,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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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톰은 말리지 않았다. 못한 것이 아니라 안 한 것이다. 처음에야 자기도 모르게 놀라서 언성을 높였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굳이 나설 필요가 없음을 알았다.

‘저놈들이 죽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 아닌가.’

다소 이야기가 돌기는 하겠지만, 뭐 어떤가? 일개 말단 병졸, 그것도 질 나쁜 사고를 친 놈들 따위야 몇 죽어나간다고 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콰직!

곤장 수십 개가 부러져 나갔다. 열 명의 병사들은 모두 기절하여 시체처럼 늘어졌다. 하나같이 아랫도리에서 핏물이 흘렀다. 앞으로 저들이 사내구실은 할 수 있을까? 아니, 제대로 걸어 다닐 수는 있을까? 벨톰은 그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조용하군.’

지켜보는 눈은 수백 쌍이나 되는데 수군거리는 작은 목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그는 이 적막이 썩 마음에 들었다. 충격을 받은 듯이, 겁을 먹은 듯이 움츠러들어 있는 저들이 오늘의 이 일에 대해 떠들고 다닐 것이다. 병사들의 패악을 엄히 다스린 준엄한 군인으로서 그의 이름이 돌게 되리라. 물론, 자기 부하들을 인정사정없이 벌한 젊은 십인장의 이름도 함께 돌기는 하겠지만.

“들어라!”

모든 이의 시선이 모였다. 벨톰은 만족감을 느꼈다. 그의 목소리가 더 힘을 얻었다.

“이로서 모든 형의 집행이 끝났다! 성스러운 황제 폐하와 위대한 군주, 고귀한 귀족들 아래 모든 신민(臣民)이 제국 법아래 평등함을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다시 한 번 되새기는 기회가 되었기를 바란다!”

형이 끝났다. 구경꾼들이 떠나가고 병사들이 자리를 정리하는 동안 벨톰은 군터에게 다가갔다. 여전히 군터의 등에서는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군터는 시체처럼 변해 들것에 실려 가는 그의 부하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거칠어진 숨을 고르고 있었다.

“수고했네. 바로 치료받지 않아도 괜찮은 건가?”

“괜찮습니다. 이 정도에 골골댈 만큼 허약하지는 않습니다.”

벨톰은 순간 황당하여 표정 관리도 하지 못했다.

반쯤 시체가 되어버린 열 명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군터가 받은 편형 역시 ‘이 정도’라고 가벼이 치부할 수 있을 만큼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한 대만 맞아도 살이 터지는 채찍질을 열대가 훌쩍 넘게 맞지 않았던가. 그 정도라면 건장한 사내라 해도 한 달은 골골대야 정상인 수준이다.

‘아무튼 강골은 강골이군.’

허언이든 아니든 간에, 멀쩡히 서서 수백 번이나 곤장질을 해냈으니 말이다. 그 정도만 해도 평범한 사람과는 궤를 달리하는 강골이라 할 수 있었다.

“자네에게 맡긴다고 한 말이 있어 말리지 않았네만, 괜찮겠는가? 말들이 많을 터인데.”

“그 역시 괜찮습니다. 죄를 지은 만큼 벌을 받은 것뿐이니. 그것보다도…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음?”

* * *

군터는 걸레짝이 되다시피 한 등에 간단히 으깬 약초를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 그리고 곧장 피해를 입은 주점으로 향했다.

사건이 있은 지 며칠이 지났지만 주점은 여전히 난장판이었다. 멀쩡한 것은 간판과 문 두 짝 밖에 없었다.

인사불성이 된 주인은 그곳에 있었다. 다른 가족들은 보이지 않았다.

“무, 무슨 일이신지…….”

여기저기 붉고 푸르게 부풀어 있는 주인장은 겁에 질린 기색이 역력했다. 그나마 그가 이렇게 얼굴을 드러낸 것도 큰 용기가 필요했으리라.

금방이라도 납작 엎드려 빌 것처럼 구는 그 모습에 군터는 입맛이 썼다. 마치 자신이 도적이라도 된 것 같은 더러운 기분이었다.

“내가 누군지 아시오?”

“…모, 모릅니다만.”

“당신의 가게를 망치고, 당신을 두들겨 팬 데다, 당신의 딸까지 다치게 한 쓰레기들의 상관이오. 십인대장 군터라고 하지.”

주인장이 뒷걸음질 쳤다. 끔찍한 노여움과 두려움이 표정에서 드러났다. 만약 군터가 가게 안으로 들어서 있지 않았다면 그는 당장 가게의 문을 닫아걸었을 것이다.

“겁먹을 것 없소. 나는 사과하러 온 거요. 상관으로서 부하들의 잘못에 책임이 있으니까.”

“돼, 됐습니다. 그, 그만 돌아가 주십시오! 나는…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듣고 싶지도 않으니까! 이 가게는 곧 정리할 겁니다. 그러니 제발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미안하오. 이런 말 한 마디로는 아무런 위로도 되지 않겠지. 하지만 적어도 그놈들이 다시 당신과 당신의 가족들 앞에 나타나는 일은 없을 거요.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겠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제발…제발 좀 그냥 가주십시오!”

주인장은 이제 울부짖었다. 그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흘렀다. 그의 고통스런 고함에서 비린내가 느껴지는 듯했다.

“…알겠소.”

고개 숙인 군터는 그대로 돌아 나왔다. 그리고 도망치듯 걸음을 빨리 했다. 가게와 딸을 지키지 못한 사내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침착함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그나마 주점 문을 나서기 전에 기울어진 테이블 위에 돈 주머니 하나를 놓고 나온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이성적인 행동이었다.

“젠장.”

욕지거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어때?”

로크가 물었다.

“어떨 것 같아.”

“쫓아내고 싶겠지. 하지만 널 보고 감히 그러지는 못했을 테고…뭐, 그냥 가달라고 울며불며 사정이라도 하든?”

“정확하군. 처절하게 울며 애원했지. 마치 내가 죄를 지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신기라도 있는 걸까. 평소에는 전혀 그런 생각이 안 드는데, 가끔씩 보면 지금처럼 어딘지 모르게 비상한 면이 있다. 주로 쓸데없는 쪽에서긴 하지만.

“망할 자식들. 가만두지 않겠어.”

군터가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열 명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그 정도면 충분해. 앞으로 그 녀석들 중에 몇 명이나 제대로 걸어 다닐 수 있을까? 반병신이 된 거나 마찬가지야. 자, 자, 이상한 소리는 그만하고 꿀꿀한 기분이나 풀러 가자. 한 잔 해야지. 응?”

한낮의 주점은 한산했다. 자리 잡고 앉은 둘은 주구장창 잔을 비웠다. 정확히는 잔을 비우는 쪽은 군터였고 로크는 간간이 대작해주는 정도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로크가 군터와 보조를 맞추며 달렸다가는 금방 취해 나가떨어질 터였다.

자리에 앉고서 주구장창 술을 들이부은 군터는 어느 정도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나서야 흉금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거슬려. 이놈이고 저놈이고, 거슬리는 것투성이야. 왜 내가 그런 쓰레기 같은 놈들의 일에 발목을 붙들려야 하는 거지? 그 나이 처먹고 제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는 것들한테 왜!”

군터는 격하게 울분을 토했다. 로크는 가만히 그의 분풀이를 들어주다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맞아. 더러운 일이지. 하지만 어쩌겠어. 감내해야 할 부분은 감내해야지. 너도 이제 마냥 순진할 시기는 지났잖아?”

“뭐?”

군터의 눈매가 사납게 꿈틀댔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등에서는 거슬리는 통증이 느껴지는데, 거기에 술기운도 어느 정도 올라온 그는 평소에 비해 다분히 감정적인 상태였다. 아무리 로크라 해도 허튼 소리를 한다면 욕지거리는 물론이거니와 여차하면 주먹까지도 나갈 수 있었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오줌을 지릴 흉악한 기세. 그를 앞에 두고도 로크는 눈을 똑바로 뜨고 할 말을 했다.

“그렇잖아. 생각을 해봐. 확실히 네 부하 놈들과 너는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사이였지. 뭐라더라? 처음 만난 자리에서 껄렁대면서 비꼬았다고 했나? 아쿼러즈 운운하면서? 그래서 그 말을 지껄인 놈을 떡이 되도록 두들겨 팼다고 했었잖아. 같이 덤벼든 놈 셋이랑, 말리던 놈 넷까지 더해서.”

로크가 킬킬 웃었다. 하지만 군터는 웃을 수 없었다.

“확실히 그놈들이 쓰레기 같은 놈들이기는 했어. 그렇지만 솔직해지자고. 그놈들이 아니라 다른 놈들이었더라도 비슷했지 않을까? 뭐가 되었든, 나이도 어린데다 무엇보다 아쿼러즈인 너는 어떤 놈들을 부하로 들였든 무탈하게 십인장 생활 하기는 힘들었을 거야. 너도 알잖아? 아니라고는 하지 마. 난 네가 초원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온갖 불이익을 받은 걸 알고 있어. 내 이 두 눈으로 직접 본 게 몇 개인데?”

“…….”

말문이 턱 막혔다. 뭐라고 반박하고 싶은 마음은 들끓는데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술이 더 되었다면 되는 대로, 마구잡이로 지껄이기라도 했겠지만 그러기엔 그의 정신이 너무나 말짱했다. 몇 번인가 입매를 들썩이던 군터는 결국 술을 한 잔 더 들이키는 걸로 말을 대신했다.

“알면서도 버틴 거잖아? 더럽고 치사해도 어떻게든 올라가겠다고, 그렇게 각오한 거 아니었어?”

“…그래. 그랬지.”

“나만 해도 개 같다고 하루에도 몇 번씩 느끼는데, 넌 오죽하겠냐.”

“잘 안다는 듯이 떠드는데. 아쿼러즈도 아닌 놈이.”

“알지는 못해도 짐작은 할 수 있지.”

“아니. 넌 짐작도 못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길거리만 걸어도 개 같은 눈빛들이 달라붙는다고. 악취를 풍기는 거지새끼도 그렇게는 안 볼 거야.”

“네 인상이 너무 험악해서 그런 건 아닐까?”

평소였으면 웃고 넘길 농담에도 짜증이 일었다. 군터는 인상을 찌푸리며 또 한 모금 들이켰다.

“괜히 또 너무 나가는 건 아니야?”

“무슨 소리지?”

“남들은 신경도 안 쓰는데 혼자서 과민해가지고 소설 쓰는 거 아니냐고.”

“넌 몰라. 제국인으로 태어나서 태평하게 이리저리 마음 내키는 대로 놀아재끼는 너는, 나 같은 놈을 이해할 수 없어.”

스스로 좀스럽게 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평소 같았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을, 술의 힘을 빌려 하고 있었다. 만약 그가 다음날 술에서 깨어 지금의 기억을 되짚는다면 한숨 쉬며 머리를 쥐어뜯으리라.

“내가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좋아서 부하들하고 술판을 벌이고 놀러 다니는 거라고 생각하지?”

반문하는 로크의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삐딱했다. 그러나 군터는 그것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그의 감정이 너무 격했다.

“아하. 그럼 뭔가 대단한 뜻이라도 있으셔서 여기저기 깃발을 꽂으러 다니는 거였나?”

“아니. 좋아서 그런 것도 분명히 있지. 놀면 재미있으니까. 노는 걸 싫어하는 놈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그런데?”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야. 단순히 즐기려면 나 혼자서 가도 충분하지. 왜 굳이 지저분한, 나보다 나이도 훨씬 많은 놈팡이들을 끌고 가겠냐?”

“…….”

“지금에야 그것들이 대장, 대장 하지만 처음에도 그랬을까? 나 말이야, 어떤 면에서는 너보다도 더했어. 너는 그래도 그 누구라도 함부로 못 대하잖아. 어지간한 사내놈들은 네 앞에 서기만 해도 눈을 내리깔 거고, 혹 대드는 놈이 있어도 가뿐하게 때려눕히면 그만이겠지. 하지만 난 그렇지 않다고. 난 열 놈이나 되는, 나보다 나이도 많고 군문에서도 더 오래 구른 놈들을 든든한 뒷배를 믿고 굴릴 수도 없고 너처럼 힘으로 휘어잡을 수도 없어. 그래서 난 그 놈들과 친해지려고 무진장 노력했어. 얼마 없는 돈을 털어서 고기를 사 먹이고, 다음날 반 시체가 될 정도로 술을 퍼 마시기도 했지. 그래. 뭐, 좀 지저분하게 놀기도 했어. 왈패 놈들처럼 밤거리를 헤매면서 소리도 질러댔었지. 그러다 보니까 점점 그놈들하고도 친해졌고, 친해지니 상관 대접을 해주더군. 네가 보기에는 어떨지 몰라도 내 나름대로는 최대한 노력한 거야. 넌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그 개 같은 ‘대장님’소리를 들으려고 최선을 다했다고!”

목이 탔던 것일까. 로크가 여태 홀짝거리기만 하던 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감정이 올라왔는지 어조가 더 격렬해졌다.

“넌 출세하는 게 목표라고 했잖아. 군인이 출세하면 뭐가 되는데? 십인장이 되고, 백인장이 되고, 천인장이 되고, 장군이 되는 거잖아. 점점 더 많은 부하들을 거느리게 되는 거라고. 그런데 지금 널 봐라. 달랑 열 명도 거느리기 싫어하잖아.”

“애초에 부하라고 생긴 놈들이 죄다 글러먹었으니까 그런 거다. 봐라! 그놈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군인이라는 놈들이, 제 놈들이 지켜야 할 민간인을 패고 겁간했어. 그런 놈들이 제대로 된 군인이라고 할 수 있는 거냐?”

“아니지! 당연히 아니지! 하지만 그런 짓을 저지르기 전에, 녀석들은 바크렌의 군인이었다. 너 이전에 있던 십인장 밑에서 그 녀석들은 정예라고 할 수는 없을지라도, 어쨌든 군인이었다고. 하지만 네가 그놈들의 상관이 되고나서 저놈들은 군인이라고 할 수도 없는 쓰레기가 됐지.”

“그래서…그게 내 탓이라는 거냐?”

“글쎄. 혹시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은 없어? 어쩌면, 너에게도 조금은 잘못이 있지 않을까 하는.”

콰앙!

얼굴이 대번에 붉어진 군터가 탁자를 내리쳤다. 두터운 나무로 된 탁자가 쩍 하고 금이 가며 부서졌다. 탁자 위의 잔이 쏟아지고 술이 흘렀다. 점점 잦아지는 고성에 마음을 졸이고 있던 주인장이 우는 소리를 내면서도 감히 다가오지는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왜 그래? 화가 나면 애꿎은 탁자 부수지 말고 날 후려 쳐. 쉽잖아?”

“…….”

군터는 말없이 로크를 노려봤다.

“하지만 후려치기 전에, 대답이나 좀 해봐. 내 말이 아주 틀려먹었냐?”

“아니. 네 말도 일리가 있어. 확실히, 내 책임도 조금은 있을지도 모르지.”

로크가 피식 웃었다.

“근데 왜 화를 내?”

“네 말을 인정해버리면 내가 틀린 게 되니까. 그게 화가 나서 그런 거다.”

“기분 더럽지?”

“상상도 할 수 없을 걸. 이보오! 주인장!”

“예, 예엣!”

몸을 움츠린 주인장이 쪼르르 달려왔다.

“가게를 어지럽혀서 미안하오. 내 배상하리다.”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은 군터가 멈칫했다. 그리곤 슬쩍 로크에게 눈길을 주었다. 어깨를 으쓱인 로크가 대신해서 돈을 꺼냈다.

“술값하고, 여기 이 박살난 탁자 값까지 해서 이 정도면 되겠지?”

“아이고, 물론입죠.”

안쓰러울 정도로 움츠렸던 주인장의 어깨가 조금은 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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