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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카락을 떠난 군터와 로크는 사흘 만에 살마드로 돌아왔다. 갈 때 나흘이나 걸렸던 것은 로크의 술병 때문이었음이 다시 한 번 증명됐다.
“이제 뭐할 거냐?”
“글쎄.”
딱히 해야 할 일은 없었다. 남은 휴가 기간 동안 해야 할 일이라곤 대장간에 들러 물건을 찾는 것뿐이고, 대장장이와 약속한 날은 내일이다.
“그럼 간만에 한 번, 어때?”
로크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손목을 꺾었다. 한 잔 하러 가자는 뜻이다. 평소 같았으면 됐다고 했을 테지만 오늘은 어쩐지 목이 칼칼했다. 그러고 보면 술을 마신지도 꽤 된 것 같았다. 특별히 절주를 하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다.
“그럴까? 어디로 가려고.”
“어디긴? 새삼스럽게 뭘 물어보고 그래? 당연히 칸조로프지.”
살마드에 있는 널리고 널린 주점들 중에서 군터와 로크가 종종 이용하곤 하는 저렴한 곳이 있다. 칸조로프는 그곳의 주인이었는데, 주점의 이름은 따로 있었지만 간판의 글씨도 다 벗겨질 만큼 후줄근한데다 본래의 이름도 돌아서면 잊어먹을 만큼 심심한 것이었으므로 그곳을 아는 이들은 그곳을 주인의 이름을 따 칸조로프라 불렀다.
그렇게 간만에 회포를 푸는 건가 싶어 들뜨려던 찰나. 한 사내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자주 얼굴을 보는 로크 십인대의 선임병이었다.
“대장! 드디어 오셨군요! 큰일 났습니다!”
“큰일?”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하는 로크. 선임병의 시선이 로크에게서 군터에게로 옮겨갔다. 그 행동에 군터는 무언가 싸한 느낌을 받았다. 누군가 뒷덜미를 음산하게 긁어내리는 것 같은 불쾌한 느낌.
“내 일인가 보군.”
군터의 얼굴과 목소리가 모두 딱딱하게 굳었다. 칸조로프에 대한 것은 어느새 없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병사는 로크가 채근하자 최대한 상세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대장님과 군터 십인장님이 고향으로 떠나시던 바로 그날 저녁이었습니다. 군터 십인장님의 휘하 녀석들이 회식을 하다가 술이 너무 되었는지 사고를 친 모양입니다.”
“사고?”
“예. 술집에서 시끄럽게 굴다가 다른 사람들과 싸움이 붙고, 말리던 주인장까지 상하게 했다는 것 같습니다. 에…그리고…….”
“내 눈치 볼 것 없다.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라.”
병사의 목울대가 요동쳤다. 거의 노려보다시피 하고 있는 군터에게서 살벌한 기세가 넘실거린 탓이다.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뼈마디를 분질러 놓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에…그, 여러모로 심하게 행패를 부린 모양입니다. 도저히 대충 넘어갈 수 없을 정도로…….”
군터는 굳은 얼굴 그대로 헛웃음을 지었다.
“멋지군.”
뜨거운 한숨이 터져 나왔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끓는 물에서 피어오른 것 같이 뜨거운 한숨이었다. 군터의 얼굴은 악귀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로크는 무어라 말을 하려는 듯 손을 뻗었지만 그런 군터의 표정을 보고 뻗던 팔을 멈췄다.
“소식 전해줘서 고맙다.”
“아, 아닙니다!”
“그래서, 그 녀석들은 지금 어디 있지?”
“외성 지하 감옥에 수감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리고 순찰대의 벨톰 백부장께서 십인장님을 찾고 계십니다.”
“그래. 알았다.”
군터가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외성 치안대의 병영이 있는 쪽이었다.
* * *
“안타까운 일이야. 뭐, 술이라는 놈이 그래서 마물인 게지. 멀쩡하던 사람도 짐승 같이 만들고, 짐승 같던 놈도 멀쩡한 사람으로 만들거든.”
“면목이 없습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군터가 고개를 숙였다. 머리가 배꼽보다 더 낮게 내려갔다. 아예 땅에 닿을 기세였다. 백부장 벨톰이 손사래를 쳤다.
“어허, 그렇게까지 자책할 필요 없네. 원래 아랫것들이 다 그렇지. 윗사람이 아무리 잘 이끌려 해도 자꾸만 엇나가가거든.”
“…….”
“내 개인적으로는 없던 일로 하고 싶다네. 하지만 워낙에 거하게 사고를 치는 바람에, 그대로 묻기는 좀 힘들 것 같아. 일단 얽힌 자들도 많고, 다치기도 심하게 다쳤거든. 까딱 잘못 했으면 몇 사람 죽었을지도 몰라.”
“조용히 넘길 수 있다 해도 그래서는 안 되지요. 원칙대로 처리함이 옳다 생각합니다.”
“그래. 그래도…응?”
벨톰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뭘 잘못 들었나 싶었다. 그러나 착각이 아니었다. 다시 고개를 든 군터의 얼굴은 단호함 그 자체였다.
“일에 연루된 놈들 모두, 죗값을 부족함 없이 치러야 합니다. 물론 저 역시 상관으로서 부하 놈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데 대해 책임을 지겠습니다. 태형이든 장형이든 편형이든…만약 직위 강등이라 해도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아, 아니…그럴 필요까지야 있겠나?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피해자들에게 적당히 보상만 해주면 그만일 것을.”
‘이 야만인 놈이 왜 이러지?’
이제는 벨톰이 군터를 설설 달래기 시작했다. 기실 그는 이번 일에 대해 그리 심각하게 생각지 않고 있었다. 피해자라고 해봐야 싸구려 술집의 주인과 그 딸내미, 그리고 그런 곳을 들락거리는 하류 인생 몇 명일뿐이었다. 처벌을 하지 않고 넘긴다 한들 목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할 것들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는 이 일을 빌미로 군터에게서 적당히 대가를 받고서 대충 무마하여 처리하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도 못하게 군터가 이리 나오니 그로서는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그의 생각으로는, 애송이 십인장 놈이 이리 나와서는 안 됐다. 오히려 자기가 먼저 자그마한 성의 표시라도 하면서 적극적으로 굽히고 들어와야 마땅했다. 혹시 근본 없는 초원의 야만인 놈이라 뭘 모르는 건가 싶어 에둘러 잘 설명까지 해주었으나, 그럼에도 군터는 요지부동이었다.
“아닙니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맞는 거겠지요. 특히나 시민들을 보호해야할 책무가 있는 군인이 도리어 보호해야 할 시민에게 해를 끼쳤다면, 당연히 더 큰 벌을 받아야하지 않겠습니까. 백부장님의 마음은 감사하지만, 벌은 잘못한 만큼 부족함 없이 받겠습니다.”
“허허, 거 사람 참……. 젊은 사람이 어찌 그리 꽉 막혔나?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규율대로 하자면 자네는 자네 말처럼 편형을 받아야 해. 가시 채찍에 맞아 살점이 찢겨나갈 걸세. 한 달 여는 앓아누워야 할 테지.”
거듭하여 벨톰이 어르고 달랬으나 군터는 전혀 말을 들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벨톰도 더는 방도 없이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말을 하는 그의 표정에는 이제 분노와 싸늘함만이 남았다.
“좋아. 자네 말대로 하지. 날 원망하지 말게.”
“원망이라니요. 도리어 백부장께는 감사하고 죄송스러운 마음뿐입니다.”
벨톰은 이놈이 일부러 이러나 싶어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군터의 표정은 담담할 뿐이었다. 오히려 표정 관리를 한다고는 하지만 이따금씩 노한 기색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것을 본 벨톰은 결국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이놈 이거. 보기 드문 꼴통 놈이구만.’
가끔씩, 정말 가끔씩 있다. 융통성 없이 꽉 막힌 놈들이. 경험 부족이거나, 아니면 태생적으로 그렇게 생겨먹은 놈들. 그런 놈들을 상대로 일을 하려고 하면 잔뜩 피곤한 일만 생기곤 한다. 그런데 눈앞의 이 어린놈이 재수 없게도 딱 그런 부류의 인간인 것 같았다. 이런 놈에게는 대놓고 권해도 소용없다. 오히려 반감만 사기 십상이다. 스스로 변하기 전까지는 그 누가 말해도 들어 처먹지 않을 놈들이다.
“수감되어 있는 열 명은 법대로 처리하겠네.”
벨톰은 정확한 것은 일일이 따져보아야 알겠으나 적어도 장형 수십 대는 나올 것이라 했다. 그 정도면 정말 한 달 이상은 골골 거리며 기어 다녀야 하는 수준의 형벌이었다.
“그리고 말했듯, 자네도 책임을 피할 수는 없네.”
“예.”
군터는 즉시 형벌을 받겠다고 자청했다. 벨톰이 그러지 말고 준비를 한 후에 진행하는 건 어떻겠느냐 권했다. 통각을 둔화시키는 약 같은 거라도 준비하라는 뜻이다. 군터는 정중히 사양했다. 고통이 두려워 그런 마약 같은 것에 의존하고픈 마음도 없었거니와, 이 찝찝하고 더러운 기분에서 조금이라도 더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미룰 필요 있겠습니까. 받을 것은 모두, 당장 받겠습니다.”
“…그러게 그럼.”
벨톰이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군터는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즉시 형벌장으로 향했다. 제법 너른 공터에는 큼지막한 나무 기둥이 한 쌍 씩 띄엄띄엄 여러 개 박혀 있었다. 외부와 내부를 나누는 담은 사람의 허리춤만한 높이로 둘러져 있었는데,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온 것을 보고 주변을 지나다니던 시민들이 조금씩 몰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벨톰은 병사들 몇을 거느리고서 형벌장 중앙에 약식으로 설치된 단상을 올랐다. 그는 어느새 제법 모인 시민들을 의식하듯 주변을 쓸어본 뒤 목청을 높였다.
“여드레 전! 아주 부끄럽고도 참담한 일이 일어났다!”
침중한 어조로 시작된 이야기는 주점에서 만취한 병사들이 시민들을 폭행하고 주점을 파손한 것, 그리고 말리던 주인장의 어린 딸까지 상하게 한 사실 등을 낱낱이 드러냈다. 처음에 무언가 싶어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시민들이 금세 얼굴을 붉히며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저거 아쿼러즈 아니야?”
“맞네, 맞아.”
“저, 저 야만인 놈 보게! 야만인 놈들이 그럼 그렇지!”
‘빌어먹을!’
시민들의 욕설과 날선 시선을 받으며 군터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면서도 사납게 이를 갈았다.
그는 이런 모멸감에 익숙하지 않았다.
경험이 적은 것은 아니다. 아쿼러즈라는 낙인은 비카락을 떠나 군인이 된 이후로 줄곧 그를 따라다녔다. 이유 없이 욕을 먹은 적도 있었고, 다른 병사들 여럿과 싸움이 붙었을 때는 그 혼자만(심지어 그 싸움은 병사들이 먼저 시비를 걸어 붙은 것이었음에도) 벌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경험이 많다고 해도 이런 일은 도저히 익숙해질 수가 없다. 정말 잘못을 저질러 그 대가를 받는 것이라면 차라리 묵묵히 감내하겠으나, 이런 식은 아니었다. 수치스러움에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러한 부끄러움은 고스란히 분노로 화했다.
그때 병사들에 이끌려 나오는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군터 십인대의 병사들이었다. 그의 부하라 하는 자들이었다.
군터는 일부러 그들을 보지 않았다. 눈을 꾹 감고 끝나가는 벨톰의 연설을 마저 들었다.
“여기 묶인 이 자는 십인대장 군터이다! 그의 죄는 상관으로서 부하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에 제국의 법도에 따라 편형 15대를 선고한다!”
사정을 모르고 신나게 욕을 내뱉던 시민들은 벌 받을 짓을 저지른 게 군터가 아니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여전히 야만인 운운하며 못마땅한 기색을 내비치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집행하라!”
벨톰이 병사에게 신호를 주었다. 그러자 병사가 눈을 깜빡였다. 강도는 어떻게 하느냐는 물음이다.
벨톰은 눈매를 굳건하게 했다. 제대로 하라는 신호다. 병사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채찍을 쥐었다.
군터는 이를 악 물었다. 곧 등 뒤로 후끈한 통증이 몰아쳤다. 순간적으로 몸이 뒤틀리는 고통이었다. 그러나 군터는 사지에 힘을 주고 버텼다.
쫘악! 쫘악!
두 대, 세 대…….
점점 채찍질이 횟수를 더해 갈수록 주변의 소리들이 가라앉았다. 처음에는 열을 내던 사내들이 입을 다물었고, 그 옆에서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던 여인들은 처음에는 작게 비명을 지르더니 이제는 아예 고개를 돌려버렸다.
채찍이 한 번 허공을 노닐 때마다 피가 튀었다. 열 대에 다가갔을 때부터는 조그맣게 살점이 뜯겨져 나갔다. 위엄 있는 목소리로 횟수를 세던 벨톰의 목소리는 끄트머리에 다가갈수록 꺼림칙한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열다섯! 그만!”
채찍질이 멎었다. 흔들리던 군터의 몸도 멈췄다. 병사들이 다가와 팔과 다리를 묶은 굵은 줄을 풀었다. 그리고는 부축하려는 듯 다가왔다. 군터는 손짓으로 그들을 제지했다. 그는 두 다리로 굳건히 섰고, 온통 피범벅으로 변한 등을 꼿꼿이 세웠다.
“난 괜찮다.”
“그래도 치료를…….”
“됐다. 급하지 않다.”
군터는 단상 위의 벨톰을 보았다. 벨톰은 질린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벨톰 백부장님. 청이 있습니다.”
“청이라고?”
“예.”
“무엇인가?”
군터는 잠시 목을 가다듬었다. 악 다물었던 이빨 사이에서 피가 번져 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핏물을 꿀떡 삼키고 말을 이었다.
“제 부하들의 처벌을 제 손으로 직접 하고 싶습니다.”
“뭐라? 그건…….”
“염려하실 필요 없습니다. 부하들이라 해서 봐주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제 손으로 직접 처벌한 후, 여기 있는 사람들 중 누구 하나라도 부족하다 여긴다면 제가 다시 벌을 받겠습니다.”
“흐음.
벨톰이 턱수염을 쓸었다.
사실 이건 원칙적으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이런 사소한 일을 가지고 이렇게 자리를 만드는 것 자체가 매우 드문 일이었다. 굳이 원칙을 따지는 것도 우습기는 했다. 게다가, 편형을 열다섯 대나 맞고서도 당당하게 서 있는 군터의 모습에 그는 아쿼러즈라 우습게보던 마음도 접은 채 감탄하던 차였다. 그런 그가 하는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부탁,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좋다. 하지만 결코 형벌에 사사로운 감정이 들어가서는 아니 될 것이다.”
“감사합니다.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군터는 병사로부터 곤장을 넘겨받았다. 군터 십인대의 병사들은 이미 형틀에 묶여 엎드려 누워 있었다.
“대, 대장님!”
“아무 말 마라. 너희는 죄인이다. 가만히 입 다물고 벌을 받아라.”
군터는 형틀 앞에 섰다. 그리고 뒤쪽의 병사에게 물었다.
“몇 대인가?”
“서른 대입니다.”
횟수를 듣자마자 곤장을 들었다. 그리고 있는 힘껏 내리쳤다.
뻐걱!
“크아아아악!”
한 대.
빠각!
“끄어어어어어!”
두 대.
“자, 잠시…….”
무언가 잘못 돌아간다고 느꼈는지, 벨톰이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세 번째로 내리치는 곤장 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콰직!
“끄으으으……!”
곤장이 부러졌다. 동시에 장을 맞던 병사가 괴상한 소리를 내며 축 늘어졌다. 엉덩이 아래에서 핏물이 번져 나와 형틀을 적셨다. 군터는 부러진 곤장을 내팽개치고 병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부러졌군. 다른 것으로 가져다주게. 아니, 아예 되도록 많이 가져다주게.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병사가 잔뜩 얼어붙어 있다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