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터 -->
다음날 이른 새벽. 군터는 간단히 세수만 한 채 밖으로 나섰다.
전날의 여파인지, 마을은 여전히 고요했다. 목책 위에서 기둥에 기대 꾸벅꾸벅 졸고 있는 몇몇 사내들만이 바깥에 보이는 전부였다.
“미안하다.”
새벽잠을 즐기던 이들 중 하나는 어린 시절 군터와 함께 어울렸던 친구 중 하나였다. 그는 일찍부터 길을 나선 군터 덕분에 뜬 건지 감은 건지 모를 눈을 하고서 문을 열어주어야 했다.
“미안하긴 뭘. 이게 내 일인데. 그나저나 너무 일찍 가는 거 아냐?”
“아니. 지금 시간 정도가 딱 좋아. 늙은이들은 새와 같거든.”
“무슨 말이야 그게?”
“아침잠이 없다는 소리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 어린아이와 노인의 수많은 공통점 중 하나다.
고생하는 친구의 어깨를 두드려준 군터는 말을 몰고 마을 밖으로 나왔다.
군터가 늙은이라 부르는 그의 외조모는 마을에서 떨어져 나와 혼자 살고 있다. 마을 가까이에 있는 개천의 상류 부근에 자리한 조그마한 오두막이 그녀의 거처다.
군터는 말고삐를 쥐고 천천히 걸었다. 그러다 마을 입구에서 조금 떨어졌을 즈음 훌쩍 뛰어 말 위에 올랐다.
사실 굳이 말을 꺼내올 필요는 없었다. 걸어가더라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 곳이었으니까.
“이랴!”
하지만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또 말을 타고 원 없이 달릴 수 있겠는가. 말 위에서 맞는 새벽바람은 귀하다.
히히힝!
타는 목을 적시는 냉수마냥, 찬바람이 온몸을 휩쓴다. 굳어 있던 몸이 느슨하게 풀리고 온갖 잡생각으로 뒤죽박죽이던 머리가 깔끔하게 비워진다.
군터는 말이 더 달리지 못하고 헉헉 거릴 때까지 방향 없이 질주했다. 말을 타고 달리는 순간만큼은 과거에 일어나 아직까지 그의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는 온갖 고민걱정도, 지금 찾아가는 상대에 대한 안 좋은 마음들도 모두 그를 괴롭히지 못했다.
*
초라한 오두막은 겉으로 보기에도 적잖이 희한한 모습이었다.
오두막 앞에는 닭 몇 마리가 오두막 주변을 뻘뻘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어디에도 울타리나 우리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또한 이름 모를 작은 새들과 들짐승들이 자기 집 안방에 온 것 마냥 곳곳에서 자리 잡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오두막의 문 앞에 엎드려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곰 한 마리였다. 녀석의 머리 위에는 다람쥐 두 마리가 앉아 도토리를 갉아 먹고 있었다.
평화로워 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기괴하게 보이기도 하는 오두막의 전경을 군터는 무심하게 지나쳤다. 아니, 정확히는 그러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코앞까지 걸어와 멈춰 섰음에도 문 앞에 떡하니 자리 잡은 곰은 감고 있던 눈을 한 번 슬그머니 떴다 감을 뿐, 비켜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어이, 비켜.”
군터가 발로 곰의 옆구리를 툭툭 찼다. 곰은 몇 번을 움찔거리다가 결국에는 몸을 일으켜 귀찮다는 듯이 낮게 울며 옆으로 비켜 앉았다.
똑똑!
“들어가오.”
군터는 삐뚜름하게 달린 문을 한 번 두드리고는 바로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늙수레한 목소리가 그를 반겼다.
“왜 잘 자고 있는 녀석을 괴롭히느냐.”
“그냥 돌아갈 걸 그랬군. 지금이라도 늦지는 않았는데.”
“버릇없기는 여전하구나. 성격 급한 것도 그렇고.”
“할멈도 음침한 건 여전하구려.”
“늙은이가 변한다는 건 곧 죽는다는 소리지.”
“축하하오. 아직 죽을 날은 먼 것 같군.”
“흘흘흘.”
군터는 적당한 자리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짐승 가죽을 깐 의자에 허리가 굽은 노파가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검버섯이 잔뜩 핀 얼굴은 고스란히 세월을 담았지만 주름 사이로 보이는 눈은 젊은이의 그것 못지않게 밝게 빛났다.
“어제 도착했소.”
“알고 있다. 네가 오고 있다고 정령들이 바람을 타고 와 알려줬지.”
“내가 왜 이곳에 들렀는지도 알려줬소?”
“글쎄다…손자가 할미 얼굴을 보려고 온 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주름진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그에 군터는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피가 이어진 가족이고, 이 세상에 그에게 남은 유일한 혈육이건만 군터는 그의 외조모에게 그 어떤 일말의 정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껄끄럽고 미워하는 마음이 더 컸다.
“피먹이 천을 주시오.”
“…….”
노파가 말을 그쳤다. 여전히 웃고 있는 채였다.
“내가 할멈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는 부탁이오.”
“어려울 건 없다마는, 걱정되는구나.”
“걱정?”
노파가 뜨개질을 멈췄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군터 쪽을 빤히 보았다.
“하나, 둘, 셋, 넷…열? 열하나? 많기도 하구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네 주변에서 울고 있는 망령들이다. 저마다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억센 줄에 묶여 있구나. 거칠게 울고 있는 것을 보니 오래 되지 않았어. 길어야 열흘 정도?”
“망령이라고?”
군터는 꺼림칙한 표정을 하고서 어깨를 털었다. 다른 사람이 말했으면 헛소리로 치부했겠지만 그는 외조모를 알고 있었다. 비록 그녀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은 좋지 않지만 그녀의 능력은 부정하지 않는다. 그랬다면 그녀에게 부탁을 하러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금이야 하릴 없이 시간을 죽이는 노파의 모습이지만, 그녀는 한때 한 부족의 무녀였으며, 초원에서도 어느 정도 이름을 떨치던 무자(巫子)였다.
“네가 태어났을 때, 난 네게 무자로서의 재능이 있다는 것을 한 눈에 알아봤지. 숱한 귀신들이 네 주변을 맴돌았거든. 네가 사내만 아니었다면 내 너를 내 후계로 삼았을 터인데.”
“잡설은 그쯤 하지. 하고픈 말이 뭐요?”
“모든 생명은 빛이 난다. 그 중에서도 가장 빛이 나는 순간은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중요한 것이다. 정확히는 어떻게 죽느냐가 중요하지. 가족들 앞에서 편안히 눈을 감은 이는 따스한 빛을 발한다. 반대로 고통, 분노, 좌절 같은 감정을 느끼며 죽은 이는 차갑고 음습한 빛을 내게 돼.”
“그래서?”
“날붙이로 죽인 이가 편안히 잠들지는 않겠지. 너는 차가운 빛을 몇 번이고 쐬게 될 게다. 보통 사람이라면 큰 문제 될 것 없겠지. 그러나 너는 무자로서의 재능이 출중해. 좋든 싫든 미련이 남은 망령들은 너에게 이끌릴 게다. 나는 그것이 우려스럽구나.”
“내가 귀신들에게 짓눌릴 거란 말인가?”
“그보다 나을 수도, 나쁠 수도 있겠지. 초월적인 세계의 일들은 짧은 생을 사는 인간이 상상하지 못할 만큼 깊고 넓다. 그래서 내다보기가 어렵지.”
무슨 말인지 다 이해하지는 못했다. 어딘가 먼 곳을 보는 것 같이 멍한 눈을 하고 있어 더 물어보기도 껄끄러웠다. 군터는 어쩐지 몸이 으슬으슬한 것 같다고 느꼈다. 그는 찬 계절에도 추위를 잘 느끼지 못하는 체질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추위는, 통상의 것과는 달리 묘하게 오싹했다.
“그쯤 했으면 됐소. 피먹이 천. 만들어 줄 거요, 말 거요?”
“만들어주마. 어려울 것도 없고, 손자의 부탁이라니 해 줘야지.”
노파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오두막 문을 열었다. 그녀가 손짓을 하니 문 밖에서 돌아다니던 닭 한 마리가 빠르게 다가와 그녀의 어깨 위로 올라갔다.
피먹이 천.
그것은 이름 그대로 천이다. 무기에 묶어두는 일종의 장식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부족의 무녀들의 손을 거치면 신비한 능력을 지닌 주술 도구가 된다.
“알고 있겠지만, 피먹이 천은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다. 쓸 만한 주술 도구이지만 그게 전부도 아니지.”
예전의 일이다. 그 이야기를 아는 자마다 언제다 하는 말이 다를 만큼 오래 된 이야기.
한 부족의 전사와 무녀가 사랑에 빠졌다.
전사는 부족의 전쟁을 위해 매일같이 전장에 나갔고, 무녀는 부족에 남아 그의 무사를 위해 기원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제까지 없던 큰 전쟁을 앞두고 무녀는 자신의 옷깃을 찢어 신령한 짐승의 피에 적셨다. 그리고 그것을 연인의 창대에 묶었다.
그 창을 들고 나간 전사는 전장에서 큰 공을 세워 대전사가 되었고, 훗날에는 족장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용맹한 족장의 창은 그의 상징과도 같은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으며, 그와 같이 용맹해지길 꿈꾸는 많은 전사들이 그를 흉내 내어 창에 붉은 천을 달았다.
“한 사람의 전사로서의 증명이자 용맹의 상징이지.”
노파가 오두막 구석에 있는 작은 탁자 앞으로 갔다. 어깨에 올라 있던 닭이 날갯짓 해 탁자 위로 내려앉았다.
“하지만 아느냐? 본래 그것은 대상의 안위를 위한 수호의 신물이었다.”
그녀가 짧은 단도를 집었다. 그리고 닭의 목을 찔렀다. 닭은 울부짖지도 않고, 꿈틀거리지도 않았다. 다만 눈만 끔뻑거릴 뿐.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노파는 소매의 옷깃을 찢었다. 푸르스름한 옷깃이 흘러내리는 피에 닿자 순식간에 붉게 물들어갔다.
“오래지 않아 그 본 의미가 잊혀버렸지만 말이다. 그저 칼날을 더 날카롭게 만들어 적의 숨통을 쉽게 끊게 해주는,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술수가 되어버렸지.”
처음 피에 닿은 천은 흘러내리는 핏물의 색처럼 짙은 붉은 색이었다. 그러나 피를 흘리던 닭이 소리 없이 쓰러졌을 때, 그것은 처음보다 눈에 띄게 옅어져 있었다. 붉은색이었으나 별로 붉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그나저나 내가 너를 어떻게 불러야 하겠느냐? 군터? 아니면 데오락?”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군터 쪽이 더 낫겠소. 그 이름이 더 익숙하니까.”
노파가 슬며시 미소 지었다. 그리고 닭의 목을 찌른 단도로 자신의 팔목을 그었다. 또 한 번 핏물이 천에 떨어졌다. 노파의 피가 천에 닿은 순간 천에 은은한 빛이 감돌다 사라졌다. 노파는 피먹이 천을 군터에게 건넸다.
“식은 안 올렸지만, 성인식 선물이다.”
“고맙게 받겠소.”
천은 따스했다. 그리고 방금 피를 듬뿍 먹었음에도 하루 종일 말린 것처럼 말라 있었다.
“기회가 된다면…다음에 봅시다.”
“그래. 기회가 된다면.”
군터는 피먹이 천을 한 손에 쥔 채 오두막을 나섰다. 그가 나오자 문 옆에 엎드려 있던 곰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다시 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권태로움이 뚝뚝 묻어나는 곰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곰이 한 쪽 눈을 게슴츠레 하게 떴다. 마치 ‘무슨 짓거리냐?’고 묻는 듯했다.
“너도 다음에 보자. 기회가 된다면.”
무슨 헛소리냐는 듯이 곰이 하품했다. 피식 웃은 군터는 말에 올랐다.
*
군터와 로크는 마을에 이틀을 머물렀다. 첫날에는 술을 마시고 뻗어 있느라 다 보냈고, 둘째 날에는 멀쩡한 정신으로 지인들과 해후를 나누었다. 주로 마을 사람들에게 근황을 알려주고, 그들이 궁금해 하는 도시의 삶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식이었다. 마을 사람들 중에는 한평생 살마드에 가보지 못한 이들이 많았고, 설령 가봤다 한들 근 10년 내에 가본 이는 거의 없다시피 했기에 그들은 군터와 로크(주로 로크)의 이야기 하나 하나에 놀라워하고 즐거워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났다. 너무도 짧게만 느껴지는 그 시간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지나가버렸고, 이제는 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다.
“건강해라. 건강해.”
촌장 부인이 로크를 끌어안고 끝내 눈물을 보였다. 로크도 마음이 뭉클해졌는지 슬쩍 손으로 코를 훑었다. 군터는 먼저 말에 올라 있었다.
“믿을 녀석이라고는 너밖에 없구나. 못난 아들놈을 잘 부탁하마.”
“혼자서도 잘 하는 녀석입니다. 오히려 저보다도 더 낫죠.”
“자식. 도시물 좀 먹었다고 혓바닥에 기름을 둘렀느냐?”
아부를 한다고 핀잔을 주는 척하지만, 아멜은 기분이 좋은 듯 너털웃음을 흘렸다.
“자, 그럼 나중에 봅시다! 다들 죽지만 말고 있으라고요!”
“저 녀석 저거 말하는 꼬라지 하고는!”
장난 섞인 야유를 받으며, 군터와 로크는 짧은 재회를 마치고 다시 긴 이별에 들어갔다. 힘차게 내달리는 말 위에서, 둘의 얼굴엔 미묘한 감정이 잔재처럼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