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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5화 (5/1,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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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발굽이 힘껏 땅을 찍는다. 세찬 바람이 얼굴을, 머리카락을 쓸고 지나간다.

군터는 모처럼 기분 좋게 웃었다. 뒤편에서 로크가 천천히 가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 그는 못 들은 것처럼 오히려 더 강하게 말의 배를 찼다. 잘 훈련된 군마가 콧김을 씩씩 뿜으며 더 빠르게 앞으로 치고 나갔다.

“이 자식아아아! 천천히 가자니까아아! 우욱!”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그럭저럭 따라붙던 로크가 기어이 뒤처졌다. 군터는 그제야 말을 느슨하게 몰았다. 잠시 뒤 안색이 초췌해진 로크가 투덜대며 따라붙었다.

“개자식…일부러 그랬지?”

“이 정도도 못 따라 붙을 줄은 몰랐다. 허구한 날 술 퍼마시고 계집질이나 해대니까 허벅지에 살이 붙는 거 아니냐.”

“참나!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말을 탈 기회는 있냐? 솔직히 말하면 살마드에서 나올 때는 안장 위에 앉는 것도 낯설었다니까.”

로크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기병이 아닌 이상에야 일개 십인장이 말을 탈 기회는 없다고 봐도 좋다. 그나마 이렇게 고향을 내려가거나, 아니면 특별히 말을 써야 할 때나 군영에서 대여를 받을 수 있다.

“쳇.”

군터가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상쾌하던 기분이 가라앉았다.

로크의 변명은 마음에 들지 않는 현실을 상기시켰다. 군터는 말을 타는 것을 좋아하고 재주 역시 빼어났지만 기병이 될 수는 없었다. 기병은 비싸고, 그만큼의 값을 한다. 병가(兵家)에는 기병 하나가 보병 열의 몫을 한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군에서 기병이 받는 대우는 보병과 비할 바가 아니다. 졸도 그렇고, 장교도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나 뽑지 않는다. 단순히 말을 잘 탄다고 해서 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니 뒷배는커녕, 경멸받는 아쿼러즈인 군터가 기병이 되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그것은 말단 병졸에서 벗어나 십인대장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

“아직도 속이 울렁거려. 조금 전에는 진짜 쏠릴 뻔했다니까? 천천히 좀 가자고.”

“그래.”

“응?”

로크가 토끼눈을 했다. ‘네가 웬일이냐?’는 표정.

“시간은 충분하니까.”

군터는 저 멀리, 지평선 너머를 눈에 담았다. 보기만 해도 시원해지는 광경이다. 오직 말 위에서만 볼 수 있는.

“급할 것 없지. 느긋하게 가자.”

“그래! 내 말이 그 말이라고!”

여전히 초췌했지만 로크의 얼굴에도 간만에 화색이 돌았다.

“흠…….”

바람이 불어왔다. 말을 달리며 느꼈던 바람은 찾아간 것이었고, 이 바람은 스스로 불어온 것이었다. 거칠지는 않았으나 이 역시 선선하니 기분이 좋았다. 군터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하늘을 보았다. 구름 몇 점이 떠다니는 푸른 하늘이 아주 보기 좋았다.

*

비카락.

본래는 지금보다 더 먼, 서북의 땅에 있었던 마을이지만 9년 전에 지금 있는 곳으로 이주해온 마을이다. 로크의 고향이자, 군터의 고향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곳으로 가호(家戶)는 약 삼백 가량으로, 이주촌 치고는 제법 큰 규모다. 본래부터 이런 규모였던 것은 아니고, 곳곳에서 온 여러 이주민들이 모이고 모여 지금에 이른 것이다.

“드디어 도착이구만!”

로크가 한껏 기지개를 폈다. 다소 누렇게 뜬 얼굴에서는 피로가 뚝뚝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것은 군터 역시 마찬가지였다.

꼬박 나흘만이다. 본래 출발하기 전에는 사흘을 보았으나 둘째 날부터 로크가 입에서 단내를 풀풀 풍기며 죽겠다고 난리를 친 탓에 늦어지고 말았다.

“더 일찍 도착할 수도 있었지. 어디의 어떤 짐 덩어리만 아니었다면.”

“난 너랑은 달라. 너처럼 태어나자마자 말 위에 오르지 않았다고.”

바크렌의 북서쪽에는 장대하게 펼쳐진 ‘갈색 초원’이 있다. 그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제국은 ‘아쿼러즈’라고 부른다. 물론 정식 명칭이 그런 것이고, 대다수의 제국인들은 그들을 그저 초원의 야만인이라고 부른다.

바람을 따라 이동하며 말과 가축들을 기르는 유목 민족. 군터는 바로 그 아쿼러즈였다. 지금에야 군터라는 이름을 얻고 제국민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지만, 그의 뿌리는 틀림없이 갈색 초원에 있다.

그리고 그런 초원 민족답게 군터는 말과 양, 소 같은 가축들을 다루는 데 익숙했다. 특히나 기마술에 있어서는 그 스스로도 자부심을 갖고 있을 만큼 빼어났다. 두 다리로 서는 것보다 말 위에 올라 있는 것이 더 편할 지경이니 말 다한 셈이다. 그러니 로크가 연신 투덜대는 것도 괜한 엄살은 아니었다.

“여전하네.”

2년 만에 보는 마을은 기억 속의 모습 그대로였다. 완만한 언덕 위에 자리한 비카락 마을은 마을 외곽을 높은 목책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300가호가 넉넉하게 지낼 수 있을 만큼 부지가 넓었기에 모르는 이가 보면 마을이 아니라 자그마한 성채라고 생각할 만큼 겉으로 보이는 규모는 상당했다.

“그래. 저것도 여전하고.”

군터는 높다란 목책 위에서 하품을 내뱉는 이들을 보았다. 2년의 시간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익숙한 얼굴들을.

반가움, 그리고 애틋함이 무뚝뚝한 얼굴을 적신다. 어렸을 적 이 마을의 사람들을 만난 것은 그에게 있어 더 없는 행운이었다. 덕분에 군터는 아쿼러즈임에도 별 다른 어려움 없이 제국 사회에 정착할 수 있었다.

“거기 누구야!”

천천히 말을 몰아 마을 가까이에 갔을 때, 목책 위의 경비가 소리쳤다. 로크가 씩 웃으며 목소리를 키워 화답했다.

“그렇게 눈도 안 좋은 인간이 무슨 경비를 선다고!”

“으응?”

“로크요 로크! 아밀의 아들 로크가 왔다고!”

“로, 로크?”

“어여 문이나 여쇼! 먼 길을 달려오느라 피곤해 죽겠으니까!”

문이 열렸다. 목책 위를 지키던 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개중 두엇은 고래고래 소리를 치며 다녔다.

“로크가 돌아왔다!”

“이보쇼 마을 사람들! 로크가 돌아왔어요! 다들 나와 보시오!”

경비를 서던 이들과 인사를 채 다 주고받기도 전에 마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바크렌의 군인이 되어 살마드에 갔던 로크가 돌아왔다는 건 누구와 누가 싸움이 붙었다는 것보다 더 큰 소식이었다. 왜냐하면.

“로크! 이 녀석!”

한 쪽 다리를 절뚝이며 다가오는 사내. 우르르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그에게 길을 내어주며 갈라졌다.

반백의 머리에 거친 피부. 주름진 얼굴. 하지만 눈에는 젊은이 못지않은 생기가 가득한 그는 이 마을의 촌장이자 로크의 아버지인 아멜이었다.

“아버지!”

따악!

오랜만에 아버지를 보고 반갑게 달려간 로크의 머리에 대뜸 불벼락이 내렸다.

“악!”

“이 망할 놈의 자식! 편지 한 통 보내는 게 그리 어렵더냐! 응?!”

아멜은 역정을 내며 아예 로크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아이고 아버지. 나이도 자실만큼 자신 분이 왜 아직도 이렇게 정정하신 거에요?”

“뭐야! 그래서 불만이라는 거냐?! 이놈의 자식이!”

2년 만의 부자상봉을 한바탕 활극으로 마무리 한 뒤, 아멜은 뒤편에서 피식거리고 있던 군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자기 아들을 대할 때와는 정반대로, 아무 말 없이 꽉 안아 주었다.

“잘 왔다. 잘 왔어. 2년 전보다 훨씬 더 멋있어졌구나. 응? 이제 정말 사내가 다 됐어.”

“간만에 뵙습니다. 아저씨. 저라도 좀 더 자주 편지를 보냈어야 하는 건데…….”

“뭘! 네가 아니었으면 난 내 아들놈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몰랐을 거다. 애지중지 키운 막내아들놈보다 네가 훨씬 나아!”

“그건 좀 상처인데요 아버지?”

머리를 감싸 쥐고 있던 로크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따악!

다시 한 번 불벼락이 떨어졌다.

*

비카락에서 오랜만에 잔치가 열렸다. 무려 2년 만에 돌아온 촌장의 막내아들과 군터를 위한 잔치였다. 촌장 아멜은 아들을 위해 돼지 두 마리와 소 한 마리를 잡았다. 마을 사람들도 각자 가축이나 음식, 하다못해 보관하고 있던 술 한 통이라도 내어 왔다. 아멜은 누구에게도 강요하거나 심지어 운을 떼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촌장을 위해 기꺼이 발 벗고 나섰다. 아멜이 마을 사람들에게 얼마나 지지를 받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물론 도시로 상경했던 마을의 두 젊은이를 핑계로 축제를 즐기고 싶었던 마음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말이다.

“하하하하!”

“이야! 이제는 정말 꼬맹이라고 부르지도 못하겠는데?”

잔치가 열리는 아멜의 집 앞은 시장의 한복판처럼 왁자지껄했다. 커다란 모닥불 여러 개 주변으로 사람들이 편하게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고기를 뜯었다. 적당히 불콰해진 사내들은 온갖 이야기들을 나누며 낄낄대고 여인들은 그들끼리 모여앉아 수다를 떨었다.

“꺄하하하!”

“야아아! 거기 서어어!”

어른들이 풀어지니 덩달아 신난 아이들도 바쁘게 여기저기를 쏘다녔다. 평소였다면 나무라며 말릴 어른들은 아이들의 재롱을 너그럽게 지켜보았다.

“자! 마셔!”

머리통만한 나무잔에 가득 담긴 술을 기울였다. 한 번의 멈춤도 없이, 그야말로 벌컥벌컥 술을 들이켠 군터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깔끔히 비운 뒤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바로 그 뒤를 이어 아멜도 잔을 비웠다.

아멜은 그보다 먼저 잔을 비운 군터를 휘둥그레진 눈으로 보더니 이내 너털웃음을 흘렸다.

“이 녀석! 이제는 나보다도 더 잘 마시는데? 어떻게 된 거냐, 응? 살마드에서 종일 술만 퍼 마신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버지가 모르셔서 그래요. 가끔씩 한 잔 하자고 해도 어찌나 빼는지…….”

잔을 반쯤 비운 로크가 툴툴대며 말했다.

“그래서 나는 따로 숙소를 얻었고, 넌 여전히 그 돼지우리에서 뒹굴고 있지.”

“얌마. 돼지우리라고 하지 마. 듣는 돼지 기분 나쁘니까.”

군터는 로크의 말을 무시하고 안주를 씹었다.

“너도 이제 십인장씩이나 되었으니까 이제 슬슬 돈도 좀 모으고 그래야지. 집도 사고 장가도 가야 할 것 아니냐.”

아멜을 똑 닮은 사내가 히죽거리며 말했다. 로크의 맏형인 디르크였다. 아멜의 장남인 그는 장차 아버지의 촌장 자리를 이어 받기로 되어 있었다.

“십인장이라고 해봐야 별 거 없어.”

“별 게 아니기는. 네 밑으로 열 명이나 있다는 거 아냐?”

모르는 이들의 눈에는 병사 열 명을 부린다고 하면 대단해 보일 것이다. 하지만 실상 십인장은 장교도 아니다. 진짜 장교라 함은 대개 백인장부터다. 그 정도는 되어야 집 마련이니, 장가니 하는 말들을 여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살마드에서 살 것이 아니라면 상관없겠지만, 한 번 도시의 삶이라는 것에 맛을 들린 로크는 귀향에 대해서는 생각도 않고 있었다.

아멜이 입을 떼었다.

“그보다 군터. 노파께는 들른 게냐?”

“아직입니다.”

“쯔쯔. 먼저 찾아뵈어야 하는 것 아니냐? 그분과 네 사이가 그리 좋지 않은 건 알고 있다마는, 그래도 가족 아니냐.”

“예. 안 그래도 들를 생각입니다.”

“그래. 내색은 안 하시지만 하나뿐인 외손이 얼마나 보고 싶으시겠느냐.”

나름대로 생각해서 한다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래서 고깝게 듣지는 않았다. 다만 귀담아 듣지도 않았다. 아멜이 생각하는 가족이라는 틀에, 그의 외조모는 들어 있지 않았으니까.

“술이 달군요.”

“그래? 살마드에서 사 마시는 것보다 낫지? 술은 직접 담가야 제 맛이라니까!”

정말 그래서인지, 아니면 오랜만에 제대로 마시는 술이라 그런 것인지 유난히 술이 잘 들어갔다. 군터는 대작하던 아멜을 쓰러뜨리고, 시끌벅적하던 주변이 눈에 띄게 조용해질 때까지 묵묵히 잔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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