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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4화 (4/1,064)

<-- 군터 -->

“그때 이야기했던 것에 대해 생각해봤지.”

“반 년 전부터? 내가 안 오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했소?”

“공치는 거지 달리 뭐가 있겠나. 하지만 올 거라 생각했거든. 뭐…반 년 씩이나 걸릴 줄은 몰랐지만.”

“오래 기다리게 해 미안하군. 박봉이라.”

“그 점은 십분 이해하지. 말단 군졸의 봉급이야 입에 풀칠 간신히 할 정도일 테니까.”

엄밀히 말하면 졸은 아니다. 그래도 나름 십인대장으로서 바크렌의 군적(軍籍)에 정식으로 이름이 올라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걸 또 구차하게 말해 무엇 하겠는가. 봉급이 입에 풀칠이나 면할 정도인 것은 말단 병졸이나 십인장이나 그게 그거다.

“아무튼. 그때 이야기했었지. 검처럼 날카롭게 찌르고 넉넉히 벨 수도 있으며, 창처럼 멀찍이서 휘두를 수도 있는 무기. 그것에 대해 생각을 좀 해보았는데, 알아보니까 그런 무기가 있기는 있었네. 다만 쓰는 사람이 없어 사장되다시피 한 것이었지.”

“어째서?”

“다루기가 어려우니까. 한 번 보게. 이런 녀석이야.”

노인은 대장간 구석을 뒤적거리더니 큼직한 가죽 뭉치 같은 것을 가져와 폈다. 그제야 군터는 그것이 두루마리였음을 알았다.

안쪽이 깔끔하게 손질된 가죽 두루마리에는 노인이 그린 것임에 분명해 보이는 조잡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길쭉한 것이 언뜻 보기에는 창 같아 보인다. 하나 창대라고 할 만한 부분은 반, 혹은 삼분지 이 정도에 불과했다. 나머지 부분은 곧게 뻗은 검신이었다. 즉, 창대가 칼자루인 셈이다.

“검창이라고 하지. 말 그대로 검과 창을 합친 무기야. 짧게 잡아 검처럼 베고 찌를 수도 있고 길게 잡아 창처럼 내지르고 휘두를 수도 있지. 다만 문제는 다루기가 어렵고…….”

“손이 많이 가겠군.”

“맞아.”

노인이 씩 웃었다.

“아무리 좋은 재료로 잘 만든다고 해도 쉽게 상할 거거든.”

그러면서 노인은 검 두 개 정도가 통째로 들어간 것 같은 검신 부분을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짧게 잡고 쓰는 검도 날이 쉽게 상하는데, 때때로 창처럼 휘둘러대기라도 한다면야 더더욱 말할 것도 없겠지.”

즉, 대장간의 단골이 될 거라는 이야기다. 또한 박봉으로 생활고에 시달리는 말단 군인의 주머니 사정이 더욱 팍팍해질 거라는 것이고.

“망치질을 하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조금 그렇지만,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는군. 딱히 그쪽을 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급 군인이 이런 거창한 무기를 꼭 들어야 하는지도 의문이고.”

“전사에게 무구란 분신이다. 목숨이고.”

“좋은 말이군. 멋진 말이야. 그래도 역시 말단 군졸이 하기에는 낯간지러운 말인 것 같지만.”

노인이 또 다시 군졸을 운운하니 이번엔 군터의 표정이 좋지 않게 변했다.

아무리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라 해도 계속 말단이니 졸이니 하면 기분이 좋을 수는 없다. 특히 놀리듯 되풀이한다면 더더욱.

그래서 이번에는 군터의 검미가 꿈틀거렸다.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은 그는 주머니에서 은화 세 닢을 꺼내 가죽 두루마리 위에 탁! 소리가 나도록 올려두었다.

“뭐라 해도 좋소. 선수금으로 반. 나머지 반은 물건을 찾으면서 주겠소. 시일은 얼마나 걸리지?”

“넉넉잡아 열흘. 아무래도 이런 무기는 처음 만들다보니 시간이 필요해.”

“좋아. 그럼 열흘 뒤에 다시 들르지.”

“맡겨두게. 그리고 방금 말이 불쾌했다면 사과하지. 사실 조금은 흥분된 상태거든. 이런 재미있는 일감을 맡는 게 오랜만이라서 말이야.”

“흥! 돈 값만 제대로 하시오.”

퉁명스레 답하고 군터는 몸을 돌렸다.

*

군터는 대장간에서의 볼 일을 마치고서 숙소로 돌아가 짐을 꾸렸다. 그리고 짐을 다 꾸린 후에는 간단히 식사를 하며 로크가 오기를 기다렸다.

닭고기가 듬성듬성 들어있는 멀건 스프와 딱딱한 보리빵으로 식사를 하고 있는 중에 여관의 문이 열리며 로크가 들어왔다. 그는 식사를 하고 있는 군터를 발견하고 다가와 맞은편에 의자를 당기고 앉았다.

“어우! 죽겠다. 죽겠어.”

로크의 얼굴은 썩 좋지 않았다. 잠을 제대로 못 잤는지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입을 다물고 있어도 술 냄새가 풀풀 풍겼다.

“무리했군.”

“어쩌다 보니까 말이야. 아! 고맙습니다.”

“별 말씀을. 식사는?”

슬쩍 다가온 여관 주인이 물 한 잔을 건네며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쓰게 웃은 로크가 턱짓으로 군터가 먹고 있는 스프를 가리켰다.

“빵은 됐고…그럼 저걸로 하나 주시죠. 지금 속이 완전히 뒤집혀놔서.”

“알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쇼.”

여관주인이 주방 쪽으로 경쾌하게 걸어 들어갔다. 로크가 웃으며 말했다.

“장사 잘한다니까. 저 아저씨.”

“그보다, 괜찮은 거냐? 곧 죽을 얼굴을 하고 있는데.”

“괜찮아. 괜찮아. 하루 이틀 이러는 것도 아닌데 뭐. 속 좀 달래고 바람 좀 쐬다 보면 아무렇지 않아질 거야.”

군터가 혀를 찼다.

@그의 말마따나, 로크가 이렇게 술독에 빠지는 것도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구실도 다양했다. 어느 날은 기분이 좋아서, 어느 날은 부하 병사 중 누구에게 안 좋은 일이 있어서. 등등, 갖가지 일을 핑계로 술을 마셨다. 그렇게 술만 마시고 끝나면 다행이고, 더 방탕하게 노는 경우도 허다했다. 물론 로크만 그리 노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빈도 면에서 군터는 로크와 비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아직까지 돼지우리에서 뒹구는 로크와는 달리, 군터는 돈을 모아 싸구려라고 해도 숙소를 따로 얻은 것이고, 로크는 여전히 돼지우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밖에.”

“밖에?”

군터가 인상을 찡그리자 로크가 느긋하게 덧붙였다.

“부하 녀석이 지키고 있어. 인상 좀 펴라. 응?”

“지금 네가 네 꼴을 보면 그런 말 못 할 텐데 말이지.”

“그렇게 엉망이야?”

“기대 이상으로.”

“그렇군. 어우! 골 아파.”

금방이라도 탁자에 머리를 박을 것처럼 흔들대는 로크.

“뭘 그리 퍼 마신 거냐?”

“처음인 놈들이 있었잖아.”

그러면서 로크가 손가락 두 개를 폈다.

“한심하군.”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다. 그래도 한숨이 나왔다. 로크가 이끄는 십인대의 병사들 중 나이가 서른 밑인 이는 한 명도 없었다. 모두 군졸로 복무한 기간이 최소 오 년 이상이라는 뜻이다. 그런데도 제대로 된 전투 경험이 한 번도 없었다는 거다.

“뭐, 다 그렇잖아?”

근래에 들어 도적들이 도처에서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면서 구분이 없어졌다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일선에서 전투를 치르는 부대는 거의 정해져있다시피 했다. 그리고 주성 살마드에 주둔하는 치안 유지군을 비롯해, 비교적 안전한 곳에서 복무하는 부대 역시 대충 정해져 있었다. 무엇이 그 둘을 구분하는가? 잘은 모르지만, 적어도 병사나 지휘관의 능력여하와 관련 없다는 것은 분명할 것이다.

탁!

마지막 남은 스프를 통째로 들이켜 비운 군터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밖에 있을 테니까 빨리 먹고 나와라.”

“뭐가 그리 급해?”

툴툴대는 로크를 무시하고 군터는 여관 밖으로 나왔다.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병사 한 명이 고삐 두 개를 겹쳐 쥐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모이를 쪼는 닭 새끼마냥 고개를 삐걱거리던 그는 군터가 옆에 다가오고서야 황급히 몸을 세우고 군례를 취했다.

“충…!”

“됐다.”

군터는 두 마리 말 중 조금이나마 더 체구가 크고 힘이 좋아 보이는 말 앞에 섰다.

“여물은 먹였나?”

“예. 조금 전에 먹였습니다.”

병사는 제법 긴장한 것 같았다. 군터는 개의치 않고 말을 살피는 데 열중했다.

‘괜찮군.’

말의 구석구석을 꼼꼼하게 본 군터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의 체구가 범인(凡人)보다 월등히 크고 무겁다보니 그를 태웠던 말들이 오래 달리지 못하고 금방 퍼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런데 다행히 이 말은 제법 튼튼했다. 이 정도라면 안심하고 다녀올 수 있으리라.

“요 며칠 동안 잘 부탁한다.”

몇 발자국 떨어져 있던 병사는 조금 놀랐다. 그는 군터가 저렇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것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는 고향 친구라던 그의 대장과 이야기를 할 때조차도. 뿐만 아니라 군터는 말의 콧잔등에 가볍게 입을 가져다대기도 했다. 말도 기분이 좋았는지 히힝 하고 울며 군터의 가슴팍에 머리를 비볐다.

‘허! 참. 별 신기한 걸 다 보네. 하긴, 초원의 야만인 놈들은 어미 젖 대신 말 젖을 먹고 자란다던가?’

군터 십인대의 병사들이 저 모습을 본다면 저마다 크게 놀라 볼을 꼬집을 것이다. 그리고 찌릿하게 아리는 볼을 부여잡으며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한 번 더 놀라겠지.

‘사람 대하는 태도하고 짐승 대하는 태도가 저리 다르단 말인가. 완전히 다른 사람 같구만.’

병사가 소리 없이 혀를 찼다.

*

“젠장!”

사람이 한창 많은 시간대였지만 주점은 한산했다. 그것은 이곳이 외진 곳에 있는 싸구려 주점이란 것과는 무관했다. 냄새 나는 똥에도 똥파리가 꼬이듯, 후진 곳은 후진 곳 나름대로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이들이 찾기 마련이니까.

지금 주점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사나운 사내들. 그들이 바로 이 불황 아닌 불황의 원흉이었다.

“개 같은 야만인 새끼 같으니! 그저 저만 잘 되면 된다 이거지?”

그들은 군터 십인대의 병사들이었다. 군터가 적선하듯 내어준 돈 몇 푼에 그들의 사비를 보태어 술판을 벌이고 있는 것이었다.

“싸움질 좀 잘 하면 단가? 지가 그렇게 칼질을 잘하면 지 고향에서 사냥질이나 할 것이지 말이야. 군인이면 군인답게, 상관이면 상관답게 굴어야 할 것 아니야? 앙?!”

“맞네. 맞아. 어린노무 새끼가 아주 되바라졌어.”

박봉의 졸병들답게 그들의 술판에는 안주가 드물었다. 대신 술은 많았고, 그들은 그 많은 술을 들이키면서 안주로 그들의 상관을 씹어댔다.

“빌어먹을! 젠크 대장님이 계실 때가 그립구만. 아니 세상에! 야만인 놈이 십인장이라니! 운 좋게 공 한 번 세웠다고 말이야!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제국인인 우리가 야만인 놈, 그것도 새파랗게 어린 놈 밑에서 발발 기어야 하냐고!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안 그런가?”

“맞네. 맞아.”

가장 열심히 목소리를 높이는 그는 십인대의 병사들 중 가장 경력이 오래 쌓인 이였다. 이전 십인대장이었던 젠크가 전역을 한다고 했을 때, 십인대의 병사들은 내심 그가 대장이 될 줄로만 알았다. 그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웬걸? 그의 것이 되어야 했던 자리를 턱하니 차지한 것은 웬 듣도 보도 못한 야만인 놈이었다.

“큰일이야. 큰일.”

글줄깨나 읽었다는 이들이 시국을 한탄하는 것과 비슷하게, 그들은 “큰일이야.”라는 말을 말끝마다 반복했다.

기실 큰일은 큰일이었다. 왜냐하면, 군터가 십인대장이 된 이후로 그들의 주머니가 영 풍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임무를 수행하면서 알음알음 챙기던 술값이 그들에게는 삶의 낙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새파랗게 어린 대장이 머리 위에 앉은 후로는 바로 그 삶의 낙이 사라져버렸다.

이번 징발 임무만 해도 그랬다. 징발을 나갔던 그 마을에서도 술값을 벌려면 얼마든지 벌 수 있었다. 징발 대상에서 빼주는 대신 얼마라도 그들에게서 성의 표시를 받는다던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아니, 사실 그건 그렇다 칠 수 있다. 절정은 마적 퇴치 건이었다.

“그저 자기 배만 부르면 그만이다 이거야. 부하들이야 입에 풀칠을 하든 말든, 저만 공 쌓고 높은 지위로 올라가면 그만이라 이거지! 천박한 야만인 새끼 같으니!”

수십의 마적떼를 섬멸한 것은 큰 공이다. 노획한 전리품만 해도 상당했다. 몰랐다면 모를까, 그것을 그 자리에서 눈으로 직접 보았으니 배가 안 아플 수가 없다. 사실 그들은 마적들과 칼싸움은커녕 눈싸움도 벌인 적이 없었지만 이미 술이 된 그들에게 그런 것은 중요치 않았다. 그들은 마적들이 죽어 누웠던 그 자리에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달달한 과실에 지분을 주장하기에는 충분했다. 적어도 그들은 그리 믿어 의심치 않았다.

“개새끼! 그래, 내 그 새끼가 얼마나 잘 처먹고 잘 사는지 두고 보겠어! 젠장!”

결국 원색적인 욕까지 나왔다. 뒤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주인과는 상관없이, 술판은 점점 더 시끄러워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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