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터 -->
살마드에 도착했을 때, 로크와 군터는 개선장군마냥 어깨를 피고 성문으로 들어섰다. 마적들을 섬멸하고 노획한 말 다섯 필. 그리고 수급 이십 여 개가 든 붉은 주머니들. 거기에 더해 자루 속에서 시끄럽게 절그럭거리는 병장기들까지. 그 화려한 전리품들은 자신감에 불을 지피는 장작과 같았다.
성문을 지날 때, 수문병들은 전리품과 함께 들어서는 일행을 보며 부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그들은 어떻게 저 목을 베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 않았다. 그저 공적으로 바뀔 머리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군터와 로크는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담당관을 찾아갔다. 그리고 마을에서 징발한 장정들을 인계했다.
“왜 이것밖에 안 돼?”
담당관은 장정들의 수를 보곤 군터와 로크를 추궁했다. 그러나 장부를 흔들어대며 추궁을 하면서도 딱히 진지해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짜증을 숨기지 않았다.
“들은 것과는 너무 다르더군요. 그나마 이게 그 마을에 있는 장정이란 장정들은 다 싹싹 긁어온 겁니다.”
로크가 말했다.
“젠장. 이번에도인가? 빌어먹을 놈들이 일을 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담당관이 장부를 들추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장부는 얼마나 넘겨댔는지 닳고 닳은 천 조각마냥 너덜너덜했다. 그러고 보니 담당관의 얼굴에 며칠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주름과 그늘이 보였다. 아마도 그가 신경질적으로 넘기고 있는 장부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금방이라도 장부를 찢어버릴 기세인 담당관에게 군례를 올리고 나온 군터와 로크는 이번엔 그들의 상관, 백인대장 토프락을 찾아갔다. 그들은 담당관이 내준 수령확인 서류를 내밀며 임무를 마쳤음을 알렸다. 또한 돌아오던 중에 도적들과 교전한 것, 그리고 도적들을 격퇴하고 얻은 전리품에 대해서도 숨김없이 이야기했다.
“비루먹은 도적놈들이 여기저기서 설쳐대는구만. 세상이 어찌 되려고 그러는지…….”
웃는 건지 찌푸린 건지 헷갈리는 얼굴을 하고서 토프락이 혀를 찼다. 그는 군터와 로크를 보고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나저나 또 공을 세우는군. 대단해. 내가 너희 나이였을 때는 뭘 하고 있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말이야.”
토프락은 그 뒤로도 죄다 비슷비슷한 치사(致詞)를 이었다. 얼마간 겸양하면서 적절히 맞장구를 치던 로크가 은근슬쩍 주제를 돌렸다.
“대장님. 이번에 마적 놈들과 한바탕 하면서 저희 애들이 좀 상했습니다.”
“아아. 그런가. 그래도 다행히 죽은 녀석은 없다면서?”
“원신께서 보우하신 게지요. 그래서 말입니다만, 이참에 보살펴주신 신께 공양도 하고, 고향에도 좀 다녀올 수 있게끔…….”
은근히 목소리를 깔며 본론으로 들어가는 로크. 군터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처럼 몇 발자국 떨어져 로크의 ‘작업’을 멀뚱히 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가 끼어들지 않는 것이 도와주는 것이란 걸 다년간의 경험으로 절실히 깨달은 군터였다. 굳이 출신 문제가 아니더라도 입을 놀리는 일은 로크의 몫이다. 그는 그저 친구에게 얹혀가기만 하면 된다.
과연 매끄럽기 그지없는 로크의 혓바닥은 이번에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토프락은 껄껄 웃으며 며칠간의 휴가와 부하들에게 술 사 먹일 수 있을 정도의 포상금을 약속했다.
당연하게도, 그런 보상은 그들이 기대했던 것에 못 미치는 수준이었으며, 세운 공적에 마땅한 수준은 더더욱 아니었다.
“약아빠진 인간. 뭐 하나 제대로 해주지도 않을 거면서 주저리주저리 말만 많군.”
이야기를 마치고 나오는 길. 조금 전 토프락의 앞에서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처럼 굴던 로크는 태세를 전환하여 신나게 토프락을 씹어댔다.
“…….”
“에휴. 그래도 이게 어디냐. 간만에 목 좀 축이겠다. 그치?”
그러면서 자그마한 주머니를 흔드는 로크. 주머니의 크기만큼이나 안에서 들리는 소리도 초라했다. 술 한 잔 할 돈을 이야기했더니 정말 딱 한 잔만 하면 동이 날만큼만 넣어준 모양이다.
“자린고비 같은 영감탱이.”
전리품으로 거둔 말이 다섯 필. 질은 별로라지만 어쨌든 쓸 수 있는 칼과 도끼 등이 열아홉 자루다. 그런데도 토프락은 쓸모없는 말 몇 마디와 생색내듯이 준 휴가 며칠, 소소하게 술자리 한 번 가지면 동이 날 쥐꼬리만 한 포상금으로 그 모든 것을 날름 삼켰다. 물론, 그마저도 로크의 알랑방귀가 아니었다면 턱도 없었으리라.
군터는 쓰게 웃으며 로크의 투정을 묵묵히 들어주었다.
*
토프락에게서 받은 포상금은 정확히 반으로 나누었다. 군터는 그 중 일부를 떼어 부하들에게 주며 알아서 목을 축이라고 하곤 숙소로 돌아왔다.
“오셨습니까.”
가게를 쓸던 여관 주인이 웃음 띠며 살갑게 맞아주었다. 장기투숙 손님에 대한 주인의 따스한 마음이 인사 한 마디에서부터 뚜렷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한편으로, 군터는 그의 시선 깊숙한 곳에 자리한 경멸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모르는 체 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식사를 하고 싶군. 늘 먹던 걸로.”
“예. 먼저 씻으실 겁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계단을 올랐다. 원체 체구가 큰 군터이다보니 그가 한 걸음 오를 때마다 계단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거 언제 한 번 손을 보기는 봐야 하는데 말이죠. 하하.”
괜히 무안해진 주인이 어색하게 웃으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천천히 씻고 나올 때쯤이면 식사가 준비되어 있으리라.
끼익!
군터의 방은 작고 추레했다. 그의 방은 이 여관에서 가장 싼 방이었다. 그래도 전에 살던 군영에 비하면 이곳은 부호의 저택이나 마찬가지였다. 발 디딜 구석은 거의 없다싶은 수준이지만, 어쨌거나 몸을 누일 침대라도 있는 게 어딘가. 군영에서 생활할 때는 이 방만한 공간에서 대여섯이 서로의 체취를 맡으며 돼지새끼처럼 부둥켜 지내야만 했다.
삐걱!
군터는 비명을 지르는 침대에 걸터앉아 품속에서 꺼낸 주머니를 풀었다. 거기에는 그가 모아두었던 돈이 모두 들어있었다. 말단 병졸로 지낼 때는 저축하기도 빠듯했지만 십인장이 되고 난 후에는 이렇게 따로 숙소를 잡고도 제법 여유롭게 돈을 모을 수 있었다.
‘은화 여섯 닢이라.’
구리 동전도 수십 개 있었지만 그건 비상금으로 둬야 한다. 그러므로 당장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은화 여섯 닢 정도.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온종일 무표정하거나, 찡그리기만 했던 얼굴에 처음으로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
다음날 아침. 간단히 조식을 해결한 군터는 가벼운 차림으로 여관을 나섰다.
그가 향한 곳은 살마드 외성(外城)의 서문대로(西門大路)였다.
“쌉니다! 싸요!”
“저 멀리 산남(山南)에서 건너온 귀물들이 잔뜩 있습니다! 보고 가세요!”
서문대로의 한편에 들어선 상가구(商街區)는 팔려는 사람과 사려는 사람, 혹은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오늘도 아침 일찍부터 북적였다. 그나마 아직 새벽의 찬 공기가 가시기도 전이라 이 정도지, 해가 하늘 높이 걸리는 시간대가 되면 이보다 더 시끌벅적해지리라.
군터는 소란스러운 거리를 지나쳤다. 그렇게 그가 찾은 곳은 상가구의 끄트머리, 사람들의 발길이 비교적 뜸한 골목이었다. 이곳을 이용하는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장가구(匠家區)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땅! 땅!
쇠를 두들기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꽤나 시끄러웠는데도 가게 입구에 앉은 사내는 꾸벅꾸벅 잘도 졸았다. 가까이 가자 미세하게 술 냄새가 나는 것이 어제 거하게 걸친 모양이었다.
“이봐.”
“흡! 어서옵쇼! 찾는 물건 있으십…….”
어깨를 툭 건드리자 벌떡 몸을 세우는 사내. 그는 군터를 보고는 허겁지겁 소매로 입을 훔쳤다.
“날 기억하나?”
“그러믄입쇼. 기억 하고말고요.”
빈 말이 아니었다. 사내는 꽤 오래 전에 방문했던 군터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직장의 특성상 거친 사내들을 많이 볼 수밖에 없는 곳에서 몇 년을 일했음에도 군터와 같이 독특한 자는 몇 보지 못했었으니까 말이다.
‘거 참. 내가 쫄보 새끼는 아닌데 말이지.’
쫄보는커녕, 오히려 간이 큰 편에 속하는 그였다. 날 때도 겁쟁이로 나지는 않았고, 어느 정도 머리가 굵어지고부터는 가업을 도우며 온갖 사나운 사내들과 얼굴을 맞대고 흥정을 벌였다. 그러면서 그의 간은 점차 남부럽지 않게 부풀었다.
그런데 왜일까. 이 젊은 군인을 처음 봤을 때, 그는 수동적으로 묻는 말에만 공손하게 답할 수박에 없었다. 평소의 그였다면 뭐라도 하나 더 팔기 위해서 온갖 말장난을 다 쳤을 터인데 말이다.
제법 당당한 체구라는 소리를 듣는 그에 비해서도 머리 하나는 더 큰 키와 그만큼 떡 벌어진 몸? 물론 이제껏 본 사내들 중 손에 꼽을 정도의 거구이지만 단순히 몸뚱이가 크다고 해서 밀릴 그가 아니다. 그렇다고 얼굴이 사람 수백 명은 썰었을 것처럼 험악한 것도 아니고.
‘모르겠단 말이지.’
“노인장은. 안에 있나?”
“예. 곧 끝나실 겁니다. 어떻게, 물이라도 한 잔 드릴깝쇼?”
생각하는 와중에도 입은 자동적으로 말을 뱉었다. 고개를 끄덕인 군터가 의자에 앉자 그는 부리나케 물을 떠 왔다.
“그나저나…오랜만이십니다. 얼마 만에 오신 거죠? 그러니까…….”
“반 년.”
군터가 짤막히 답했다. 사내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 그렇죠. 반 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하하하.”
‘그나저나 나이도 어린 것 같은 놈이 반말을 찍찍 뱉어대고 지랄이야? 아쿼러즈 새끼라서 그런가.’
속에서 슬쩍 분기가 일었지만 순화해서라도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반 년 전보다는 한결 낫지만, 그래도 여전히 뭔지 모를 부담스러움이 그를 내리눌렀기 때문이다.
그래도 장사치로서의 본분을 소홀히 하지 않고 억지로 주제를 짜내가며 시간을 죽이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망치질 소리가 멈추고 땀으로 흠뻑 젖은 노인이 안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아버지. 손님입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반 년 전에 오셨던…….”
“기억한다.”
노인이 말했다.
“내가 오늘 내일 할 만큼 나이를 먹은 것도 아닌데, 저렇게 특이한 자를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지.”
그러면서 그는 군터와 눈을 맞췄다.
“오랜만이구만 애송이 군인 양반. 그래, 돈은 가져 오셨나?”
그에 군터가 품속에서 주머니를 꺼내 흔들었다. 안에서 은화들이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충분할 만큼.”
군터가 씩 웃었다.
“그러니 만들어주시오. 반 년 사이에 손아귀에 힘이 빠진 것은 아니겠지?”
“흥. 앞으로 10년은 끄떡없지.”
노인이 코웃음 치며 주머니를 낚아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