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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1화 (1/1,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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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오후부터 부슬부슬 내리던 비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그쳤다. 하지만 어느 순간인가부터 깔리기 시작하던 옅은 안개는 아침을 지나 낮 시간이 될 때까지도 여전히 걷히지 않았다. 덕분에 꾸준하게 나아가는 발걸음은 영 지지부진했다.

“젠장. 날씨 한 번 끝내주는군.”

뒤쪽에서 희미하게 들려온, 짜증이 듬뿍 섞인 투덜거림.

군터의 미간에 굵직한 주름이 잡힌다. 그가 소리가 들려온 뒤쪽으로 몸을 돌리려는 찰나, 로크의 손이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왜?”

“그냥 놔둬. 안 그래도 숨넘어가려고 하는데.”

직후에 들려온 “헉!” 소리를 이름이다. 지금쯤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던 병사는 숨을 죽인 채 앞쪽을 살피며 불안해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다그친다고 해봐야 나아질 것도 없고.”

“흥.”

군터는 못마땅하게 코웃음 치면서도 로크의 말을 수긍하며 따랐다.

사실 불평이 나올 만도 하다. 며칠 동안 쌓인 피로와 어제 종일 맞은 비 등, 오히려 욕이 안 나오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당장에 그조차도 온몸에 진흙이 달라붙은 것 같은 감각이 썩 유쾌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걸 입 밖에 내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힘든 건 모두가 마찬가지다. 저런 투정은 주변 사람을 힘 빠지게만 할 뿐이다. 그는 투덜이는 딱 질색이었다.

군터는 발걸음을 옮기다 슬쩍 뒤를 살폈다. 그리고 표정을 구겼다.

‘한심한 놈들.’

입을 연 녀석도 그렇지만, 나머지 녀석들도 별 다를 바 없었다. 그의 휘하, 군터 십인대의 병사들은 하나같이 우거지상을 하고서 조그맣게 툴툴대고 있다. 반면 그 옆에 로크 십인대의 병사들은 비슷한 얼굴을 하고서도 입은 꾹 다문 채 묵묵히 걸음을 옭기고 있다. 너무도 비교되는 모습이다. 그들을 이끄는 십인대의 장으로서 부끄럽지 않을 수 없다.

보고 있자니 울화만 치밀었다. 군터는 시선을 거두고 다시 칙칙한 안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짙은 안개는 가시거리를 극단적으로 제한했다. 스물이 넘는 인원이 움직이니 들짐승을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 해도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기에 행군 속도는 평소의 반도 낼 수 없었다.

‘너무 쉽게 생각했던 건가.’

사전에 길을 충분히 숙지했다고 생각했건만 이렇게 지독할 정도로 안개가 깔려버리니 죄다 무소용이다. 답답한 것은 옆의 로크도 마찬가지였는지 서너 걸음마다 손에 든 지도를 한번 씩 확인하고 있었다. 물론 그런다고 갑자기 주변이 훤해진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거, 금방 걷히지는 않겠지?”

로크가 물었다. 자신감 없는 목소리다.

군터는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에 로크는 짤막히 한숨을 내쉬었다.

“미치겠군.”

“저…대장님. 차라리 안개가 걷힐 때까지 기다렸다 움직이는 건 어떻습니까? 애들도 많이 지쳤으니 휴식도 취할 겸해서 말입니다.”

로크 휘하의 선임병이 다가와 말했다. 그의 나이는 로크의 두 배에 가까웠지만 어린 상관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제법 깍듯했다.

“그건 안 돼.”

로크가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군터가 먼저 잘라 말했다.

병사의 말처럼 일단 안개가 걷힐 때까지 기다리면서 지친 몸에 휴식을 주는 것이 사실은 가장 좋은 방법이다. 다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다. 그들의 일정은 그리 여유를 부릴 정도로 넉넉하지 않다. 안 그래도 비 때문에 발길이 늦춰진 상황이었는데 여기서 더 지체한다면 기일을 넘기고 말 것이다.

“계속 간다. 그러다보면 뭐라도 보이겠지.”

군터가 말했다.

로크는 신경질적으로 지도를 구겼다.

“아무래도 원신(源神)께서 영 기분이 안 좋으신가봐.”

“…….”

“비를 내릴 거면 차라리 핑계라도 대게끔 아예 옴짝달싹 못할 정도로 왕창 내리시던가. 누구 엿 먹이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실없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주변이나 잘 살펴.”

“오래 전부터 그러고 있었거든? 전혀 소용없다는 게 문제지.”

로크는 그렇게 툴툴대면서 자신들을 이곳으로 보낸 ‘윗대가리들’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고매하신 윗대가리들은 그들을 생판 모르는 동네로 보내면서도 길잡이 하나 붙여주지 않았다. 내준 거라고는 언제 만들어진 건지도 모를, 정확도가 심히 의심되는 지도 한 장뿐. 그들은 그렇게 말 한 마디 없는 불친절하고 추레한 안내자에게 기대어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군터는 선두에서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이제 지도는 그의 손에 있었다. 가만 뒀다가는 로크가 아주 꼬깃꼬깃 구겨서 내팽개쳐버릴 것 같았기 때문에 뺏다시피 해서 쥐었다.

안개 속을 거니는 것은 불쾌하고, 그 이상으로 꺼림칙했다. 똑바로 앞을 향해 걷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빙빙 돌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 시선을 최대한 멀리 둔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렇게 목표로 둔 것이 올바른 이정표라고 확신하지 못하면, 그렇게 옮기는 발걸음마저도 머뭇거리게 된다.

얼마간 군터는 홀로 선두에서 일행을 이끌었다. 제대로 가고 있다는 확신은 전혀 없었으나 걸음걸이만은 자신감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점점 어깨가 처지던 병사들도 다시 힘을 내어 뒤를 따랐다.

“바람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너머, 자욱한 안개 사이로 시커먼 형체가 보였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진득하게 머물러 있던 안개를 흐트러뜨린 것이다.

“아…드디어! 슬슬 다리에 힘이 빠지려고 했는데 말이야.”

로크가 능청스럽게 말했다. 조금 전까지 죽상이던 모습은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이 안개를 밀어낼 때마다 가려져 있던 바위산이 드러났다. 여기저기 송곳처럼 뾰족하게 튀어나온 봉우리가 흉물스러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어떤 알록달록한 풍경보다도 더 멋지고 아름다워 보였다.

“다, 다 온 겁니까?”

얼마 전 우는 소리를 했던 선임병이 물었다.

“아마도?”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여주길 기대했던지, 숨죽이고 있던 병사들의 얼굴이 요상하게 변했다. 그러나 곧이어 장난스런 웃음을 띤 로크를 보고는 탄식 같은 환호를 내질렀다.

“…….”

한편, 뒤에서 소란이 이는 동안 군터는 지도를 확인했다. 형편없는 지도에 분명하게 표시된 바위산과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목적지.

‘점심 무렵에는 도착하겠군.’

군터는 지도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무심한 눈길이 위로 향했다. 먹구름이 잔뜩 깔린 하늘은 또 한 번 빗방울을 쏟아낼 것처럼 여전히 어두컴컴하기만 했다.

*

조용하던 마을에 때 아닌 소란이 일었다. 군복을 입고 무장한 병사들이 마을 입구에 나타난 정오 무렵부터였다. 진흙투성이의 군홧발이 마을 입구에 발자국을 남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 여기저기에서 애절한 고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이고 나리들! 살려주십시오! 젊은이들을 죄다 끌고 가버리시면 농사는 누가 지으며, 남은 가족들은 누가 먹여 살립니까요!”

“아 글쎄 우리도 성주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뿐이라니까! 성주님의 명령을 거역하면 어찌 되는지는 잘 알잖소? 땅에 씨 뿌리기도 전에 목이 잘리고 싶소?”

자식을 보내지 않으려는 가족들과 인상을 찌푸린 병사들의 실랑이는 마을 곳곳에서 일어났다. 하루아침에 자식을, 남편을, 아버지를 빼앗기게 된 이들. 개중에는 체념한 듯 고개를 숙이는 이들도 있는가하면 눈을 부릅뜨고 덤벼드는 이들도 있었다.

“안 된다! 안 된다고 했잖느냐 이놈들아!”

“이 영감탱이가 근데……!”

한 노파가 농사를 지을 때 쓰는 갈퀴를 들고 와 언성을 높였다. 딴에는 필사적으로 대항한다고 한 것이겠지만 늙은 여인의 행동은 병사의 화만 돋우고 말았다. 병사는 거칠게 노파를 뿌리치고 엎어진 그를 걷어찼다.

“어윽!”

“어머니!”

끌려가던 청년 하나가 병사들을 뿌리치고 뛰쳐나갔다. 노파는 그를 붙드는 아들에게 대답도 못하고 신음만 흘렸다.

“이 새끼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청년이 벌떡 일어나 병사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평생 농사만 짓던 무지렁이가 훈련 받은 병사의 상대가 될 리 만무하다. 병사는 코웃음 치며 노인에게 그랬듯 손쉽게 청년을 내동댕이쳤다. 억센 힘에 밀린 청년은 밑동이 베인 나무마냥 뻣뻣하게 굳어 쓰러졌다. 꿈틀대던 노인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쓰러진 아들을 향해 엉금엉금 기어갔다. 주름진 눈가에서 굵은 눈물이 흘렀다.

“가뜩이나 열 뻗치는데 이것들이 쌍으로 지랄이네. 내가 우스워? 좋게 이야기하면 들어 처먹어야 할 것 아니야!”

병사가 신경질적으로 발을 치켜들었다.

턱!

그때 억센 손이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앞으로 튀어나가려던 병사의 몸이 거짓말처럼 덜컥 멈췄다.

“어떤 자식이야!”

병사가 성을 내며 어깨를 털어 손을 뿌리치려 했다. 그러나 큼직하고 거친 손은 떨어지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어깨를 으스러뜨릴 것처럼 강하게 조였다. 병사가 짤막한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굳어졌다. 군터가 얼음장처럼 차가운 얼굴을 하고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 대장니…….”

병사는 짤막한 단어 하나 끝맺지 못했다. 그를 잡아먹을 듯 사납게 치뜬 눈을 마주하니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는 즉각 고개를 숙였다. 그는 찬바람 앞에 벌거벗겨진 것 마냥 덜덜 떨었다.

“더럽기 그지없군. 지금 네 모습을 보고, 누가 너를 바크렌의 정규병이라 생각할까.”

어깨를 조여 오는 힘이 점점 더 강해졌다. 병사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어깨뼈가 으스러지는 것 같은 고통이었다. 반쯤 무릎이 접히고 비명이 목구멍에서 들끓었다.

“끄으윽! 그, 그게 아니라…….”

군터가 병사를 거칠게 밀어냈다. 반쯤 내동댕이쳐진 병사는 고통이 이는 어깨를 부여잡고 겁에 질린 눈을 내리 깔았다.

“한 번만 더 추한 꼴을 보인다면 그때는 가만 두지 않겠다. 다른 녀석들에게도 전하도록.”

“옙!”

병사가 도망치듯 물러났다.

“…….”

군터는 얼굴을 바꾸고 몸을 낮췄다. 노파는 아들에게 기어가던 도중 힘이 다했는지 멈춰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노파의 가뭄에 시달린 땅처럼 푸석푸석한 백발과 주름진 얼굴에서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그 추레한 세월의 흔적에서 군터는 다른 이를 보았다. 오래 전부터 기억 속에서 같은 얼굴로 머물러 있는 한 여인. 그 여인이 아직까지 살아있어 나이를 먹었다면 아마도 저 노파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싶은.

“미안하오 노인장.”

노파의 주름진 눈은 일그러져 있었다.

비통, 분노. 자식을 빼앗기는 부모의 마음이 어떨지 짐작도 할 수 없었으니, 그저 한 마디 사과 외에 해줄 것은 없었다.

퉷!

노파가 침을 뱉었다. 그것은 군터의 얼굴에 닿지도 못하고 중간에 힘없이 떨어졌다. 걸쭉한 가래침을 보고 쓰게 웃은 군터가 자리를 털며 일어났다. 그리고 자리를 벗어나 멀찍이 떨어진 나무 등치 쪽으로 가 앉았다. 그 옆에는 로크가 일찌감치 그늘진 곳에 자리 잡은 채 쉬고 있었다.

“마음 따뜻한 군터 씨 아니신가.”

“농담할 기분 아닌데.”

“어이쿠 무서워라. 그러시다면야 입 꾹 다물고 있습죠.”

로크가 장난스럽게 몸을 움츠렸다. 군터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조금 전 노파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뭐가?”

“처음 군인이 되려고 마음먹었을 때는, 그저 시키는 대로 싸움만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지.”

적과 싸워 나라를 지키는 자들. 군인이란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에 와서 보면 참 순진한 생각이었다.

“그래서 후회해?”

후회?

“아니.”

원치 않게 더러운 일을 하고 있다 보니 잠깐, 그리고 약간 감상에 젖었을 뿐이다. 후회라니? 그건 너무 나갔다. 애초에 마을에서 가축을 돌보거나 농사를 지을 체질은 아니었으니까.

다만.

“조금은 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런다고 뭐가 달라졌겠어? 더럽고 치사해도, 어차피 억울하면 출세할 수밖에 없는 거야.”

“흐. 그래. 그것도 그렇지.”

잠시 대화가 끊겼다. 군터는 표정 없이 하늘만 보고 있었고, 로크는 이름 모를 가늘고 기다란 풀을 질겅질겅 씹으며 무료함을 달랬다.

“퉷! 몇 명이랬지?”

로크가 물었다. 달갑지 않은 화제로의 전환이다.

“서른.”

“턱도 없을 것 같지 않아? 아까 보니 죄다 늙은이들밖에 없던데.”

15세부터 30세까지의 젊은 사내 30명. 일단 명령은 그렇게 받았는데 막상 마을에 도착하고서 그 명령이 얼마나 현실성 없는 것이었는지 단번에 깨달았다. 못해도 300명은 넘을 거라던 마을 인구는 300명은커녕 그 반도 간당간당해 보였고, 심지어 그 인원 가운데 태반이 노인들이었다. 아마 관리가 쥐고 흔들었던 장부란 것은 최소 10년 이상은 갱신이 되지 않은 옛것임에 분명했다. 그렇다는 것은 이 마을에 부과된 조세 역시 촌장이라는 노인의 말마따나 현실성 없는 것일 확률이 높다는 것이고.

“이거 덤터기 쓰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대충 맞춰 가면 되겠지.”

“그렇겠지? 한 반 정도만 채워 가면 되지 않을까?”

“아마도.”

문제는 그 반을 맞추는 것도 쉽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다. 반이라고 해도 15명. 이러다간 머리가 희고 허리가 굽은 노인들이나 솜털이 채 가시지도 않은 어린 애들도 끌고 가야 할 판이었다.

“성주께서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모르겠군.”

“말조심해.”

로크가 기겁을 하며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병사들은 혹 숨어있을지 모를 젊은이들을 찾기 위해 아직 마을 곳곳을 뒤지고 있었다.

“흥! 겁도 많군. 뭐 어떠냐. 살마드에 있을 때도 그림자도 못 봤던 양반을 여기서 좀 씹는다고 무슨 큰일이 생기겠어?”

“조심해. 조심하라고. 너처럼 생각했던 관리 셋이 혀가 잘리고 눈이 뽑혔다. 몰라?”

얼마 전 술자리에서 성주의 실정을 비판하던 관리들이 누군가의 밀고로 화를 당한 일은 살마드 내에서 너무도 널리 퍼져 이제는 시시한 이야깃거리도 되지 못했다. 그들은 자던 중에 성주의 앞에 끌려갔다. 보는 눈이 없다 하여 두 눈이 뽑히고, 참람한 말을 지껄인다 하여 혀가 잘려나갔다. 그리고는 빛 한 점 들지 않는 노역장으로 끌려갔다던가.

“용감한 것과 멍청한 것은 다르다고. 그 정도는 알잖아?”

“글쎄.”

“진짜야. 조심 좀 하라니까. 네가 기분대로 말을 막 뱉어댈 때마다 내 수명이 줄어드는 기분이야 정말.”

“걱정 마라. 너랑 있으니 이런 이야기도 하는 거지. 다른 사람 앞에서는 입 꾹 다물고 있으니까.”

“그래. 고맙다. 근데 이왕이면 나랑 있을 때도 그런 소리는 하지 않아줬으면 좋겠는데.”

군터가 피식 웃었다.

저 하늘마냥 우중충하던 기분이 몇 마디 나누며 조금 풀어진 것도 같았다.

“다 끝났나 보군.”

“아, 그래. 이 자식들이 느려 터져가지고.”

십여 명의 청년들이 그 배는 되는 병사들에게 싸여 오고 있는 게 보였다. 개중 몇은 반항이라도 했던 것인지 얼굴이 푸르스름하게 부어 있었다.

선두의 선임병이 다가와 보고했다.

“모두 열 세 명입니다.”

보고를 하는 선임병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 역시 그들에게 주어진 할당 인원수가 얼마인지 알고 있었다. 그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인원으로는 돌아가서 문책을 당할 게 뻔했다.

“곤란하군. 반도 안 되잖아.”

“어떻게…아쉬운 대로 일단 채울까요?”

나이를 더 먹은 중늙은이나 덜 먹은 어린 아이들로 채워 넣을까 하는 물음이다. 로크는 답답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그 은근한 물음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짓까지 할 수는 없다. 그냥 한 번 깨지고 말지. 가자.”

역병이라도 돈 것처럼 죽은 듯 가라앉아 있는 마을을 뒤로 하고 그들은 귀로에 올랐다.

두런두런 말을 주고받으며 가끔씩 농담 따먹기도 하는 병사들과는 대조적으로 징발당한 청년들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마냥 축 늘어져 힘이 없었다. 하기야, 어느 날 갑자기 강제로 고향 마을에서 떠나게 되고, 죄인마냥 병사들에 둘러싸여 끌려가고 있으면 누구라도 그렇지 않겠는가마는.

*

그렇게 마을을 떠난 지 하루가 흘렀다.

간단히 아침 식사를 마친 행렬이 울퉁불퉁한 언덕길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응?”

문득 군터가 멈춰 섰다.

“왜? 무슨 일이야?”

로크의 물음에 군터는 대답 대신 대뜸 납작 엎드리더니 땅에 귀를 가져다 댔다. 잠깐을 그러고 있다가 몸을 일으켜 전방의 구릉을, 그 너머를 주시했다.

“뭐가 온다. 저 너머에서.”

군터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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