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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몇푼이나 한다고, 그 돈을 뜯어내려 베일리프를 시험으로 뽑느냐 이말이다. 지금와 생각해보면 휠튼 남작의 돈은 어마어마하지 않은가? 수백년이란 세월동안 세습귀족으로서 많은 돈을 저축했을 테니까!
그런데도 몇 골드 벌겠답시고 그런 짓을 하는 것을 보면 꽤나 쪼잔한 인간이다. 그리고 그 쪼잔한 인물을 털어버리기 위해 자신이 나섰다!
"쪼잔한 만큼 모은 것도 많을 거다."
아니 많아야 한다. 그래야 자신이 베일리프 때에 당한 설움을 조금이라도 만회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 * * * * * * * * *
"오랜만이군."
왕도에서부터의 진격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영지간의 무역을 위한 뻥 뚫린 가도를 걷기만 하면 됐다. 경비? 병력? 그딴 것도 없었다.
귀족파는 무엇을 지키기위해선지 아니면 집결을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가는 길에 전혀 방해가 없었다. 병사들이 어디로 솟구치듯 사라져 있는 거다.
'여전하다.'
다만 한 가지 장애물이 모습을 드러냈다면, 휠튼 남작령의 오랜 세월을 자랑하는 고풍스러운 모습을 한 성이다. 휠튼 남작령 직할지랄까?
자신에게는 전. 혀 좋은 기억이 없는 악몽같은 지역이다. 전생에는 구걸을 하며 떠돌아야 했던 곳이고 현생에는 베일리프 시험이다 뭐다 시달리기만 했던 곳이니까!
그곳을 자신의 발로 다시 올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어째야 하나.'
그래도 고향이라면 고향인데 항복요청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왜 고민 하냐고?
5천의 군세를 자랑하는 자신의 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성의 경비병들이 안쓰러울 정도기 때문이다. 성의 경비대 숫자는 잘 해야 천이다. 아니 천도 안 될 거다.
그에 비해 자신의 군세는 무장도 확실히 돼있는 데다가 병사 수만 해도 5배가 넘지 않는가? 아무리 성벽에 의지해 방어를 한다 할지라도 한계가 있는 법이니 경비병들이 사기가 떨어 진 채 떨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학살은 분명 싫어하지만.. 이런 상황이라니.'
저 하. 나. 도 마음에 들지 않는 성을 짓밟을 만한 명분이 하나도 없지 않은가.
허허. 오랜만에 뒤끝 좀 발휘해보려 했는데 도와주는 게 없다.
잠시 고심을 하던 로우드는 부관 다리운에게 명했다.
"사절을 보내. 내용은 무조건 적인 항복 권유로."
"알겠습니다."
언제나 시원스러운 다리운의 대답. 이번 만큼은 전쟁을 권유했다면 모르는 척 받아들였을 텐데! 무언가 찝찝하니 아쉽다.
"에휴.."
이상하게 저 놈의 성에서는 자기 마음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그러니 한숨이 나올 수밖에.
사절단은 얼마 되지 않아 꾸려졌고, 상대측의 아무런 저항 없이 성문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벌벌떠는 경비들. 생각보다 적은 수의 병사. 나와보지도 않는 화려한 복식의 귀족들.
이렇게 되면 나오는 생각은 하나.
'휠튼 남작이 여기 없는 것인가?'
젠장. 빈집털기나 하다 끝나게 생겼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사절단이 간지 얼마되지도 않아 성에서 하얀색 깃발이 올라왔다.
백기. 전쟁에서 항복의 표시를 하는 백기가 단 한번의 소요도 없이 올라온 것이다.
"들어 간다."
이제는 씁쓸함을 넘어 속이 들끓어 오르기까지 하지만 어떻게 하겠는가. 학살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니 들어서야 했다.
'그래도 좋게는 안 넘어갈 것이야.'
휠튼 남작령 직할지를 지키는 외성이야 그대로 둬주겠다 이거다. 외성을 부숴봤자 보통의 영지민들만 부서진 외성에 쳐들어올 몬스터 때문에 고생할 테니까!
하지만 내성은 아니다. 내성은 휠튼 남작가의 쓰잘데기 없는 명예와 재산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성벽이 아닌가?
로우드는 전쟁을 시작하고 가장 흥분에 차 말했다.
"내성으로 바로 진입한다! 가디언 포 5기도 챙겨. 그리고 내성 주변에 있는 귀족들은 잡아들이고 보통의 영지민들은 뒤로 물러서게 해. 일단은 나를 포함 500의 인원들이 내성에 들어간다."
일단은 자신을 포함한 수하들 500이 들어간다. 내성의 크기를 생각하면 500의 인원만으로도 수색이 금방 될 거다. 외성보다는 작은 것이 내성이니까.
내성에 남아있을 보물들을 조금이라도 챙기고자 하는 거다. 휠튼 남작이 전쟁준비로 미처 가져가지 못한 많은 예술품 그리고 돈, 벽에 박혀있는 보석 장식들까지도 싸그리 챙겨갈 것이다.
*****
휠튼가의 명예, 탐욕, 재산 그 무엇이든 간에 내성에 있는 돈 될 만한 모든 것들이 한 곳에 싸이기 시작했다. 로우드의 명령하에 점차 점차 쌓이고 있는 것이다.
"뒤졋!"
계속해서 자신의 수하들을 재촉하는 로우드.
로우드는 자신이 이렇게 흥분에 차 명령을 내린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열심히 명령을 내렸다. 말만 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자기 자신도 솔선수범하며 휠튼 남작의 성을 털기 시작했다.
"흐음.. 저건."
로우드의 시선이 멈춰선 곳은 휠튼 남작가의 1대부터 지금의 남작까지를 한명, 한명 그려넣은 초상화에 멈춰섰다.
자신의 조상 덕에 세습귀족이 되어 한 왕국을 좌지우지 하게 된 것이 휠튼 남작 아닌가? 그런만큼 조상에 대한 고마움이 컸고, 고마움에 대한 표현이 이런 초상화 같은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사소한 듯 보이지만 귀족가에서는 꽤나 중요한 것 중에 하나다.
실제로 로우드의 저택 아니 이제는 성이라 할만한 그 곳에도 세렌덕분에 초상화 하나가 놓여 있다. 여느 귀족들에게 꿀리지 말아야 한다는 그녀의 재촉 아닌 재촉에 로우드가 시간을 들여 초상화를 그려 넣었기 때문이다.
그런 초상화들을 바라보며 로우드가 품평을 한다.
'이거, 이거 다들 비슷하게 생겼구만.'
왜 아니 그럴까. 조상이니 당연히 비슷하게 생겼겠지.
쓸데없는 트집이지만 로우드에겐 중요하다. 1대의 초상화에 멈춰선 로우드.
"그래도 이 분은 제대로 된 사람이란 말이지."
왕국의 성립 당시에 모든 세습귀족들은 남을 위해 희생할 줄 알고, 의로운 이들이 대다수였다. 그런 정신이 있기에 오크 준동 시에 오크들을 물리치는데 공을 세운거고, 지금의 세습귀족이 만들어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썩을 대로 썩어버렸지. 그렇기에 귀족파랍시고 왕을 죽인게 아닌가."
1대의 초상화는 그대로 뒀다.
하지만 2대, 3대 그리고 4대. 지금의 휠튼 남작의 초상화에까지는.
"파이어 에로우! 어디서 휠튼 남작 같은 걸 만들어가지고!"
시달리긴 했지.
"파이어 에로우! 욕심만 많아서는!"
나를 담아둘 그릇도 안되는데 말이야!
"파이어 에로우! 사람 잘못건드렸어!"
내가 뒷끝이 얼마나 강한데. 오크들도 오크 로드가 아니었으면 용서하지 않았을 정도란 말이다. 아니 그 이전에 많은 오크들을 손수 학살했지.
뒷끝이 곧 나의 힘이 아니던가.
"다 태워버려라!"
자신의 어릴적 마을의 홍수를 막기위해 디그를 난사했듯이 초상화에 대고 파이어 에로우를 난사했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모든 초상화를 태워버린 로우드.
"후우. 후우. 어?"
오랜만의 마법 난사로 스트레스가 풀린 로우드는 초상화의 가운데 즈음에서 한가지 특이한 것을 찾았다.
"오오?"
손잡이. 로우드가 마법으로 태워버린 초상화 뒤에 남겨진 그것은 손잡이였다.
'이쯤이면 뻔하지.'
자신의 조상을 기리기 위해 만든 초상화. 보통 이런 초상화가 있는 곳은 당대의 가주 아니면 다음 대의 가주가 될 자만 들어올 수 있다. 일종의 조상에 대한 예우인 거다.
그런 곳에 숨겨진 손잡이가 있다라?
"흐흣. 찾을 수고를 덜었어. 어이! 다리운, 우른, 스피든 모두 불러 와."
로우드는 자신의 곁에서 호위를 하고 있던 이를 시켜 사람들을 불러 모으도록 했다.
군주의 시간 212편 - 휠튼 남작을 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