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신살검 안에서 도강문의 형상이 튀어나왔다. 몇천 년 전 봤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도강문은 후후 비웃으며 아이젠을 노려보았다.
“왜 그렇게 멍청하게 날 보느냐? 내가 정말 네놈에게 당해 죽었다고 생각하느냐? 천만에! 나는 수천 년 동안이나 신살검 안에 잠들어 있었다! 수천 년이나 말이다!”
“도강문…….”
“그리고 그 수천 년의 보상을 이제야 받는 기분이군! 이강철, 네놈은 여기서 죽는다! 이제야말로 내게 말이다! 크하하하!”
도강문의 어처구니없이 해맑은 웃음소리가 하늘에 울려 퍼졌다. 그사이 시간 조율자들이 공간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아이젠은 도강문을 올려다보았다.
“도강문, 너 바보냐?”
“뭐라?!”
“당해낼 수 없었던 건 내가 아니라 너였잖아. 까먹었어? 너 나한테 죽었어.”
“크으으! 네놈이야말로 내 말에 귀를 좀 기울여라! 난 네게 죽은 게 아니야! 신살검 안에 잠들어 있었을 뿐! 이 데미안이라는 녀석을 매개체 삼아 말이지!”
“쿨럭! 쿨럭!”
아이젠이 다시 피를 토했다. 칼날은 미끄러지며 서서히, 그러나 뚝심 있게 아이젠을 향해 밀려들어 오고 있었다.
마침내 신살검의 칼날이 아이젠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천천히 잘리는 갈비뼈, 그리고 심장까지 칼날은 거침없이 들어왔다. 심장 위에 칼날이 걸치듯 얹혀 있었다.
“크하하하! 이강철, 나약한 녀석아! 수천 년이 지났어도 넌 나를 이기지 못했다. 진정한 승자는 바로 나, 천마 도강문이다!”
“쿨럭! 쿨럭!”
아이젠의 초점이 흐려졌다. 절망감이 온몸을 훑고 있었다. 그런가. 나는 8성에 오르고도 도강문을 이길 수 없는 것일까?
“웃기지… 마……!”
“음!?”
부들부들! 아이젠이 꽉 쥔 손을 밀어냈다. 가슴에 박혀 있던 신살검이 부들거리며 밖으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난… 절대 지지 않는다. 나는 ‘무신(武神)’ 이강철이다!”
그리고 아이젠은 마침내, 무신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던 무혈신공의 흐름이 수천 개의 낱알로 흩어지며 그의 온몸을 가득 채웠다.
장독에 된장이 흘러넘칠 때까지 꾹꾹 눌러 담는 것처럼, 무혈신공의 낱알이 아이젠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물샐틈없이 틀어막았다.
‘이것은?’
아이젠은 깨달음을 얻었다. 세상의 다양하고 복잡한 정보들이 모조리 아이젠의 머릿속에 흘러들어 오는 느낌이었다.
진리를 얻고, 지식을 습득하던 아이젠의 뇌는 바느질 한 번이면 터져 버릴 것처럼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아이젠은 시간 조율자들이 뚫고 들어온 시간의 틈새 너머를 보고 있었다.
그 틈새 안에서 두 눈 번쩍 뜬 채 아이젠을 노려보고 있는 것은.
[드디어 도달했는가, 이강철.]
도철이었다.
아이젠은 9성, 생사경에 도달했다.
생사경의 또 다른 이름은, 바로 ‘무신’의 경지였다.
* * *
짹― 짹― 짹―
아이젠은 시간의 틈새에 발을 들였다. 소쩍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이곳은 암화의 공간처럼 어두컴컴하지 않았다. 반대로 밝고 산이 있었으며, 해가 가득히 들어차 있었다.
말하자면 이곳은 중원 무림의 풍경 그 자체였다.
아이젠이 등을 돌려 시간의 틈새를 바라보았다. 그 너머 바깥세상의 시간은 완전히 멈춰 있었다. 데미안도, 신살검도, 그 안에 깃들어 있는 도강문도. 시간이 정지해 아이젠이 움직이는 것을 막아내지 못했다.
그 안에서 와상처럼 누워 있던 도철은 아이젠을 천연덕스레 내려다보았다.
[그래, 기분이 어떻지?]
“…여긴?”
[중원이다. 네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거지.”
[시간이란 놀랍지. 흐르는 시간 속에서 이강철 너는 이제 네가 있을 곳을 점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생사경(生死境)’,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에 선 존재가 가진 힘.]
아이젠이 도철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그곳에 서 있는 것은 도철이 아니었다. 누워 있던 도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곳에서 해맑게 미소 짓고 있는 것은.
“스승님.”
바로 그의 스승, 이화도였다.
“철이야. 너라면 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단다. 무혈신공 9성의 경지에 오를 수 있을 거라고.”
“스승님…….”
아이젠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자 이화도는 당황하며 아이젠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녀석아, 이 좋은 날 울면 어찌하느냐?”
“그럼 웃습니까?”
“웃어야지. 마냥 웃어야지. 그리고 내가 네게 주문했던 것을 이뤄내야지.”
“주문이요?”
“설마 잊은 건 아니겠지? 철이야.”
이화도가 아이젠과 눈높이를 맞추며 씨익 웃었다. 그러자 아이젠도 빙긋 웃고 말았다. 이화도가 말했다.
“철이야, 너의 주먹으로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거라.”
“…나 자신을 믿어라. 그럼 세상에 못 이룰 것이 없을 테니.”
“그래.”
이화도의 입이 귀에 걸렸다.
“가거라.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무신이란 이름으로서.”
탁― 이화도가 아이젠의 이마를 밀었다. 그러자 아이젠은 시간의 틈새 바깥으로 순식간에 밀려 나가, 원래 그가 있던 자리로 삽시간에 도착해 있었다.
그러니까, 데미안이 칼날을 찔러 오던 그 순간으로 말이다.
* * *
팟! 아이젠의 눈이 번쩍 뜨였다. 생사경에 오른 아이젠에게, 절망감은 침범해 올 자격이 없었다.
아이젠의 눈빛에 생기가 돌아오자, 눈앞에 서 있던 데미안이 흐릿한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아이젠, 표정이 기분 나쁘군요.”
“…아.”
“됐어요. 이제 그만 끝내죠.”
그렇게 데미안이 신살검으로 아이젠의 심장을 다시 찔러 들어왔다. 신살검 속에 깃들어 있던 도강문이 비웃음 가득 섞인 목소리로 껄껄댔다.
“크하하하! 죽어라, 이강철!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나의 승리다!”
푸욱!!
마침내 신살검이 아이젠의 심장을 꿰뚫었다. 신살검의 오러 블레이드가 아이젠의 등 뒤를 뚫고 튀어나왔다. 깔끔하게 한 줄만 남은 상처로, 아이젠의 심장은 서서히 움직임을 멈춰갔다.
촤악! 데미안이 신살검을 뽑았다. 그는 남은 영체분신들을 해제한 뒤, 오러 블레이드 역시 해제했다. 도신에 묻은 피를 닦아내던 데미안은 아이젠을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역시… 내가 본 미래대로군요.”
데미안은 이 미래를 이미 보았다. 아이젠이 신살검에 심장을 찔려 죽는 미래를 말이다. 너무 예상대로라서 한편으론 허무할 지경이었다. 데미안이 보아온 미래는 단 한 번도 현실과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그때 파밧! 하고 데미안의 옆에 그림자 몇 개가 내려섰다. 공화국의 암살자들이었다. 그들은 데미안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집정관님! 승리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그래요. 아이젠의 시체를 수습하고 제국에 점령문을 보내세요. 이제 제국은 저의 것입니다.”
“예! 공화국의 이름으로 점령을 명령하는 문서를 내리겠습니다!”
“아뇨. 공화국의 이름 말고. 내 이름.”
“예?”
데미안이 문답을 주고받던 암살자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그의 머리를 덥석 붙잡았다.
“당신들이 착각하는 게 하나 있습니다. 내 힘을 공화국의 힘으로 오해한다는 점이에요. 아니요, 나는 데미안입니다. 당신들이 갓난아기일 때도 이미 천 년 넘게 살아왔죠.”
“지, 집정관님.”
“이런, 어쩌죠? 당신 목이 잘리는 미래를 보고 말았네요.”
서걱! 신살검이 암살자의 목을 땅에 떨어뜨렸다. 다른 암살자들은 기겁하면서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까딱하면 자신들도 저리될 수 있으리라 판단했기에.
“다들 제 말을 알아들으셨을까요?”
“…예!”
“그럼 해산―”
해산하세요, 하고 데미안이 말하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데미안의 뒤편에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괴마수가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데미안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심장이 뚫린 아이젠의 시체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
‘뭐지……?!’
무슨 일일까. 데미안은 방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신살검을 꽉 쥐었다. 다시 오러 블레이드를 형성했다. 그는 후일을 내다보려 했으나 어째선지 미래시가 발동하지 않았다.
‘뭐야, 왜 보이지 않는 거야?’
그가 당황하는 사이, 암살자들과 데미안을 경악하게 할 만한 일이 벌어졌다.
“……?!!”
왜인가 하니, 분명 죽었어야 마땅한 아이젠이 벌떡 몸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는 코를 흥 풀더니 가슴팍을 매만졌다. 상처는 그대로 있었고, 심장에서는 피가 철철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젠의 얼굴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아, 피곤하네.”
“아… 아이젠. 이게 어떻게 된 거죠?”
“뭐가.”
“뭐가라니요! 난 당신의 심장을 찔렀습니다. 왜 죽지 않는 겁니까?”
“그야, 내가 생사경의 경지에 올랐으니까.”
“생사경……?”
생사경이라면 데미안도 분명 들어본 적이 있다. 분명 도강문에게 들었던 기억이 난다. 생사경이라는 말도 안 되는, 소설 속에서나 존재하는 경지를 꾀하던 녀석이 있었다고. 그것이 바로 이강철.
‘그리고 그 이강철은 아이젠 폰 그린우드……. 설마?’
아니나 다를까, 신살검에 깃들어 있던 도강문이 발작하며 튀어나왔다. 그는 아이젠에게 삿대질하고 있었다.
“뭔 개소리냐, 이강철! 듣자 듣자 하니까 못 하는 말이 없구나! 생사경이라니? 그런 경지는 존재하지 않아! 상상의 나래를 펼칠 생각이라면 혼자 하란 말이다!”
“아니. 생사경은 실존한다.”
“무슨 근거로 그따위 망발을!”
아이젠은 다시 생기가 돌아온 그 눈동자로, 도강문과 그 너머의 데미안을 노려보았다.
“내가 근거지.”
슈팟! 아이젠이 주먹을 재빨리 휘둘렀다. 그것은 너무 빨라서, 도강문과 데미안도 그 잔상만 보았을 뿐이었다.
빛살보다 빠르게 데미안에 가닿은 주먹은, 단 하나의 절대적이고 불변한 ‘일격’이었다.
“결사신권, 무혈귀로(武血歸路).”
두근!
데미안의 심장이 멎었다. 단말마의 비명조차 없었다. 그는 바닥에 쓰러져, 천 년간 이어져온 자신의 의지를 허망하게 흙바닥에 흩뿌렸다.
‘미래를 볼 수 없었던 이유는…….’
그 미래가, 예상할 수 없는 훗날이었기 때문인가.
털썩― 데미안의 손에 힘이 풀리며 아스라이 꽃처럼 졌다.
털그렁! 바닥에 힘없이 떨어진 신살검. 그 안에 잠들어 있던 도강문이 열불을 냈다.
“이런 멍청한 놈! 고작 저따위 녀석에게 당하다니……!”
“도강문, 다음은 네 차례다.”
아이젠의 섬뜩한 경고에 도강문이 피식 웃었다. 신살검은 마치 누군가가 잡고 움직이는 것처럼 허공에 붕 뜨더니, 마침내 아이젠을 향해 활처럼 겨눠졌다.
아이젠은 볼 수 있었다. 공중부양하고 있는 저 신살검 너머, 그 손잡이를 붙잡고 있는 도강문의 모습을.
‘또인가.’
아이젠과 도강문이 대치 상태가 되었다. 마치 이강철이던 마지막 날처럼. 아이젠의 손에 천연한 기운이 깃들었다. 결사신권의 절경을 담아낸 마지막 일격이었다.
도강문이 신살검을 들고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까먹은 건 아니겠지, 투신 이강철? 나는 룡피금강불침(龍皮金剛不侵)! 네놈의 그 간악한 주먹질은 내게 먹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랬지.”
실제로 그랬다. 이강철이던 시절, 그의 혼신을 다한 일격은 도강문에게 흠집 하나 내지 못했다.
하지만.
“너야말로 까먹은 거 아니냐, 도강문? 결국 넌 나한테 졌어. 바로 이, 무혈귀로의 일격에.”
도강문의 신살검과 아이젠의 무혈귀로가 맞붙었다. 번쩍! 한순간 시야를 가득 메우는 거대한 하얀 빛이 일어났다. 그러더니 공간이 일그러지며 빛이 다시 사라졌다.
“…….”
“…….”
아이젠과 도강문은 여전히 서로를 마주 본 채였다. 그러나 쓰러진 쪽은.
털썩!
도강문이었다.
쨍그랑!
신살검 역시 깨졌다. 칼날은 파편이 되어 땅을 수놓았고, 도강문은 그 안에서 피를 토하고 있었다.
‘무혈귀로는 무혈신공 9성에 도달한 자만이 다룰 수 있는 결사신권의 권법. 그 주먹은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화도의, 그리고 이강철의 의지다.
저벅저벅. 아이젠은 여기저기 흩뿌려진 신살검 위에 다가섰다. 도강문이 피를 토하고 있는 모습이 아이젠에게도 선명히 보였다.
“커헉! 쿨럭! 이강철, 이노옴… 나는 도강문이다. 천마신교의 도강문이란 말이다…….”
“그래. 난 아이젠이다. 이강철이기도 하지.”
“이 땅에 다시 한번 천마신교를 건립하겠다는 나의 꿈을… 네놈이 감히… 네까짓 놈이 감히…….”
“이번에야말로 잘 가거라, 도강문. 저승에서는 극락왕생하기를.”
아이젠이 양손을 모아 기도를 올렸다. 도강문의 숨은 서서히 끊어졌다. 이내 작은 숨소리마저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아이젠은 뒤를 돌아보았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조금의 움직임도 보이지 못하는 공화국의 암살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땀 때문에 얼굴이 창백해질 지경이었으나, 그래도 여전히 움직일 수 없었다.
아이젠이 그들에게 말했다.
“가서 데미안이 죽었다고 전해라. 공화국은 패퇴했다. 전쟁은 끝났다.”
“…예.”
파밧! 그제야 공화국의 암살자들이 사라졌다. 아이젠은 어이없을 만큼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끝났습니다, 스승님. 모든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