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끝났군요. 제국은 제가 넘겨받겠습니다.”
“후우. 후우.”
데미안이 등을 돌렸다. 그때, 아이젠은 두 다리 딛고 땅에 우뚝 섰다. 데미안이 그를 돌아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더 해볼 생각이에요? 미래전시의 영역 안에서 아이젠 당신은 무기력한 종이 인형과 다름없어요.”
“종이에 손가락 베여본 적 있어?”
“네?”
“겁나 아파.”
아이젠은 홍화로 빚은 홍련치로 배를 꿰맸다. 신살검의 악한 기운이 남아 있어 단지 응급처치에 그칠 뿐, 피가 계속 흘러나오는 것은 멈출 수 없었다.
그러나 아이젠은 고통을 무시하고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베이게 해주마.”
파밧! 아이젠이 발을 굴렀다. 어느새 무채색의 투명한 원이 아이젠 주변으로 펼쳐져 있었다. 공간지배의 영역을 전개한 것이었다.
아이젠은 허공에 뜬 채로 권기를 날렸다. 그리고 발을 굴러 재빨리 이동해 반대쪽에서도 권기를 날렸다.
그렇게 수 번, 수십 번 위치를 바꿔가며 데미안에게 주먹세례를 쏟아부었다.
“이건… 어떠냐!”
공간참보와 공간제권의 혼합!
데미안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수십 개의 공간제권을 막지 않았다.
“미래전시 : 익사이트먼트(Excitement).”
팟! 쿠구웅―
데미안이 가볍게 발을 구르자, 아이젠의 공간제권이 모두 공기 중에서 흩어졌다. 아이젠은 공간지배 영역 안에 발을 들인 채 그것을 바라보았다.
‘뭐지?!’
“미래전시는 시점의 대안을 마련하는 힘이라고 설명하지 않았나요? 저는 미래에만 대안을 마련하는 게 아니에요. 가까운 과거라면 그 역시 간섭할 수 있죠.”
“…내가 공간제권을 쓰는 과거에, 쓰지 않는 과거를 대안으로 마련했다는 거냐?”
“학습능력이 빠르시네요.”
무슨 이런 엄청난 능력이 있단 말인가. 미래도, 과거도 자신의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면 그야말로 무적이지 않은가?
[그러니까 천 년 전에 지안니도 못 막은 거지.]
‘하긴 그런가.’
하지만 아이젠은 좌절하지 않았다. 아무리 막강한 적이라도 궁리만 한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 미래와 과거를 바꾼다고? 그게 어쨌단 말인가.
‘그렇다면 미래도 과거도 바꿀 수 없게 하면 그만이지!’
그러자면 데미안이 미처 기술을 쓰기 전 그의 목숨줄을 끊어버리는 기습이 감행되어야 한다. 아주 빠르게, 아주 초고속으로!
파밧! 아이젠이 다시 발을 굴렀다.
‘목롱보!’
땅으로 발을 박찬 아이젠은 찰나의 틈도 없이 데미안의 명치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데미안은 가볍게 손을 뻗어 신살검으로 그것을 막아냈다.
카앙!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아이젠이 순간이동 했다. 데미안의 반대편에서 나타난 아이젠은 주먹을 빠르게 연타했다.
‘권왕백무 : 신(伸)!’
신(伸)의 타격이 데미안의 온몸을 향해 덤볐다. 그러나 데미안은 신살검으로 다가오는 모든 공격을 튕겨낼 따름이었다.
탕탕탕탕!
“잊었나요? 나는 참철검술을 씁니다. 이 정도로 뻔한 기술에는 미래전시의 힘을 쓸 필요도 없어요.”
그쯤이야 아이젠도 물론 아는 바였다. 하지만 뻔한 공격이라도 막아내려면 집중해야 할 것이다.
데미안은 참철검술을 쓰는 동안은 미래전시를 쓸 수 없다, 아이젠은 그렇게 추측하고 판단하여 그에게 잠깐의 쉴 틈도 주지 않을 셈이었다.
‘권왕백무 : 신(伸)!’
아이젠은 한 번 더 신의 타격을 날렸고 데미안은 신살검으로 튕겨내는 데 급급했다. 아이젠의 권왕백무는 이제 한 발이라도 맞으면 치명타가 되기에 데미안은 마냥 공격을 허용할 수도 없었다.
“무식하게 공격을 퍼붓는다고 당할 줄―”
“권왕백무 : 신(伸)!”
퍼버버버버벅! 티티티티티팅!
신살검으로 권왕백무를 튕겨내던 데미안은 미래전시의 힘을 사용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아이젠의 추측이 맞았다. 데미안은 참철검술을 쓰는 동안은 미래전시를 쓰지 못했다. 더 정확히는, 미래전시를 사용하려면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데 아이젠이 그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권왕백무 : 관(貫)!”
퍼엉! 아이젠이 신(伸) 사이에 관(貫)을 섞어 날렸다. 자신을 향해 쏜살처럼 날아드는 관(貫)을, 데미안은 미처 막아내지 못했다.
뻐억! 데미안의 이마를 관통하고 튕겨 나간 관(貫)은 흔적도 없이 허공에서 산화했다.
데미안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이마에 난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이제야말로 그는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아이젠, 절 화나게 하는군요.”
“그랬어? 그럼 의도대로 잘되고 있단 소린데.”
“미래전시 : 언어보이더블(Unavoidable).”
슉― 데미안이 손을 휘젓자, 그의 이마에 나 있던 상처가 사라졌다. 피가 흘렀던 자국마저 깔끔하게 지워져 마치 처음부터 그 상처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이젠은 경계하며 결사신권의 자세를 잡았다.
“언어보이더블은 정해진 현실의 대안을 마련하는 힘.”
“미래, 과거에 이어서 현실까지 바꿀 수 있다?”
“그래요. 언제쯤 납득하겠어요? 당신이 제게 이길 수 없단 사실을요.”
“그야 당연히, 내 몸이 불살라질 때까지.”
아이젠의 양 주먹에 천연한 기운이 깃들었다.
“환교신권!”
퍼벙! 쏘아진 두 발의 환교신권을 데미안은 맨손으로 가볍게 튕겨냈다. 그사이 아이젠은 이미 천차횡도를 오른손에 품고 있었다.
“천차횡도 : 염적양!”
푸화악!!
대지를 불태우는 광오한 일격이 덮쳐들고, 데미안은 휘청거리며 발을 굴렀다. 그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미래전시 : 익사이트먼트(Excitement).”
팟! 그러자 허공에 자리하던 천차횡도의 기운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천연한 기운이 사라졌음을 확인한 데미안은 아이젠을 향해 돌격해 왔다.
“당신만 공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아이젠.”
신살검의 그린 오러 블레이드가 희미한, 그러나 상냥하게 깜빡이며 아이젠을 향해 짓쳐 들어왔다.
“참철검술, 속동검격.”
“절세지경!”
타앙! 예기가 아이젠의 어깨에 맞고 튕겨 나갔다. 아이젠은 그대로 데미안의 어깨를 붙들어 높이 쳐들었다.
그리고, 땅 밑으로 힘껏 내려쳤다.
뻐억!! 데미안의 신형이 땅 위에 떨어져 내리고, 아이젠은 누워 있는 그의 명치에 주먹을 던졌다.
“천차횡도 : 염적양!”
“윽?!”
푸화악!!
이번에야말로 염적양의 일격이 데미안의 배를 꿰뚫었다. 타오르는 연기 속에서 데미안은 언어보이더블을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의 배에 나 있던 구멍이 순식간에 수복되며 현실의 대안을 마련했다.
츠팟! 연기 안에서 재빠르게 움직인 데미안은 아이젠을 향해 직각으로 휘어 들어왔다. 신살검을 앞장세운 채였다.
“참철검술, 역속검격!”
“공간참보.”
파밧! 데미안이 정면으로 찔러 들어올 때 아이젠은 점멸하여 데미안의 등 뒤로 이동했다. 데미안이 미처 등을 돌리기 전에, 아이젠은 뒤로 주먹을 휘둘렀다.
180도의 원심력으로 들어오는 주먹은 평소보다 몇 배는 강할 것이었다.
“결사신권, 만귀변국!”
콰과과과과과과과!
꺄아아아아아아아!
귀신이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만귀변국의 살인적인 공격이 데미안을 찢어발겼다.
“으으으으앗!”
데미안은 비명을 지르며 몸에 수를 놓는 귀신같은 흑염을 떨쳐내 버렸다. 그의 몸에는 순식간에 무수히 많은 상처가 남았지만, 데미안은 이번에도 언어보이더블로 현실에 대안을 마련했다.
그때였다.
쿵!
데미안이 별안간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이젠은 그가 왜 그러는지 알 만하다고 느꼈다.
“미래전시라는 그 힘, 무한대로 쓸 수 있는 게 아니지? 그런 엄청난 힘을 할머니 찬장 속 곶감 빼먹듯 마냥 펑펑 써댈 수 있을 리가 없지.”
“흥, 닥치세요!”
데미안의 언행이 거칠어졌다. 그는 꿇었던 무릎을 일으키고 아이젠에게 폭발하듯 솟아 올라왔다. 그의 신살검이 아이젠의 명치를 노리고 있었다.
아이젠은 절세지경을 사용해 막으려 했지만 아직 사용할 시간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젠은 신살검의 도신을 붙들었다. 오러 블레이드가 아이젠의 손바닥을 찢어발겼다. 신살검은 미꾸라지처럼 흐느적거리며 아이젠의 손 위로 미끄러졌다.
그러더니 마침내 푸욱! 아이젠의 배를 찔렀다. 홍련치로 꿰맨 쪽의 반대 부위였다.
“윽!”
“죽어버려요, 아이젠!”
푸학! 데미안이 그대로 신살검을 오른쪽으로 긋자, 아이젠의 배가 가로로 찢어지며 핏물을 쏟아냈다.
아이젠은 신음하며 고통을 참았고, 그 상태로 데미안의 명치에 주먹을 던졌다.
‘하나를 줬으니 하나를 가져가마!’
그것은 만귀변국의 힘이었다.
콰과과과과과과!
꺄아아아아아아!
“커헉!”
데미안은 극심한 통증에 피를 토해냈다. 최후의 일격을 미처 남기지 못하고 뒤로 물러선 데미안은 신살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는 한편 고통에 신음했다.
아이젠이라고 사정 다르지 않았다. 금세라도 온 내장이 밖으로 쏟아질 기세였다. 아이젠은 홍련치로 재빠르게 상처를 꿰맨 뒤, 천연한 기운을 흘려넣어 절단면을 틀어막았다. 피가 응고되며 출혈이 멎어갔다.
“후우, 후우. 제법 날 힘겹게 하는군요.”
“허억, 허억. 아, 아파 뒤지겠네.”
“언어보이더블.”
팟! 데미안의 배가 또다시 멀쩡해졌다. 데미안은 오늘만 벌써 열 번 가까이 되는 미래전시의 힘을 사용하고 말았다. 그는 곧 다가올 ‘시련’의 여파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생각 외예요, 아이젠. 당신은 정말 강하군요. 어쩌면 지안니 그 이상일지도 모르겠어요.”
“칭찬이라면 다 끝나고 해줘도 되는데.”
그렇게 말하는 아이젠은 핏물이 역류하는 구토감을 참아내느라 용을 쓰고 있었다. 식은땀이 뻘뻘 흐르기 시작했다.
데미안의 분위기가 변화했다. 아이젠은 그 변화를 빠르게 감지했다. 현무가 말한 네 번의 각성 중 세 번째 각성을 하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아이젠.]
‘그래. 알아.’
데미안의 세 번째 각성은 첫 번째, 두 번째 각성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 데미안이 원해서 각성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슈루루룩― 한순간 아이젠과 데미안이 싸우고 있는 이 땅에, 무지갯빛 영상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마치 이 공간 자체가 다른 차원으로 분리되기라도 하는 듯한 연출이었고 실제로 그랬다.
“시간 조율자들이 찾아왔군요.”
“시간 조율자?”
아이젠이 모른 체하며 묻자 데미안이 대답해 주었다.
“미래전시는 금기의 힘. 시점을 왜곡하는 능력을 이 세상이 허용할 리 없죠. 그래서 미래전시를 자주 사용하면 뒤바뀐 시간 선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으려는 시간 조율자들이 찾아옵니다. 저를 찢어발기기 위해서.”
“그리고 너와 같이 있는 나도 함께 말려들겠군. 그렇지?”
“네. 어디 한번 잘 막아보세요.”
찌지지직! 꽈드드드득!
허공에 구멍이 나기 시작했다. 무지갯빛 영상을 찢으며, 구멍에 손을 집어넣고 들어오는 그것들은 십 척 키의 괴물체들이었다.
마치 표백제에 사람을 넣고 끓인 것처럼 반투명한 그들은 무지갯빛 영상을 배경 삼다 보니 오묘한 빛깔을 내고 있었다. 얼굴에 눈코입은 없었지만 아이젠은 그의 시선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이것들이 시간 조율자.’
시간 조율자는 하나가 아니었다. 넷이나 되는 시간 조율자가 모습을 드러냈고, 그들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아이젠과 데미안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그들은 다시 둘씩 나뉘어 시간 선을 방해한 적들을 노렸다.
“부오오오오!!”
시간 조율자가 우짖었다. 입이 없는데 어디로 소리치는 것일까? 아이젠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런 하찮은 의문이나 품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와라.”
“부오오오오!!”
두 마리의 시간 조율자가 아이젠에게 발을 박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