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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 넷째는 역대급 무공천재-196화 (196/201)

196화

덜컹덜컹―

흔들거리는 마차 안에서, 아이젠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차가 돌부리에 부딪힐 때도 아이젠은 조금의 움직임도 없었다. 마치 저 자세 그대로 불상이 되어 죽어버린 건 아닌가 싶을 만큼.

하지만 아이젠은 살아 있었다. 그는 마음속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최후의 내기를 가다듬고 있는 것이었다. 천연한 기운이 들불처럼 끓어오르려는 것을 아이젠은 차갑게 식혀 단단한 마음으로 승화시켰다.

“하아. 쉽지 않네.”

아이젠은 그린 오러를 아이기스에 불어넣었다. 동심상의 원리로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어이.]

아이젠의 양팔에 매여 있는 아이기스에서 선명한 푸른빛이 났다. 매그넘 글러브에 당한 흠집과 상처가 말끔히 치료된 상태인 아이기스 속에서, 현무가 말하는 음성은 자못 진중한 것이었다.

아이젠은 실눈을 뜨고 아이기스를 내려다보았다.

“할 말 있어?”

[…그래.]

현무는 결의를 다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젠이 모르는 척 대꾸했다.

“편히 해. 신경 안 쓰는 척해줄 테니까.”

[그러지 않아도 되는…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네 말대로다. 난 그 녀석을 알아. 그 녀석은 데미안. 천 년 전… 지안니와 내가 봉인하려 했던 녀석이다.]

현무는 짤막한 옛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약 천 년 전, 지안니 폰 그린우드는 영설산 위에 서 있었다. 자신의 참철검 아이기스와 함께. 아이기스 속에 깃들어 있던 현무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어이, 지안니. 꼭 저 마물 녀석이랑 같이해야겠어?]

현무는 지안니의 왼편에 서 있는 화이트 오크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화이트 오크에게도 들렸을 텐데 그는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다만 그의 표정만은 뚱해졌다.

지안니가 핀잔을 주었다.

“현무, 말 함부로 하지 마.”

[아, 뭐! 마물더러 마물이라고 하는 게 잘못됐어?]

“그가 가진 고유의 힘, ‘봉인’이 없으면 데미안은 이길 수 없어. 알잖아?”

화이트 오크는 강하지 않다. 하지만 그의 힘 ‘봉인’은 상대가 그 누구라도 가둬둘 수 있다. 그 힘을 믿고 지안니는 화이트 오크와 힘을 합쳐 이곳 영설산에 온 것이었다.

“거기, 무슨 대화들을 그렇게 나누고 있어요?”

그때 데미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안니는 반사적으로 그를 올려다보게 되었다.

데미안은 영설산의 가장 높은 곳에 서 있었다. 그리고 지안니를 내려다보았다. 데미안은 이 당시에는 공화국의 집정관 따위가 아니었다.

그는 마혼. 아득히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마왕이었다.

데미안은 자신의 하얀 날개를 펄럭하고 펼쳐 보였다. 그러지 지안니가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왜. 이 대화가 무슨 내용인지는 ‘미래시(未來視)’로 못 봤나 보지? 널 죽일 계획을 짜고 있었는데.”

“그럴 수 없다는 거 알아요.”

“왜?”

“전 안 죽어요. 그런 미래를 보았으니까.”

“아, 그래? 내가 본 미래랑은 다르네. 난 널 봉인하는 미래를 봐버렸거든.”

“그래요? 누구의 미래시가 맞는지, 한번 맞춰볼까요?”

“거 좋지!”

팟! 지안니와 데미안의 신형이 맞붙었다. 데미안은 그때도 부러진 신살검을 들고 있었다.

카앙!!

그리고 이어지는 두 사람의 전투는 ‘싸움’이 아니라 ‘전쟁’이라고 불러야 마땅했다.

지안니와 데미안은 1년 열두 달간 단 한 숨의 쉬는 시간도 없이 혈전을 벌였고, 그날의 여파로 영설산에는 더욱 찬 바람이 불었다. 아이기스의 한기가 영설산을 통째로 냉각한 탓이다.

현무가 이야기를 매듭 지었다.

[그렇게 1년 내내 싸웠지만, 우리는 데미안을 봉인하지 못했다. 그저 그 녀석을 약화시키는 데 그쳤을 뿐이지.]

“약화라.”

아이젠이 턱을 매만졌다. 초대 가주인 지안니조차 1년을 쏟아부어도 쓰러뜨리지 못한 게 바로 데미안이라 이건가.

[그 녀석에게도 타격이 컸을 거야. 지난 천 년 동안 조용히 있었던 것은 아마 힘을 회복시키는 데 그만큼 오랜 기간이 걸렸기 때문이겠지.]

“그럼 현무 네 생각에, 지금 데미안 그 녀석은 천 년 전의 힘을 되찾았다?”

[그래. 확실해.]

아이젠은 곰곰이 생각했다. 초대 가주조차 데미안을 ‘죽이는’ 게 아니라 ‘봉인’하려 했다. 그런데 그조차도 실패로 돌아갔다. 그렇다면.

[지안니도 해내지 못한 것을, 네가 할 수 있을까?]

현무가 이런 우려를 품는 것도 당연했다. 아이젠은 잠시 들끓던 천연한 기운을 다시 가라앉히고, 씨익 웃었다.

“왜 못 할 거라고 생각하지?”

아이젠은 자신이 있었다. 지금의 스스로가, 천 년 전의 지안니보다 더 강하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덜컹! 마침내 마차가 어느 곳에 멈췄다. 아이젠은 천천히 문을 열어 발을 딛고 내렸다.

이곳은 라르페소와 아틀란티스의 경계 지역. 아무것도 없는 광활한 대지에는 어쩐지 피 냄새가 감돌았다. 이 땅에서 수없이 많은 전쟁이 벌어졌음을 시사하는 바였다. 핏물이 토양에 스며들어 이런 역겨운 혈향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그 전쟁이 종지부를 맞이한다.

아이젠, 그리고 아이젠의 맞은편 저 멀리 서 있는 데미안으로 인해서.

“으, 으으.”

마차를 몰고 왔던 제국 병사는 벌벌 떨며 마차와 함께 부리나케 도망쳤다.

그러자 대지에는 이제 정말로 아이젠과 데미안,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오래 기다린 거 아니지?”

“괜찮습니다. 딱 이 시간에 맞춰 올 줄 알고 있었으니까.”

아이젠은 조금 전 마차 안에서, 현무에게 이야기를 두 개 들었다. 첫째는 데미안이 가진 기본적인 힘이 바로 ‘미래시’, 즉 미래를 보는 힘이라는 것이었다.

데미안에게는 시제가 없다. 그는 미래를 남보다 일찍 보고, 그 미래를 바꾸기 위해 제 마음껏 행동할 수 있다. 얼마큼의 미래를 볼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 사나흘 이상은 가볍게 헤아리는 듯하다.

이것이 첫 번째.

그리고 두 번째는.

[기억해, 아이젠. 데미안의 힘은 총 4번 변화한다.]

바로 데미안이 총 4번 힘을 각성한다는 것이었다. 미래시는 각성하지 않은 그의 원초적인 힘일 뿐.

조금 전 현무를 통해 들었던 4번의 능력 모두를 되새김질하며, 아이젠이 주먹을 꽉 쥐었다.

“한판 하기 전에 묻고 싶은 게 있다, 데미안.”

“내가 왜 당신을 점찍었냐고요? 이미 들은 질문이에요. 대답해 드릴게요. 당신이, 지안니의 후예이니까. 천 년 전에 저를 끈질기게 괴롭힌 그의 후손을, 저는 용서할 수 없거든요.”

아이젠이 데미안을 쳐다보았다. 지안니의 후예라면 테오발트 역시 다르지 않건만, 그는 왜 하필 아이젠과의 일대일을 요구해 왔을까?

지안니는 아이젠의 아이기스를 가리켰다. 아이젠은 그것으로 대답이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첫 번째 각성부터 봐볼까?”

꾸우욱… 아이젠의 오른손에 힘이 들어갔다. 저 멀리 서 있던 데미안 역시, 신살검을 가볍게 뽑아 들었다.

파앙! 아이젠이 총탄처럼 쏘아져 나갈 때.

츠팟! 데미안의 신형도 바람처럼 허공을 내달렸다.

카앙!! 아이젠의 주먹과 데미안의 신살검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바야흐로 이 세상의 향방을 결정짓는 결전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 *

테오발트는 라르페소성의 첨탑 아래, 지붕에 대종이 달린 그 앞에 서 있었다. 테오발트는 손에 들고 있던 차를 홀짝 들이켰다. 그때 그의 뒤로 발소리가 들려왔다.

“환자한테 차는 몸에 안 좋은데, 테오발트 공작.”

“대공전하.”

오마르였다. 오마르는 손에 편지를 들고 있었다. 그는 그 편지를 휘휘 장난스레 저으며 테오발트에게 내밀었다.

“받게. 폐하의 전언이다.”

테오발트가 밀랍 봉인을 풀어 확인해 보니, 안의 내용은 테오발트의 칩거를 명령하는 것이었다. 즉 테오발트는 이제 전쟁에서 싸우는 장군이 아니라 시골로 내려가 농사나 지어야 하는 신세가 된 거다.

“폐하의 배려야. 자네는 요양해야 해.”

“감읍할 따름입니다.”

“이렇게 말해도 자네가 바로 안 내려가리란 건 알고 있지만 말이지.”

“후후, 들켰습니까?”

“큭큭큭.”

테오발트는 편지를 고이 접어 품 안에 넣은 다음,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몸은 좀 괜찮은가?”

“대공전하 덕분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데미안과의 싸움은 어땠지? 우리 중 그자와 싸워본 이는 자네 혼자뿐이야.”

그 말에 테오발트는 과거를 되새김질했다. 불과 사흘 전 일인데 벌써 몇 해는 된 것같이 옛일로 느껴졌다.

“강합니다. 저는 그자에게 단 한 번의 공격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설마. 그린 디바우어러를 쓰지 않은 건가?”

“사용했습니다.”

“그런데도 단 한 번도? 허어. 자네 검술이 녹슬었을 리도 없는데.”

“그만한 강자였습니다. 데미안은.”

오마르가 높이 솟아 있는 대종을 바라보았다. 종을 지탱하는 걸쇠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위태위태해 보였으나, 이 대종은 이 상태로 30년을 있었다. 겉보기와는 달리 아주 단단한 물건이었다.

“목격한 병사에 의하면 데미안 그자, 빼빼 말랐다고 들었는데. 겉보기와는 다른가 보군.”

“예. 하지만 겉보기와 다른 것은 아이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의 눈에 아이젠은 어리기만 한 청소년, 풋내기일 뿐이다. 테오발트도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보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아이젠은 변했다. 환골탈태했다. 그는 더 이상 망나니도, 불량아도 아닌, 어엿한 그린우드의 소가주로 성장해 있었다. 테오발트가 뿌듯함을 느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가?”

“그렇습니다. 오마르 대공전하께야 못 미치겠지만 말입니다.”

“입바른 소리는 할 필요 없다. 아이젠의 강함은 나 역시 알고 있어. 그는 지크프리트와의 싸움에서 각성했다.”

“눈치채셨습니까?”

“눈치 못 채는 게 바보 아닌가? 온몸에서 느껴지는 그 오러를 어찌 못 알아차릴 수 있겠어.”

오마르는 테오발트에게서 잔을 뺏어 들었다. 그러더니 자기가 한 모금 마셔버렸다. 테오발트는 못내 아쉬운 얼굴로 오마르를 처량하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찌하여 그 아이의 일대일 출정을 반대하셨습니까?”

“육신이 강한 것과 정신이 강한 것은 별개의 문제. 우리에겐 있는 연륜과 관록이 그 아이에겐 없지. 반면 데미안은 25년 전에도 이미 공화국의 수장이었던 자. 내 기억으론 내가 어릴 때부터 이미 공화국의 집정관이었던 게 바로 데미안이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아이젠에게는 없는 것이 데미안에게는 있지.”

“그것은?”

“경험.”

오마르가 한 모금 더 차를 들이켰다. 그러자 찻잔의 내용물이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이 결투는 경험치의 싸움이네, 테오발트 공작. 그 아이가 어떤 결과를 들고 올지,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려 보자고.”

“훗. 예, 대공전하.”

오마르의 말은 자못 서늘한 것이었으나, 테오발트는 씨익 미소 짓고 말았다.

그는 아이젠을 믿었다. 클라우디아와의 사이에서 낳은 유일한 아들, 아이젠. 서자라고 불리며 핍박받아온 그 아이를 믿고 있는 것이었다.

‘승리와 함께 돌아오거라, 아이젠. 아니, 그린우드의 소가주여.’

뎅― 뎅― 대종이 바람에 흔들리며 울음소리를 냈다.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을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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