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깊은 밤, 라르페소성의 첨탑 위. 며칠 전 지크프리트와 혈전을 벌였던 이곳에서, 아이젠은 정좌를 틀어 앉아 있었다.
‘신살검.’
데미안이 쥐고 있던 것은 분명 신살검이었다. 아이젠이 이강철이던 시절 자신의 주먹으로 부러뜨린 자국까지 분명했다. 다른 물건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상하다. 이 세상과 중원 무림은 완전히 분리된 세계,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단 말일까?
‘녀석은 아득한 과거로부터 전달받았다고 했다.’
그 의미를 파악할 순 없었지만, 아이젠은 이제야말로 자신이 어째서 이강철이던 전생을 깨달은 것인지 어렴풋이 윤곽이 잡히는 듯도 했다.
강철은 생명이 끝나는 최후의 순간 도강문을 죽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도강문의 신살검만은 그 부러진 흔적만으로도 끝끝내 남아, 다른 세계로까지 전해져 온 것.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그 연을 끊어내기 위해 아이젠이 전생을 각성한 것이다.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전생의 악연을 완전히 끊어라, 뭐 그런 건가?’
아이젠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밝은 달이 아이젠을 금세라도 쓰다듬을 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만약 신이 있다면 아이젠에게 바라는 것이 바로 그것인가? 전생의 악연을 끊어내는 것?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싸워주마!’
아이젠은 굳게 다짐하고 자신의 양팔을 내려다보았다. 여기저기 흠집이 나고 갈라지기까지 한 아이기스 너머 잠들어 있을 현무를 보는 것이었다.
“현무. 넌 데미안이 누군지 알지?”
데미안과 맞닥뜨렸을 때, 아이젠은 분명한 기운을 느꼈다. 아이기스가 부르르하고 떨리는 것을 말이다. 아이기스를 얻은 후 이제까지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
현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말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고. 그렇다면 아이젠도 더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
아이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미안이 전투를 제안한 것은 사흘 후다. 그렇다면 그날을 위한 준비를 시작해야 했다.
“가볼까.”
팟! 아이젠의 신형이 첨탑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 * *
공화국군의 사기는 그야말로 처참했다.
패전에 패전을 거듭한 그들 사이에서 탈영병마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었다. 수도를 적국에 빼앗겼고, 총력전까지 감행했는데도 이렇다 할 성과가 없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공화국의 총회의가 다시 소집됐다. 상석에 앉은 집정관 데미안의 말을 전해 들은 공화국의 원로들 중 몇몇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 뭐라고? 일대일?”
“적국의 한 명과 일대일로 공화국의 명운을 걸겠단 말이오?!”
“네.”
데미안은 단답 후 눈앞 탁자에 놓인 차를 마셨다. 너무 태연한 그의 말투에 원로들은 기가 찰 지경이었다.
“어처구니가 없군, 데미안 집정관! 오랜 시간 나라를 통치해오다 보니 정신이 나간 게요?”
“공화국은 현재 열세예요. 다른 방법이 있나요?”
“다른 방법이 없어도 그 방법은 아니지! 겨우 두 사람의 대결에 한 나라의 흥망을 걸 수는 없소! 사흘 뒤라 했소? 그 결투는 무효요!”
“흐음.”
데미안은 심호흡을 한번 하더니, 총회의장에 앉아 있는 원로들의 면면을 살폈다. 하이젠베르크 대장도 허무하게 죽고, 이제 남아 있는 것은 모두 ‘무장’이 아닌 ‘선비’들뿐이었다.
데미안은 뭔가 생각하는 듯 톡톡 탁자를 두드렸다. 그러더니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
“알았습니다. 혹시 제가 사흘 후에 아이젠과 싸우는 것에 반대하시는 분?”
“……?”
“괜찮으니 편히 손들어보세요.”
그러자 원로들의 절반 정도가 손을 들어 올렸다. 개중에는 양손 다 번쩍 들어 올려 자기 의견을 피력하는 자도 있었다.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핀 데미안이 허리춤에서 신살검을 뽑아 들었다. 도신이 절반밖에 없는 그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엇?”
“무, 무슨 짓이오?! 집정관, 어찌 검을!”
“이러려구요.”
슉― 데미안은 신살검을 단 한 번 휘둘렀다. 그러자 총회의장 안에 갑자기 훅! 하고 바람이 들어차더니.
툭. 툭. 툭.
손을 들고 있던 원로들의 머리가 하나하나 바닥에 떨어졌다. 목을 잃은 그들의 몸이 털썩하고 탁자 위에 힘없이 쓰러졌다.
“……!!”
“허, 허억!”
남아 있는 원로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숨소리만 내뱉었다. 데미안은 신살검을 도로 거둬들이고는 말했다.
“더 반대하실 분 계신가요?”
“…….”
“없네요. 그럼 사흘 뒤를 기다리죠.”
그렇게 말하는 데미안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흘은 너무 길었나, 하고.
* * *
그노시스의 스미스쏜즈 지역, 그중에서도 그레이번스 가문의 집 앞.
오랜만에 다시 이곳 땅을 밟은 아이젠은 모니카와 제이슨 정도만 대동하고 마당 위에 섰다.
잠깐 기다리니 집 안쪽에서 반가운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거 소가주님 아니십니깜. 오랜만에 뵙습니담.”
“카론 영감.”
바로 카론이었다. 그는 그 굽은 등으로 아이젠을 향해 열심히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아이젠이 손사래 쳤다.
“왜 이러세요?”
“소가주님이 되셨으니 그에 따른 예를 갖춰야지욤.”
“됐네요. 언제부터 그렇게 착하셨다고. 유진 안에 있어요?”
“유진 녀석은 지금 스미스쏜즈에 새로 차린 대장간에 있습니담. 지금 당장 데리고 오겠습니담.”
“아뇨, 됐어요. 제가 가죠. 위치만 알려주세요.”
아이젠은 제이슨과 모니카를 그 자리에 두고, 홀몸으로 스미스쏜즈 마을로 들어섰다. 본판으로 갔다간 또 여기저기서 인사를 해댈 게 뻔해서, 아이젠은 귀찮음을 덜어내고자 삿갓을 푹 눌러쓴 채였다.
한참을 걷던 아이젠은 마침내 ‘EUGENE’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대장간 앞에 섰다.
‘유진 녀석, 스미스쏜즈에 가게를 차리다니?’
그렇다면 카론 영감님의 건강이 좀 괜찮아진 모양이었다. 가게 안에서는 깡! 깡! 하는 소리가 연신 들려오고 있었는데, 아이젠은 짐짓 모른 체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대장간 여기저기 새로 만든 병기들이 걸려 있었다. 아이젠이 알아볼 수 있는 건 창, 검, 도끼 정도였고 그 외에는 생전 처음 보는 형태의 무기도 있었다.
공통점은 하나하나 고강하게 벼려져 있다는 것이었다.
아이젠이 이곳을 떠난 게 그리 오래지 않은데, 그 짧은 사이 이 많은 병기들을 모두 만들었다니.
‘놀라운데?’
아이젠은 그렇게 두리번거리며 계속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면 갈수록 깡깡 소리가 더욱 커졌다.
그러다가, 어느 한 지점에서 뚝 하고 소리가 멈췄다. 그와 거의 동시에 아이젠도 발을 멈췄다.
다음 순간, 아이젠의 눈앞으로 커다란 크기의 망치가 날아들었다.
쉬익!
콰앙!!
아이젠은 망치를 피하지 않고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확 당겨, 그 끝에 있을 상대방의 옷깃을 붙잡아 번쩍 들어 올렸다. 천장이 낮아서 상대방은 높이 올라가지도 않았다.
“앗, 잠까―”
“늦었어.”
쾅!! 아이젠은 상대방, 유진을 바닥에 패대기쳤다. 유진이 고통을 호소하며 끙끙 앓았다.
“끄응… 아야야. 이 자식, 오랜만에 보는 친구한테.”
“먼저 레테논을 휘두른 게 누군데?”
아이젠이 손을 내밀자 유진이 붙잡고 일어났다. 그는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그사이 아이젠은 유진의 민소매 바깥으로 드러난 몸을 살폈는데, 여기저기 노동으로 생긴 잔 근육이 심상치 않았다. 아이젠도 제법 놀랄 만한 육체미였다.
“오호. 운동 좀 했나 본데?”
“아서라,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을 수야 없지. 망치 두들기다 보니 이렇게 됐어.”
“아냐. 그런 것치곤 상당히 괜찮아. 이 삼각근 하며, 그 아래로 이어지는 이두박근과 삼두근이…….”
“야, 야! 그만하고 용건이나 말해. 무슨 일이야?”
“아.”
유진이 레테논을 한쪽에 치워놓는 사이 아이젠이 그에게 아이기스를 해제해 내밀었다. 유진이 놀랐다.
“아니, 아티팩트에 무슨 짓을 했길래 꼴이 이 모양이야?”
“그럴 일이 있었어. 고칠 수 있을까?”
“땜질은 전문 아닌데. 난 새로 만드는 거 전공이라.”
“그래서 못 한다고? 사흘 안에 해줘야 하는데.”
그러자 유진이 씨익 웃었다.
“전문이 아니라고 했지, 못 한다곤 안 했어. 사흘? 이틀 안에 끝내주마.”
* * *
그렇게 이틀이 지났다. 아이젠은 카론의 집에서 놀고먹으며 시간을 죽였다.
이 이틀 동안 아이젠은 수련을 하지 않았다. 시간 날 때마다 못 해 안달이던 단련을 이번만큼은 쉬었다.
그가 너무 쉬니까 오히려 옆에 있던 모니카가 이렇게 물어올 정도였다.
“소가주님, 저 실례지만… 수련 안 하세요?”
“어허, 모니카. 주인님께 무례한 질문을.”
제이슨이 꾸짖었지만 모니카는 아랑곳없어 보였다. 마룻바닥에 누워 만두나 집어 먹고 있던 아이젠은 모니카를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하고 있는 건데?”
“네?”
“하고 있다고, 수련.”
“…도련님, 죄송한 말이지만 도련님께서 이틀간 여기서 드신 만두가 100판이 넘어요. 카론 영감님 만두 찌다가 쓰러지시겠어요.”
“거참 먹는 거 가지고 되게 뭐라 그러네. 너도 많이 먹었잖아, 모니카. 다 봤거든?”
“어, 어쨌든요!”
아이젠이 끙차 하며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니카는 알 수 없었지만 현재 아이젠의 몸 안에서는 천연한 기운이 파도처럼 범람하고 있었다.
아이젠은 주먹을 꽉 쥐어보았다. 이제 감억귀군의 여파도 돌아왔고, 쉴 만큼 쉬기도 했기 때문에 그의 몸 상태는 현재 최상 중의 최상이었다.
마지막 결전을 위한 준비의 일환으로 아이젠은 휴식을 선택했다. 푹 쉬는 것 역시 수련의 일부임을 사울 장로에게 배우지 않았던가.
“왔다.”
“네?”
아이젠은 마당 너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자 한참 뒤, 유진이 그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보따리를 짊어지고 오는 유진의 용모는 마치 보부상 같았다. 며칠 씻지도 못했는지 그의 온몸이 먼지투성이였다.
“왔군.”
“딱 이틀 걸렸지?”
“그래. 정확하네.”
유진은 모니카와 제이슨을 지나쳐, 마룻바닥 위에 보따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싸여 있던 보를 풀어 그 안에 든 것을 드러냈다.
차라랑― 영롱하고 아름다운 푸른빛으로 반짝이는 아이기스 브레이슬릿의 고운 자태가 세상에 등장했다. 아이젠은 아이기스를 보며 싱긋 미소 지었고, 유진도 따라 웃었다.
“고맙다, 유진.”
“천만에요, 소가주님.”
이제 더는 주저할 것이 없다. 아이젠은 아이기스를 양팔에 장착했다. 그러자 마치 그린 오러가 없어도 현무기공을 마음껏 쓸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까지 들 정도로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철아.”
유진의 부름에 아이젠이 그를 돌아보았다. 유진은 싱그러운 웃음을 보여주었다.
“힘내라. 뭔진 몰라도 너라면 할 수 있을 테니까.”
아이젠은 그런 유진을 보며 기꺼움을 만끽했다.
“든든하네. 그럴게.”
그리고 약속한 사흘째가 되는 날, 아이젠은 라르페소와 아틀란티스를 잇는 경계 지역에 두 발 딛고 섰다.
폭풍전야는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