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 폭풍전야 】
데미안은 마차에서 내린 후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제자리에 있었을 뿐인데 테오발트가 다가와서 배를 찔렸을 뿐이다.
‘어찌 이런 기이한 일이……!’
테오발트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데미안이 고개를 쳐들며 테오발트를 내려다봤다.
“찔리셨네요. 이럴 줄 알고 있었지만요.”
“무슨… 헛소리냐. 큭!”
촤악! 데미안의 신살검이 뽑혀 나왔다. 테오발트는 에레디아를 꽉 쥐고 물러섰다. 장기를 제대로 찔렸기에 지금 당장 치료를 받지 않으면 생명이 위독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 물러설 순 없는 테오발트다. 그는 전쟁영웅. 25년 전부터 이어져온 악연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라도 이 자리에서 데미안을 죽여야 한다.
적국의 집정관이 저기 있다. 이런 기회가 언제 또다시 오겠는가?
‘참철검술 7성, 그린 디바우어러!’
두근! 테오발트의 심장이 빠르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분당 300회 이상 펄쩍펄쩍 뛰는 그의 심장은 톡 치면 터질 것처럼 매섭게 달궈지기 시작했다. 혈류가 빨라지고 테오발트의 온몸에 피 대신 그린 오러가 채워졌다.
그린 디바우어러는 생명력을 담보로 모든 힘을 쏟아붓는, 참철검술 최후의 기술.
현재 그린우드 가문에서 이 기술을 쓸 수 있는 건 직계에서는 그가 유일하고, 방계에서도 4방주인 콘라트를 제외하고는 없다.
이 세상에서 단둘만 쓸 수 있는 최후의 기술로, 최후의 결전을 시작하려 하는 테오발트였다.
그러나.
푸욱!!
“!!!”
테오발트의 몸이 다시 꿰뚫렸다. 신살검이 어느새 다시 테오발트의 가슴을 찌르고 있었다. 데미안의 눈빛은 차갑고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저 멀리 있던 그가 어떻게 이 자리까지 와 있는 건지.
“당신이 그린 디바우어러를 쓰리란 걸 알고 있었어요, 테오발트.”
“이 기술의 이름을… 쿨럭! 어찌 알지?”
“이미 한 번 ‘보았으니까’.”
“보았다고?”
“이제 당신은 죽습니다, 테오발트. 심장을 뚫리고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죠. 유언이라도 남긴다면 들어드릴게요.”
“…….”
주륵. 테오발트의 입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불현듯 아이젠을 떠올렸다. 참철검술 7성에 오른 자신조차 상대가 안 되는 이 데미안을, 과연 아이젠이 이길 수 있을까?
일전에 아이젠과 겨룬 적이 있다. 테오발트는 그때 아이젠에게 졌지만, 그린 디바우어러를 사용하지 않았다. 데미안을 이기지 못한다면 이 전쟁은 패배로 돌아갈 게 뻔했다.
테오발트는 심호흡하고 그린 오러를 양손에 집중했다. 오러를 모으는 동안 시간을 끌 요량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유언 대신… 뭐 하나 물어보겠다.”
“질문이군요. 그러세요.”
“넌 왜… 나이를 먹지 않는 거지?”
데미안은 25년 전에도 집정관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지금 저 어리디어린 몰골인 것은 암만 봐도 이상하지 않은가. 자연의 영역을 거스르는 행동이다. 인간이 아닌 것일까?
데미안이 말했다.
“사실 어떤 질문을 할지 이미 알고 있었어요, 테오발트. 당신의 질문을 들은 순간 어떤 대답을 하면 좋을까 고민하게 되더군요. 제가 내린 답은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거예요.”
푸욱… 데미안의 신살검이 테오발트의 심장을 더욱 강하게 찔렀다. 테오발트는 고통에 휩싸인 얼굴이었다.
“저는 시간을 통치합니다. 25년 같은 짧은 시간은 제게 아무것도 아니에요. 시간은 저를 따르고, 저는 그 아이들을 다스리죠. 그뿐입니다.”
“그게… 큭! 무슨 소리냐…….”
“이해하기 어렵죠? 그럴 줄 알았어요. 이미 본 미래니까.”
촤악! 테오발트의 몸에서 신살검이 뽑혀 나왔다. 털썩 바닥에 쓰러진 테오발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바로 그 찰나였다.
“가주님!!”
공화국군과 제국군이 혈투를 벌이고 있는 전장의 한가운데, 저 멀리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신형이 팟 하고 데미안의 눈앞에 나타났다. 데미안은 주춤 뒤로 물러났다.
나타난 소년, 아이젠은 데미안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테오발트의 앞에 내려섰다.
귀를 기울이자 헐떡이는 숨소리가 들렸다. 심장과 내장을 검에 찔린 듯했다. 지금 당장 치료를 받지 않으면 5분 내로 사망할 거다.
“아이젠이죠?”
아이젠이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집정관 데미안이 서 있었다. 아이젠이 이미 들은 정보대로였다. 그가 이 전쟁터에 나온다는 얘기는 들은 바 없었지만.
“네가 한 짓이냐?”
“그래요.”
아이젠이 양손에 천연한 기운을 흘려 넣었다. 그는 단숨에 데미안을 때려눕히고 테오발트를 사울 장로에게 데려가고자 했다.
‘감억귀군은 아직 사용할 수 없지만, 한시가 급하다.’
사울 장로가 테오발트를 치료할 수 있을지 어떨지, 그것은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때 데미안이 말했다.
“날 세우지 마세요. 전 싸울 생각이 없어요. 지금은.”
“뭐라고?”
그때, 아이젠은 뒤늦게 데미안의 오른손에 들린 것을 보았다. 칼날이 부러진 검이었다. 아이젠은 기억 속 아득한 곳에 잠겨 있던 옛이야기를 떠올려 냈다.
“신살검……?!”
“어라. 이걸 알아요?”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인데. 어떻게 네가 그 물건을 가지고 있지?”
신살검은 천마 도강문의 검. 아이젠이 이강철이던 시절, 8성에 올라 부러뜨렸던 바로 그 검이다.
이 세계로 따지면 최상급 아티팩트 정도 되는 물건으로, 지금 아이젠의 몸을 벨 수 있는 유일무이한 무기이기도 했다.
“그건 도강문이란 녀석의 검이다. 왜 네가 가지고 있는 거지? 어디서 난 거냐.”
“그를 알고 있군요. 이건 보지 않은 미래인걸요. 신선하네요.”
“개소리 지껄이지 말고. 어디서 난 거냐고 묻잖아.”
데미안이 신살검을 들어 올려 보였다. 위력이라곤 없어 보이는 저 무딘 검에 테오발트가 찔려 죽어가고 있었다. 데미안이 싱긋 웃었다.
“전해 받았어요. 아득한 과거로부터.”
“…….”
“아이젠, 당신을 만날 걸 알고 있었어요. 당신한테 거래를 하나 제안하고 싶습니다.”
“거래?”
척― 데미안이 신살검으로 테오발트를 가리켰다.
“그를 데려가 치료하세요.”
“말 안 해도 그럴 거다. 널 여기서 박살 낸 다음에.”
“저희는 사흘 뒤에 싸우기로 해요. 단둘이.”
“단기접전을 제안하는 거냐?”
“맞아요. 일대일로 붙어요.”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왜’는 중요치 않아요. 당신은 이미 사흘 뒤 나랑 싸우게 돼 있으니까. 그렇게 결정됐어요.”
“……? 아까부터 뭔 개소리야, 이 새끼야.”
아이젠은 지금 이럴 틈이 없다고 생각했다. 테오발트는 실시간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그의 오러가 가진 불이 서서히 꺼져가고 있었다.
데미안이 말을 이었다.
“저희 둘이 일대일을 해요. 그리고 이기는 쪽이 나라를 가지는 거로 하죠.”
“우리 둘의 싸움에, 제국과 공화국의 존망을 걸자고?”
“네. 받아들이시겠어요?”
“싫은데. 지금 싸우지 그래.”
아이젠이 서늘하게 대답했다. 그럴 생각이 없다는 눈빛과 함께였다. 하지만 데미안은 어째선지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그럼 사흘 뒤에 봬요. 당신은 나올 거예요. 그렇게 되어 있는 미래니까.”
데미안은 부서진 목제 마차 안에 올라탔다. 그러자 마차 주변으로 공화국 병졸들이 모여들더니, 마차를 형태만 갖춰서 말과 함께 후퇴하기 시작했다.
“전군 후퇴! 후퇴해라!!”
공화국군 사이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러더니 공화국 병졸들은 마치 애초부터 그 자리에 없었다는 듯 쏜살같이 빠른 속도로 후퇴해 버렸다.
우르르르르!
사실은 이번 총력전 자체가 데미안의 말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는 양.
“…….”
제자리에 우두커니 남은 아이젠은, 테오발트를 품에 안고 다리를 박찼다. 지금은 고민할 시간 따위 없다.
* * *
“괜찮겠습니까?”
“좀 조용히.”
아이젠의 다급한 재촉에, 오마르가 역정을 냈다. 오마르는 땀까지 뻘뻘 흘려대며 손에서 불꽃을 피워올리고 있었다.
그의 손에서 빚어진 생명의 불꽃이 바닥에 누워 있는 테오발트의 심장으로 빨려들어 갔다.
후욱! 후욱! 후욱!
연신 들려오는 바람 소리. 그리고 뒤이어, 테오발트의 표정이 편안해졌다. 이마에 묻은 땀을 닦은 오마르는 말없이 아이젠에게 나가자고 손짓했다.
탕. 라르페소성의 방문을 닫고 나온 오마르가 아이젠을 돌아보았다. 아이젠은 대답을 기다리는 얼굴이었고, 오마르는 마치 이제 막 힘든 수술을 끝낸 의사처럼 말했다.
“테오발트 공작은 무사해.”
“휴. 감사합니다, 대공전하.”
“마냥 안심할 건 아니다. 심장이 뚫렸고, 지금은 내 생명의 불꽃으로 그 빈자리를 잠시 메꿔둔 것에 불과해. 언제 상처가 덧날지 몰라.”
“앞으로 전장에 나서실 순 없겠군요.”
“그렇다고 봐야겠지.”
테오발트를 잃었다는 것은 제국 전력의 큰 손실이다. 오마르는 고민하다가 문득 뭔가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할 말이 있다지 않았나?”
“아. 예.”
“뭐지?”
아이젠은 말하려다가 삼켰다.
“황제 폐하까지 다 계신 자리에서 말씀드리는 편이 좋겠습니다.”
쾅! 오마르가 회의장 탁자를 내려쳤다. 그는 버럭 아이젠에게 호통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일대일? 이미 전세는 제국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어! 공화국 놈의 말 따위 들어줄 필요도 없다!”
“진정하게, 오마르 대공.”
레오 황제의 중재에 오마르가 심호흡하며 자리에 앉았다.
옆에 앉아 있던 이스보셋은 자신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라 생각해 가만히 있었으나, 마테오 백작은 뭔가 고민하는 눈치였다.
레오 황제가 마테오 백작에게 물었다.
“그대 생각은 어떤가? 마테오 백작. 뭔가 할 말이 있는 표정인데.”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폐하……. 현재 전세가 제국으로 기운 것은 사실이나 적국의 집정관 데미안은 테오발트 공작님마저 단칼에 베어 넘긴 실력자입니다. 그런 상대를 저희 전력으로 맞붙는다고 해서 이길 수 있을는지는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대 의견은 데미안의 말대로 두 나라의 명운을 걸고 아이젠과 일대일 혈투를 벌이게 둬야 한다?”
“꼭 그런 말씀을 드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명백히 제국이 우위를 점하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계셔주시옵소서.”
“으음…….”
“폐하! 더 들을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 당장 전군을 동원해 공화국을 쳐야 합니다! 아군에도 피해가 있겠지만 공화국은 쑥대밭이 될 겁니다!”
오마르가 강경 대응을 하자고 말했다. 그때 끼어드는 목소리는 아이젠의 것이었다.
“그랬다간 무고한 시민들만 죽어 나갈 겁니다.”
“아이젠!”
“‘전쟁은 무고한 시민들만 죽어 나가는 악마 같은 짓거리다. 하지만 선전포고를 당한 이상 제국 시민들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소임이다’. 전에 폐하께서 제게 해주신 말씀입니다.”
아이젠이 레오 황제를 돌아보자, 레오 황제는 흐뭇한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다음에 해준 말도 기억하나?”
“‘전쟁은 없는 걸 얻는 싸움이 아니라, 있는 걸 지키는 싸움이다’.”
“제대로 기억하고 있군.”
“네, 폐하.”
아이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답은 이제 군더더기 없이 완벽하게 정해져 있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데미안과 단기접전을 끝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