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3분이 지나고, 제국군은 어느새 완벽히 전열을 가다듬고 제 위치를 지키고 선 채였다. 물론 과하게 취한 이들은 전력이 되지 못했지만.
레오 황제 및 오마르, 테오발트, 마테오, 그리고 이스보셋은 멀쩡했다.
제국군의 한가운데 선 레오 황제는 성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지평선 너머로부터 공화국군의 기마대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것이 이제는 선명히 보였다. 레오 황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하이젠베르크… 그자로군.”
“하이젠베르크 말입니까?”
오마르 대공이 그의 옆에 섰다. 그 역시 적군의 선봉에 선 하이젠베르크를 알아보고 눈매를 좁혔다.
“이거 쉽지 않겠군요. 놈들은 역시 총력전을 감행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전면으로 맞붙으면 될 일. 성문을 열게, 오마르 대공.”
“예? …예!”
오마르 대공은 잠시 놀랐으나 이내 입술을 짓씹었다. 혹자는 수성전을 하는 것이 더 나은 게 아닌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하이젠베르크가 가진 고유한 힘을 생각하면 성은 오히려 방해물이 된다.
하이젠베르크라면 라르페소의 이 성 따위는 10초면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제국군에 막대한 피해가 생길 터.
오히려 문을 열고 나가 전면전을 실행하는 편이 옳았다. 오마르가 이스보셋을 돌아보고 소리쳤다.
“성문을 열어라.”
“큼, 알겠습니다. 성문!! 개문!!!”
끼이이익! 라르페소성의 힘 빠지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레오 황제가 가장 앞장서서 밖으로 나왔다. 그를 중심으로 오마르, 마테오, 테오발트가 양익으로 섰다.
그리고 아이젠 역시 그들과 함께였다.
“아이젠, 내게 오게.”
레오 황제의 부름에 아이젠이 펄쩍 뛰어 그의 옆에 붙었다. 레오 황제가 속삭였다.
“그대에겐 주먹의 재주가 있지.”
“네, 폐하.”
“오늘만큼은 사정 봐주지 말고 모조리 박살 내버리게. 황제로서의 명령이네.”
“네. 그리하겠습니다.”
안 시켰어도 그리했을 테지만. 아이젠이 뒷말을 삼키는 때, 어느새 공화국군이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까지 다가와 있었다.
아이젠은 전쟁이 시작되기 전 짤막하게나마 설명을 들었다. 우선 공화국군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은 하이젠베르크 대장이다. 왼쪽 눈을 잃고 없는 그의 모습은 복수의 화신처럼 보였다.
그 왼쪽에 있는 것은 워크맨 소장, 로사리오 소장. 오른쪽에 있는 것은 오거스틴 소장. 간부들이다. 아이젠은 그들 중 누구를 가장 먼저 상대해야 하나 살폈다.
그때, 오거스틴과 아이젠의 눈이 마주쳤다. 대머리인 오거스틴의 눈빛이 해를 받아 반짝였다. 아이젠은 씨익 미소를 짓게 되었다.
“너구나, 내 상대.”
다가오는 상대 막지 않는다. 그것이 아이젠의 규칙이다.
마침내 제국군과 공화국군이 붙었다.
“와아아아!”
“죽여! 베어라!”
“찔러버려!”
“끄악!”
“커억!”
“죽여, 죽이라고!”
“물러나지 마라!”
“이런 씨발! 칼이 부러졌어!”
“으아아! 으아아아!”
“악! 아악! 살려줘!”
아수라장. 그렇게 표현하는 게 가장 적합할 것이다. 여기저기서 소란이 벌어지고, 누군가는 창을 찌르지만 누군가는 빠르게 죽어 나간다. 물살에 모래 산이 깎여 나가는 것처럼, 수많은 병사와 병졸들이 순식간에 명을 달리하고 있었다.
아이젠은 그 가운데 오거스틴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펄쩍! 오거스틴은 말에서 뛰어내려 아이젠에게 주먹을 뻗었다. 아이젠은 그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매그넘 글러브!”
투캉!!
화약이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아이젠에게 떨어진 주먹은, 아이젠을 뒤로 밀려나게 하기에 충분했다. 치이이익! 모래땅을 발로 끌며 밀려난 아이젠은 양손으로 오거스틴의 주먹을 붙잡고 있었다.
‘상당한 파괴력. 이 녀석도 무투가인가.’
오거스틴은 양손에 강철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재질로 만들어진 글러브를 장착하고 있었다. 글러브는 보통 손보다 훨씬 큰 사이즈로 만들어져 있어, 주먹 하나가 아이젠의 머리통보다 컸다.
“무후후! 네가 바로 아이젠 맞지?! 지크프리트를 쓰러뜨린 현 제국의 최대 전력!”
“내가 그 정도인가? 아무튼 대충 맞을걸.”
“난 공화국의 오거스틴 소장! 오늘 이 자리에서 네놈을 죽이고 진급하겠다! 무후후!”
“웃음소리 열 받네? 알았다. 한번 해봐.”
아이젠이 오거스틴의 주먹을 잡은 채로 번쩍 들어 올렸다. 오거스틴의 묵직한 몸이 그대로 허공에 딸려 올라갔다.
“엇?!”
“근데 쉽게는 안 당해.”
콰앙! 아이젠이 오거스틴을 땅바닥에 내려쳤다. 투캉! 그러나 뒤이어 들려온 화약 소리는 오거스틴의 무탈을 의미했다.
오거스틴의 글러브는 손을 넣는 쪽 끝에 구멍이 여러 개 나 있었는데, 거기서부터 화약이 발산되는 장치인 듯했다. 화약으로 땅에 떨어지는 충격을 완화한 오거스틴이 뒤로 물러섰다.
“무후후! 제대로 한번 붙어보자!”
“알았으니까, 웃기지도 않는데 웃는 짓거리는 그만 좀 해.”
슈우우우! 아이젠의 몸에서 천연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무색의 기운은 오거스틴을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아이젠의 몸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관철의 룬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이기스 역시 시퍼런 오러를 피워 올렸다.
아이젠은 내공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것이 사용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그는 그린 오러로 아이기스에 힘을 불어넣었다.
“자, 해볼까?”
* * *
“‘파멸의 불꽃’.”
푸화악! 오마르의 손끝에서 피어난 화염의 꽃이 대기를 뜨겁게 적셨다. 그때 별안간 화염이 확 사그라지더니, 그 뒤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워크맨이었다.
오마르는 워크맨을 깔보는 시선으로 내려다봤다. 키는 오마르가 더 작았지만 말이다.
“뭐냐? 네놈은.”
“난 공화국 소장 워크맨.”
“이름을 물은 게 아니다. 네깟 놈이 뭔데 감히 내 앞을 가로막느냐 질문한 것이지.”
“캬하하! 역시 오마르. 오만이 하늘을 찌르는군.”
워크맨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손바닥에서도 불꽃이 피어올랐다. 오마르와는 달리 새파란 빛깔의 푸른 불꽃이었다.
“캬하하! 잠깐 과학 상식을 알려줄까? 불꽃은 색이 빨간 것보다 파란 쪽이 더 온도가 높지.”
“그래서?”
“즉 나의 이 ‘영광의 등불’이 네놈의 그 불티보다 더 뜨겁다는 얘기다! 캬하하!”
쉬이익― 워크맨의 주먹에서 불꽃이 직선으로 뻗어 나왔다. 오마르가 피할 겨를도 없이.
“영광의 등불!”
퍼어엉!! 강렬한 파열음과 함께 파란 불꽃이 땅을 불태웠다. 휘말린 몇몇 제국군이 타오르는 불길을 제어하지 못하고 죽어갔다.
한편, 불꽃 사이에서 태연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이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오마르였다. 오마르는 입에서 꺼억 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파하. 흠, 그래. 확실히 뜨겁긴 하구만. 근데 이 정도가 최선은 아니리라 믿겠어.”
“캬하하, 뭐야? 센 척하긴!”
“센 척인지 아닌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오마르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근처에 있으면 불타 죽는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인지, 주변에 있던 군사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오마르와 워크맨의 반경 3m에는 접근하는 이가 없었다. 그것을 확인한 오마르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어디, 이렇게 된 이상 나도 더 뜨겁게 불태워 볼까.”
오마르의 주먹에서 또다시 불꽃이 피었다. 조금 전처럼 빨간색이었지만 질감이 조금 달랐다. 마치 지옥에서 불타오르는 듯 끈적끈적한 재질의 화염이 솟아나고 있었다.
“코르비노 가문의 비술, ‘옥염마법’. 워크맨 소장, 오늘 나를 상대하게 된 걸 후회하게 될 거다.”
* * *
파지직! 파지지직!
마테오의 벽력마법이 전장을 수놓았다. 공화국 병졸들은 마테오의 마법에 맞는 순간 겨울철 은행잎처럼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제국군은 순식간에 우세를 점하게 되자 환호했다.
“역시 마테오 백작님이시다.”
“벽력마법만 있다면 제국 승리는 자명한 사실이야!”
그때 마테오의 앞에 펄쩍 하고 뛰어내리는 이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양손에 은빛 천둥을 품고 있는 백발머리의 여인이었다. 4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그 여인은 얼굴 여기저기에 화상 자국을 남기고 있었는데, 눈빛은 매섭기 그지없었다.
“그대가 마테오 백작?”
“그렇습니다만…….”
“나는 공화국의 로사리오 소장. 존명에 따라 그대를 처단하겠소.”
“로사리오 소장이라면… 그 은빛 천둥으로 유명한?”
세상에 번개 마법을 쓰는 것이 마테오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벽력마법이 가장 유명하지만, 공화국에도 역시 번개를 다루는 마법사가 있었다. 그중 가장 강한 화력을 지녔다고 여겨지는 이가 바로 은빛 천둥의 로사리오 소장이었다.
“문답 무용. 잘 가시오.”
쿠르릉! 로사리오의 손에서 천둥이 뻗어 나왔다. 천둥은 대기를 꽝꽝 울리더니 땅을 타고 마테오에게 기어갔다. 마테오가 펄쩍 뛰어 피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그는 전기구이가 되었을 것이다.
“몸놀림이 빠르시오.”
“나이가 나이인지라 허리가 안 좋은데. 끄응…….”
마테오의 손에 노란빛 벽력이 품어졌다.
“얼른 끝냅시다…….”
콰지지직! 쿠르르릉!
두 사람의 번개가 만나 거대한 먹구름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 * *
하이젠베르크는 레오 황제와 마주했다. 사방이 전쟁통으로 혼란스러운 와중에, 두 사람만은 마치 공간이 분리되어 있는 듯했다. 하이젠베르크는 천천히 뮌헨에서 내리는 한편 시선은 레오 황제에게 고정했다.
“하이젠베르크 대장, 그대가 나를 상대해 주는가? 허허, 이거 영광이구먼.”
“적국의 수괴, 레오 베네딕토. 그대의 목숨을 가지러 왔다.”
“이거 뜻밖이군. 그대라면 분명 테오발트 공작과 겨루고 싶어 할 줄 알았는데. 그 눈,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테오발트 공작 아니었던가?”
슥. 하이젠베르크가 제 왼쪽 눈을 더듬거렸다. 그는 잠시 과거 일을 떠올리는 듯했다.
“그래. 그러고 싶었지만 오늘만큼은 양보했다.”
“양보라면 누구에게?”
“그건 당신이 알 바 아니지. 수성을 하지 않고 밖으로 나온 건 전략적으로 칭찬할 일이군.”
“그대의 힘을 알고 있는 이가 나라에 적지 않으니.”
“큭큭. 그래. 알고 있다면 여과 없이 선보여도 되겠지?”
두웅― 하이젠베르크의 눈빛이 변하자, 대기를 둘러싸고 있던 공기가 하늘로 솟구쳐 올라가기 시작했다. 제국군과 공화국군은 모두 갑자기 몸이 가벼워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니,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그들은 실제로 몸이 가벼워졌다. 왜냐하면, 저 멀리 하늘에 떠 있던 달이, 크기를 세 배 가까이 키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힘은 ‘달의 몰락’. 만월의 힘을 끌어다 쓰는 내게 철옹성 따위는 모래성과 다를 바 없지.”
“그래. 그대가 이 세계를 멸망시키기 전에 얼른 쓰러뜨려야겠구먼. 달이 이 이상 가까이 온다면 세상은 종말을 맞이할 거야.”
“안심해라, 수괴 레오. 공화국이 세계의 정복자가 되어야 하는데 내가 이 세상을 종말로 이끌 리 없잖나?”
“설득력이 있군. 하지만 전제가 틀려먹었잖은가. 공화국이 세계의 정복자? 허허, 우스운 농담이야.”
차라락― 차라락― 레오 황제의 손에서 얼음이 돋아났다. 나무가 자라듯 레오 황제의 온몸에서 얼음이 솟아났고, 하이젠베르크는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것이 바로 ‘프로스트 크라운’. 25년 전 전쟁을 종식시킨 얼음 마법인가.”
“그래. 어서 끝내세. 이 힘은 내 생명력을 담보로 쓰니 말이야.”
“흥!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은 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공화국의 승리로 말이야!”
팟! 하이젠베르크가 등에 비끄러매고 있던 폴암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그 폴암 안에 달의 힘을 담았다. 은은하게 빛나던 폴암이 힘을 머금고 레오 황제에게 떨어져 내렸다.
“반으로 갈라져 죽어라!”
파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