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뭐라고? 8성?”
지크프리트는 좀 전의 일을 떠올렸다. 아이젠은 분명 자신을 7성이라 소개했다. 그런데 8성이라고?
그렇다면 이 짧은 전투 사이에 뭔가를 달성했음이 틀림없다.
고오오오― 아이젠의 몸에서 은은하고 파멸적인 기운이 새어 나왔다. 그것은 더 이상 내공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그야말로 패기, 또는 기세라고 부르기에 적합했다.
그렇다, 기세.
“무혈신공 8성, 쇄지의 경지.”
무혈신공이 8성에 다다르면, 아이젠은 더 이상 내공을 운공할 필요가 없게 된다. 원한다면 단전의 내기를 파괴하여도 괜찮다. 아이젠 그 자신이, 그 몸 전체가 바로 그의 무기 전부였다.
이가요새는 별도의 기술 이름이 아니다. 지금 아이젠의 몸 전체가, 하나의 고강한 요새와 같음을 의미했다.
내공이 아니다. 그렇기에 지금 아이젠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기운은 연분홍빛도, 검보랏빛도 아닌, 무채색이었다.
이는 지난 몇 주간 혈투를 벌이며 일수일도를 해제하지 않은 아이젠의 덕택이었다. 급할수록 차분히 돌아가는 그의 선택이 결국은 옳았다.
“고맙다, 지크프리트 중장.”
“아이젠…….”
“나는 이제 현경에 올랐다. 그리고, 잘 가라.”
툭― 아이젠의 무채색 주먹이 지크프리트의 가슴을 때렸다. 지크프리트가 화들짝 놀란 것은 당연지사였다. 왜냐하면, 아이젠은 조금 전까지 저 멀리 떨어져 서 있었으니까.
그 움직임조차 눈치채지 못했나?
‘그렇다면 이 아이의 경지는 이미 나를 아득히 초월했다는 의미가 된다.’
리타스나트의 악마라고까지 불리는 지크프리트다. 그런 그를 아찔해질 만큼 높은 위치에서 내려다보는 것이 바로 지금의 아이젠이었다. 무혈신공 8성이란 그 정도의 수준을 의미한다.
지크프리트의 가슴과 맞닿은 아이젠의 주먹에서, 무채색 기운이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갔다.
“결사신권, 만귀변국.”
휘오오오오오오오!
거센 바람이 불었다. 지크프리트는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 몸을 조금만 틀면 주먹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지 못했다.
움직인들,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콰아아아아아아아!!
꺄아아아아아아!
귀신이 울부짖는 듯한 끔찍한 소리가 대기에 울려 퍼진다. 지크프리트는 가슴에서부터 날아드는 싸늘하고 토할 듯한 감각에 서늘함을 느꼈다.
“우, 우오오오오!!”
마치 일만의 귀신이 지크프리트의 심장을 움켜쥐고 터뜨리려는 것처럼, 지크프리트는 어마어마한 통증을 느꼈다.
고오오오! 일시적으로 검은빛 잔상을 남기는 만귀변국의 탁류 위에서, 지크프리트는 어떻게든 벗어나려 안간힘을 썼다.
‘검은… 칼날!’
다크 폴리시를 머리끝까지 운용한 지크프리트는 홀리 소드를 휘둘러 아이젠을 베려 했다. 그러나 아이젠은 더 이상 베이지 않는다. 8성에 오른 아이젠은 ‘이가요새’. 커다란 요새를 겨우 검 하나로 무너뜨리기란 불가능한 법.
‘크읏, 이대로 죽지 않는다!’
그러나 지크프리트도 전장에서 구를 대로 구른 베테랑이다. 이런 한 방의 공격에 쉽사리 당할 만큼 나약하지는 않다.
지크프리트는 몸을 비틀었다. 만귀변국의 힘 때문에 그 흐름을 거꾸로 타야만 했는데, 마치 물살이 센 바다에서 역류하려는 것같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지크프리트는 온몸의 오러와 근육을 총동원해 몸을 비틀었다. 만귀변국이, 그의 몸을 스쳐 지나가도록.
‘반드시 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곳이 내 무덤이 되겠군!’
결국 지크프리트는 끈질긴 의지로 몸을 90도까지 틀어버렸으며, 만귀변국이 그 몸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꺄아아아아아아!
이번에도 귀신이 우짖는 소리였다. 지크프리트의 몸을 쓰다듬고 지나간 일만의 귀신들이 아쉬운 음성으로 울어대고 있었다. 그야말로 처연한 목소리다.
화아아― 마침내 아이젠의 만귀변국이 끝났다.
“허억, 허억, 허억.”
지크프리트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 자체가 땀 덩어리라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었다. 탈수 증세를 보이던 지크프리트의 입술이 쩍 하고 갈라졌다.
만귀변국이 쓸고 지나간 그의 가슴팍은 피로 범벅되어 있었으며, 배 속의 장기들은 금세라도 피부를 뚫고 튀어나올 듯 꿈틀대고 있었다.
그러나 지크프리트는 무사했다. 만귀변국에 당해 죽지 않았다.
“허억, 허억. 이 정도의 위력이라니, 놀라운 공격이군. 하지만 이만한 힘이라면 아이젠 자네에게 닥칠 리스크도 적지 않을 터.”
지크프리트가 끙끙대며 말하곤 아이젠을 올려다봤다. 아이젠의 오른팔이 미세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본래라면 아이젠의 이 오른팔은 터져 나갔어야 정상이지만, 8성에 오른 지금 그의 오른팔은 터지지 않는다. 말하자면 견딜 만한 수준이었다.
그래도 근육통이 오는 것만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비유하자면 수십 킬로그램의 철봉을 팔이 빠질 때까지 휘두른 느낌이랄까. 아이젠의 오른팔은 적어도 몇 분간은 쓸 수 없었다.
“후우. 역시 이 정도론 안 끝난다는 건가?”
“크하하하… 나는 공화국의 중장 지크프리트. 25년 전 이 나라를 수호한 자라네. 내 몸은 파괴될지언정 나의 불씨는 꺼지지 않아.”
“불씨라.”
“25년 전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을 아이젠 네가 나에게 이긴다는 건―”
“쉬운 일이지.”
“음?”
“불씨는 꺼지지 않는다고 했나? 그럼 파괴해 주마.”
아이젠은 왼손에 무채색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색은 보이지 않는데 대기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 흔들거리니, 지크프리트는 저도 모르게 반보 물러서게 되었다. 이럴 틈이 아니란 걸 알았음에도.
아이젠은 마치 종잇장을 찢듯 가벼운 손놀림으로 왼손을 뻗었다. 왼손은 이번엔 지크프리트의 얼굴에 정확히 맞닿았다.
“앗?”
“결사신권 8성, 쇄지의 경지.”
아이젠의 음성은 고요하고, 낮고, 차갑고, 어둡고, 초연했으며, 짙었다.
“감억귀군(感億鬼軍: 일억의 귀신 군대).”
퍼엉!
소리는 짧았다. 만귀변국처럼 끔찍하게 터져 나가는 파열음이나, 귀신이 울부짖는 듯한 불쾌한 음성도 없었다.
감억귀군의 소리는 단지 한 번의 파괴음. 그리고 그 파괴음마저 눈 깜짝하면 들리기는 했나 싶을 만큼 짧아 허공에서 바람처럼 흩어졌다.
8성은 종이를 파괴하는 경지. 그것은 철이나 인체를 파괴하는 것과는 다르다. 종이를 파괴한다는 것은 그 가냘픈 것조차 갈기갈기 쪼개버릴 수 있다는 뜻.
감억귀군은, 상대의 몸이 아닌 영혼을 파괴한다.
쿵! 털썩!
지크프리트가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제아무리 단단한 몸을 가지고 있다 한들 그 역시 한낱 여리디여린 인간일 뿐이다. 입에서 핏물을 내뱉은 지크프리트는 꿀렁거리는 속을 게워내야만 했다.
“허억, 허억… 내가… 졌는가.”
“지크프리트, 당신은 강했다. 내가 만난 그 어떤 적보다 강했어. 하지만 당신이 만난 가장 강한 적도 바로 나일 거야.”
“그래, 정말 그렇구먼. 크흐흐.”
풀썩! 마침내 지크프리트가 첨탑 위에 엎어졌다. 홀리 소드를 쥔 손에 힘을 넣으려 했지만 도통 가망이 없어 보였다. 고령사를 앞둔 노인처럼 부들부들 떨던 지크프리트는 문득 두려움을 느꼈다.
“이것이 죽음인가. 나는 내가 벤 수많은 이들처럼 죽어가는 것인가.”
“그래.”
“두렵군.”
“그럼 손이라도 잡아드릴까.”
아이젠은 정말로 지크프리트의 벌벌 떠는 손을 잡아주었다. 주변에 있던 수많은 공화국군이 두 사람의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조금 전까지 서로를 죽일 듯 달려들었던 것이 거짓이기라도 한 양, 마치 스승의 임종을 지키는 제자의 모습처럼 보였다.
덜덜덜. 지크프리트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아이젠이 말했다.
“잊히는 걸 두려워하지 마, 지크프리트. 우리는 결국 모두 무로 돌아간다. 지금 살아가는 삶에 충실하면 그거로 족한 거야.”
“스무 살도 안 된… 어린아이에게 이런 소릴 듣다니. 크큭.”
“나이가 뭐가 중요하겠어.”
“그래. 서로의 무기를 쥐는 일대일의 싸움에서 연륜이란 무의미한 것이지.”
미약하게 떨리던 지크프리트의 손이, 서서히 움직임을 죽여갔다. 이제 그의 손은 미세한 진동만을 남길 뿐이었다. 한 번 더 입 밖으로 핏물을 토한 지크프리트가, 초탈한 눈으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즐거웠다. 내가 바라던… 최후야…….”
툭. 지크프리트의 손은 마침내 힘을 잃었다. 아이젠은 그의 손을 바닥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휘오오오―
찬 바람이 불었다. 아이젠이 몸을 일으켜 세우자 공화국 병졸들이 창칼을 꼬나쥐었다. 그러나, 아이젠에게 무기를 찔러 넣을 생각은 도무지 할 수 없었다.
아이젠에게서 느껴지는 무채색의 기운이 걷잡을 수 없이 두려웠으므로.
지크프리트의 사망으로, 라르페소는 제국의 손에 넘어갔다.
* * *
라르페소성 1층 로비에 앉아 있는 것은 아이젠과 테오발트였다.
두 사람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테오발트는 한껏 초조해 보이기까지 했다.
“가주님. 진정하세요.”
“…그래. 아이젠.”
테오발트는 아이젠이 지크프리트를 쓰러뜨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것이 오보라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2주나 넘게 걸린 것이 의외일 지경이었다.
테오발트는 아이젠을 믿었고, 아이젠은 실제로 공화국의 악마 지크프리트를 쓰러뜨렸다. 아이젠의 몸에 남은 상처들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전부 가벼운 자상에 그쳤다. 아이젠은 조금도 힘든 기색이 없었다.
‘자랑스럽구나, 아이젠.’
부끄러워 그 말이 차마 입 밖으로는 나오지 않는 테오발트였다.
그때였다. 벌컥! 하는 소리와 함께 저 멀리 있던 문이 열렸다. 지하실로 향하는 문이었다. 이스보셋의 거대한 덩치가 먼저 드러났고, 그 뒤로 서 있는 여리여리한 여인의 모습은.
다름 아닌 클라우디아였다.
클라우디아는 방금 막 지하 감옥에서 풀려나 이곳으로 온 것이기에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피부는 푸석푸석하고, 온몸에는 작은 상처와 고름, 씻지도 않아 고약한 냄새까지 났다.
주변에서 지켜보던 제국군 중 예의 없는 몇몇 이는 코를 틀어막는 불경함까지 보였다.
하지만 아이젠과 테오발트는 아니었다. 두 사람은 그저 감격에 잠긴 얼굴로 클라우디아를 바라볼 뿐이었다.
테오발트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 클라우디아에게 다가섰다. 그러고는 그녀를 꼭 품에 껴안았다.
“클라우디아…….”
“공작님.”
“클라우디아, 내 살아생전 그대를 다시 만나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소.”
“저도요, 공작님.”
클라우디아 역시 눈물이 날 듯 말 듯한 얼굴이었다. 그러다가 그녀의 시선이 아이젠에게로 향하는 순간, 클라우디아는 끝내 왈칵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이젠… 아이젠이니?”
“어머니.”
아이젠도 천천히 걸어 클라우디아를 함께 껴안았다. 클라우디아는 울먹거리면서도 말을 이어갔다.
“아이젠, 이게 얼마 만이니. 으흑. 으흐흑.”
“…….”
아이젠은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았다. 사내대장부가 어머니를 만났다는 사실로 운다는 것은 자존심이 조금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나, 결국 그도 소리 내어 엉엉 울고 말았다.
여기저기 우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아이젠은 현무의 목소리를 들었다.
[전형적인 가족 만세구만. 유치하긴.]
아이젠은 그의 딴지를 오늘만큼은 그냥 웃어넘겨 주기로 했다.